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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기에 - 양희선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니 마음이 심란하고 착잡하다. 바깥바람을 쏘이려고 문밖으로 나오니 이파리들이 파랗게 너울거리며 나를 반긴다. 양지바른 처마 끝에 옹기종기 심어놓은 꽃과 채소들도 싱그럽게 다가온다. 시도 때도 없이 방긋 웃던 핑크빛 제라늄은 그지없이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향기만 풍기고 금세 시드는 장미꽃에 비할까? 미색 박명이 무슨 소용이랴. 오래도록 호사한 그 열정을 즐기면 그만인 것을.... 화분에 덩치 큰 수국이 탐스럽다. 아기자기한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풍성한 맵시로 가지가지마다 피어났다. 여름 내내 매혹적인 생기를 잃지 않는 꽃, 풍만하고 고결한 그 자태가 요염하다. 들뜬 내 마음도 꽃 따라 예쁘게 가라앉는다. 스티로폼 박스에서 자란 고추와 가지가 주렁주렁 열렸다. 매달린 열매가 갓난아기처럼 여리고 귀엽다. 채소들의 숨결과 내 숨소리가 서로 교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살아 숨 쉬는 게 온 몸으로 느껴진다. 살아 있기에 정이 가고 애착이 간다. 그래, 살아있다는 사실이 소중한 거지! 코로나는 인종차별, 국경차별, 빈부차별, 남녀노소차별, 권력의 차별도 하지 않는다. 분별없는 코로나의 침투력은 전쟁의 살상무기보다 두려운 존재다. 소리 없는 투쟁, 마스크로 입을 막고, 사람과 거리를 두면서, 밥도 같이 먹지 말란다. 살다보니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니 마음만 뒤숭숭하다. 코로나가 제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우리는 꼭 이겨내야 한다. 인간의 능력은 못할 게 없지 않은가? 생의 존엄성이 하찮은 바이러스에 무너질 순 없다. 적을 공격하려면 먼저 적을 알고, 제압해야만 이길 수가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백신과 치료제를 연구 중이니 코로나는 곧 사라지리라 믿는다. 계절은 기다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돌아오는 법. 지난 겨울부터 법석을 떨었던 코로나19는 지구촌을 샅샅이 누비면서 어느새 한여름이 되었다. 인간의 능력이 하늘만큼 높다 해도 자연법칙을 거역할 순 없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한다면 예기치 못한 재앙은 없을 게 아닌가? 평화로운 날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장맛비가 그칠 줄 모르고 장대비로 쏟아진다. 큰 피해 없이 지나가야 할 텐데…. 나른한 오후, 움직이는 것이 싫어질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렇다.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 갑작스러운 스마트폰의 진동소리에 잠을 깬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창문을 연다. 무심코 쳐다본 창문 밖 저 멀리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창문 밖 세상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움직인다는 것은 것은 살아다는 증거구나" 이런 생각은 하나의 상상으로 이어졌다. 창문이라는 틀 안에 보이는 세상에는 움직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가득하다. 지저귀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솟아있는 전봇대는 생명체들과 달리, 항상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멈추어져 있다. 양희선 수필가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길 따라 꿈길>을 출간했으며 자연보호활동 수기 공모에서 가작을 수상하기도 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2.05.12 17:05

아직도 팔팔하다

“어이, 자네 아직도 팔팔해 보이네!” 코로나로 발을 끊자, 가끔 전화에 대고, 얼굴 잊어버리겠다는 성화에 못 이겨, 얼굴이라도 보여줄 요량으로 모처럼 동창회 사무실에 들렀더니 한 친구가 한 말이었다. 딴에는 반갑다는 뜻이었겠지만, 못 마땅해 하는 내 표정을 보고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보자마자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 것보바 났다고 했다. 그리고 열심히 방콕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백발이 늘어 망구(望九)가 되었다며 무심한 세월만을 탓했다. 딴에는 늙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마스크로 코까지 덮고, 머리 위엔 왕관 대신에 팔순때 선물로 받은 우산 형 모자까지 눌러쓰고, 열심히 등산도 하며 건강에 힘쓰고 잇다. 그런데 아직도 팔팔하다는 말을 들으니 언뜻 듣기는 기본이 좋을지 몰라도 비아냥 같이 들려 언짢았다. '998234'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안에 죽어야 복이라는 시쳇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디까지나 노인들의 희망사항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말한 대로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선고된 생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생로병사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아침 식사 후에 외출 할 차비를 한 채 나서면 아내는 깜짝 놀라면서 나가지 말라고 붙잡는다. 코로나가 기저질환이 있는 노인들에게 치명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외출해야만 할 경우에도 절대로 식당에는 들어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당부한다. 살판난 듯 TV를 켠 채 방구석에서 뒹굴어도 보기에 흉하다고 핀잔하지 않는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속담처럼 삼식(三食)이라고 비아냥거림을 감내해야 하던 사람이 집에서 칙사 대접을 받고 있다. 그게 바로 코로나19의 덕이 아닌가. 코로나19 덕을 보는 사람들이 또 있다. 위정자들이다. 대구의 사태가 잘 마무리되자 위정자들은 성공한 K방역이라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치료제나 개발된 백신도 없는 맹탕 방역이다. 그러다가 제2 제3차 감염이 확산되자 코가 석자나 빠져버린다. 실체도 모르고 팔팔하다는 말을 함부로 남용하다가 큰코다친 셈이다. 우리의 피 속에는 웅녀의 DNA가 흐르고 있다. 쑥과 마늘만으로 굴콕하면서 인간으로 환생한 DNA이다. 그 덕으로 우리는 쉽게 거리두기와 비대면 그리고 방콕을 감내하면서 호락질과 같은 생활로 어려움을 버틸 수 있다. 단군신화를 부정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그들은 단군신화 대신에 엉뚱한 신을 믿고, 곧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2·3·4하기 전에 팔팔해져야 한다고 떠들어댄다. 결과적으로 코로나의 집단감염으로 다른 사람들마저 힘들게 하고 있다. 머리를 들고 팔팔하게 나대다가는 234할 수 있으니, 조용히 홀로 비우고 지내라는 것이 코로나의 경고다. 한참 친구들과 코로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아내에게서 식사 때가 되었으니 집으로 오라는 전화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채 집을 향하여 걷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 팔팔하다. 소크라테스는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 앞에서 처음 경험하게 되는 죽음에 대한 흥분으로 독배를 마실 시간이 아직 멀었느냐고 재촉하였다고 한다. 과연 삶에 대칭되는 절대적인 무(無)로서의 죽음이 있는가. 사르트르는 “나는 한때 과거였으며 앞으로 미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무(無)가 있을 뿐이다”고 했다. 생(生)과 사(死)의 이분법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는 것이 팔팔하게 사는 법이다. △이희근 수필가는 정읍 출신으로 계간 ‘문학사랑’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원종린수필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산에 올라가 봐야> , <사랑의 유통기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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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05 14:09

<금요수필> 당신들의 여운

월요일 아침, 상쾌한 바람을 양껏 들이마신다. 코로나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된 이후로는 주말 외출이 더 뜸해졌다. 바쁜 시간표 속으로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은 그래서 내게 ‘환기’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내가 지금의 직장에 몸담은 것은 2002년 3월이었다. 연고 없는 지방에서 안내견과 함께 사회 조직에 첫 발을 들였다. 토요일도 출근했고, 휴일 일직도 있었다. 일요일이면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빈 학교를 지켰다. 보완 장치를 풀고 주요 건물들의 안전 상태를 확인한 다음 대충 자리를 정리하면 법인 시설에 기거하는 학생들이 교무실로 놀러왔다.수업 중에는 나눌 수 없는 개인 상담도, 정다운 다과도 그 시간에는 가능했다. 동생 같던 여고생들이 놀러오면 눈깜짝할 사이 퇴근 시간이 됐다.장애인 활동보조지원제도가 없던 그 때 내 주식은 배달 음식과 각종 인스턴트 식품이었다.요리에 재능도 흥미도 없었지만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혼자 몸으로 먹고 싶을 때 요기했고, 먹기 싫으면 건너 뛰었다. 사회 초년생으로 어설프게 적응해 가는 과정에 배운 술은 내 위를 더 혹사시켰다. 위경련이다, 위염이다 번번이 병원 신세를 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내게 선배 교사들은 무턱대고 부담스럽거나 두려운 존재였다. 사근사근한 성격도 못되는 데다가 전맹으로 사회 경험 폭이 넓지 않았던 나로서는 동료들과의 유대 관계를 구축하는 게 풀기 어려운 숙제 같았다. 더구나 내 또래 교사가 없는 환경에서 내성적인 내가 살아 남는 방법이 무엇일지 사실 완벽하게 무지했다. 꾸역꾸역 출근했고,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서울 본가에서 윤택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기간에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업무에도, 사회 적응에도 나는 미숙했다. 그래서 교무부장님이 더 어려웠다.교무부장님은 워킹맘이었다. 맹학교 교사답게 목소리가 높았고 컸다. 함께 15년 정도 근무했다. 초등학생 아들이 소풍 가는 날이면 교무실 탁자 위에 먹음직스러운 김밥 접시가 펼쳐졌다. 맥주와 커피를 좋아했고, 따끔한 충고를 서슴치 않았다. 열무 김치를 처음 담가봤다며 불쑥 김치통을 내밀기도 했고, 한사코 운전을 마다하다가 친구가 떠넘긴 티코에 나를 태워주기도 했다. 조수석에 아들을, 뒷좌석에 나를 태우고 달달 떨던 그녀가 생각난다. 언제까지고 한 울타리 안에서 일할 수 있을 것 같던 그녀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났다.간암 때문이었다. 진단 받고, 입원하고, 수술하고 상황은 급박했다.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그녀를 보냈다. 장지로 떠나는 마지막 길에 장성한 아들이 엄마의 영정 사진을 들고 학교에 들렀다. 청명한 어느 가을날이었다. 내 삶도 누군가의 가슴에 진한 여운으로 남을 수 있을까? 장영희 교수가 남긴 저서를 읽으며 곁에서 조근조근 대화하듯 그녀의 삶과 생각을 배웠다. 위로를 받고 다시 시작해볼 용기도 얻었다. 교수님 생전에 직접 만나뵐 기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녀가 남긴 생생하고 소소한 에세이는 언제까지고 살아서 많은 이들에게 교훈이 되어줄 거다. 혼탁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은은한 길잡이가 되어줄 거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김성은 수필가는 서울 출생으로 국립서울맹학교와 대구대 특수교육과를 졸업했다. 신아문예작가상을 수상했고, 표현문학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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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28 16:45

돌아온 책가방

수필의 길에 입문하면서 손가방을 들고 다니며 새내기대학생 행세를 했었다. 그러나 허세도 잠시뿐이었다. 수업 자료며 글벗들의 신간을 받고 보니 한 아름이다. 어찌할까 망설이던 중 용도가 다양한 가방이 굴러들었다. 어느 날 출강하는 K의 낡은 가방을 보고서 반 강제로 선물한 것인데, 그와 정년을 함께 하고서 돌아온 것이다. 가방을 들고 처음 집을 나서려니 왜 그런지 쑥스럽고 어색하기만 했으나 이제는 어엿해졌으며 생각부터 행동까지도 학생의 자세로 틀이 잡혔다. 가방과 첫 인연은 초등학교 때 무명천에 물들인 보자기에 출발한다. 당시만 해도 책을 둘둘 말아 허리나 등에 질끈 동여매고 다니던 책보였다. 그리고 가방을 갖고 다니는 사람은 반 아이들 중 손 꼽을 정도였다. 선생이나 수리조합장 아들 정도였는데 내 기억에는 이웃집 순이의 가방이 지금까지 가억에 남는다. 연분홍색 가방은 너무 아름다워 부럽기도 하고 시샘이 나서 몰래 감추어 골탕 먹인 기억은 지금도 깨소금 같은 추억이다. 그렇게도 부러웠던 가방을 3학년 가을 학기에 할머니께서 선물로 사 주셨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품고 잠들 때도 있었고, 책을 넣었다 꺼내기를 몇차례 반복하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할머니의 금쪽같은 용돈으로 마련해 주셨는데, 책 보다는 딱지나 딱총 등 놀이 용품들을 넣고 다녔으니 할머니는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책가방은 우리 곁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이제 핸드폰 속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핸드폰, PC에 전화번호 각종 기념일 특별히 기록해야 될 여러 사항들을 저장하면 된다. 문명의 이기는 읽고 쓰고 기억해야 할 인간들의 수고를 보관하고 있어 필요시마다 제공해준다. 이러한 편의적 사고에 빠져 들어 가방의 용도를 잊어버린 것이다. 가방은 누구에게나 널리 쓰이는 생활용품이다.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하냐?' 라는 비아냥거림이나 가방끈이 길다, 짧다는 등 배움을 가방끈에 비유햇던 속어도 있다. 가방의 쓰임새는 각기 다르다. 내게는 싫건 좋건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들어 갈 때까지 책가방, 서류가방, 여행용 캐리어로 익숙했지만 군인에게는 따불백, 여성들은 핸드백으로 다양하게 쓰였다. 바람이 있다면 이러한 가방 속에 읽을거리 하나쯤 넣고 다니면서 여가를 선용하면 어떨까 싶다. 시작은 늦었으나 심기일전하며 할머니의 뜻을 가방에 담아가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수련(修鍊)의 보고(寶庫)로 삼고 싶다. 일찍이 철이 들었더라면 할머니의 넉넉한 웃음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로 온 몸이 후끈 거린다. 늦은감은 있지만 내 곁에 다시 돌아온 가방은 인연인가 싶어, 물려받은 도자기와 미술품을 함께 고완품으로 남겨 둘까 하는 생각이다. 어색한 교복을 맞춰 입은 예비 중학교 시절, 몸은 자라도 아직 마음은 여린 고등학교 시절, 성인인 대학시절도 장차 나갈 사회에서는 미약한 존재들이다. 이런 시절 어린아이가 곧 제 몸만 한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몸과 마음이 자라 이 사회를 지키는 구성원이 되었다. 가방, 세상 무엇도 이보다 큰 것은 없다. 다른 세상으로 한 발씩 내디딜 작지만 강한 가방을 다시 멘 나를 응원고 싶다. 가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나의 밥이었다. 이제 다시 돌아온 나의 가방을 열심히 메고 다니며 나의 일생을 정리하고 싶다. 곽창선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장을 역임했으며 <표현 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와 현재 표현문학회, 신아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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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14 16:42

아리울의 봄

쏴-, 바람이 불면 멀리서 파도가 바람을 몰고 온다. 물고기들도 춤을 추고 입질이 시작되면 아버지의 손놀림도 더욱 빨라진다. 낚싯줄에 매달린 망둥이가 허공에서 바둥거린다. 물살에 떠밀려와 구럭에 갇혀버린 망둥이들은 바다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으로 뛰어 넘으려 용을 쓰지만 대부분은 우리 가족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밭농사가 없는 초전리 마을의 남자들은 농사일이 없을 때면 바다로 나가 낚시를 했다. 아이들도 따라나서면 개펄은 언제나 그들의 재미있는 놀이터가 돼 주었다. 달랑게가 집 앞에 나와 뽀글뽀글 거품을 짓고 수컷은 암컷의 환심을 사려고 땅을 파서 집을 만들며 구애를 했다. 분주하던 아침 시간이 지나면 갑자기 허전함이 밀려온다. 빈 둥지 증후군도 지났건만 오늘은 왜일까? 차를 한 잔 마셔보지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이 탓일게다. 설거지를 마치고 욕조에 더운물을 받아 따끈하게 몸을 담그니 사르르 눈이 감긴다. 얼마나 지났을까?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닦아내고 긴 머리카락을 풀어 욕조에 담갔다. 빈 마음 한쪽이 따뜻하게 채워졌다. 오늘따라 머리카락이 청정한 미역처럼 싱그럽다. 봄볕이 따사로운 봄날 오후, 창 넓은 찻집에서 먼바다를 본다. 개펄에서 그레질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그들의 구럭 속에는 생합과 바지락이 가득 담겨 있다. 새만금 방조제가 건설될 때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생명의 보물창고 개펄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 석양을 보니 아름다운 산호색 바다에 돛을 올린 요트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바닷바람을 가르며 군무를 하고 젊은이들의 윈드서핑이 그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부럽다. 나도 어느새 그들의 초호화 유람선을 타고 고군산열도를 휘감아 돌고 있다. 붉은 산호색 아리울 항의 경치는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한 폭의 수채화다. 이 땅은 서해 바다와 만경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둑으로 막아 만든 땅이다. 생명을 품어 길러내던, 개펄과 해풍의 신비가 있으며, 자연의 혜택을 거저 얻은 땅이다. 개펄 땅에 소금기가 가시니 영양분 풍부한 찰진 흙이 되었다. 이곳 쌀로 밥을 지으면 윤기가 자르르 하고 밥맛도 좋아 '아리울 미'라는 인증마크를 달고 수출 길에 올랐다. 그리고 비옥한 땅에서 해풍을 맞으며 자란 화훼와 유기농 채소는 청정지역이라는 프리미엄을 얻어 농부들의 연간 소득이 억대를 넘어 얼굴에는 항상 환한 미소가 머물러 있다. 경제특구로 지정된 아리울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몰려들고 인구도 늘어 광역도시가 되더니 시내가 온통 빌딩 숲을 이루었고, 홍콩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한 야경 도시라는 입소문이 났다. 아리울국제공항엔 외국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거리마다 관광인파가 몰려들어 품질 좋은 우리 제품들을 쇼핑한다. 아리울 산업공단에는 공해 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IT산업과 탄소산업, 신약개발 등의 기업들이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어 경제가 활성화되니, 세계 각국의 입주 은행들이 호황을 누린다. 청년들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수입이 안정되니 중산층 가정들이 여유를 즐기며 화목하다. 주변엔 노인들을 위한 숙련된 의료인, 최신의료장비를 갖춘 종합병원이 들어서 마음 든든하다. 여러 문화 시설과도 접근성이 좋아 문화생활이 가능하니 누구나가 살고 싶은 고장이 되었다. 주말엔 손자들과 아쿠아리움에서 잠수부가 되어보고 식물원의 희귀식물, 아름다운 꽃들 속에서 동물들의 재롱을 보며 산책을 한다. 비록 소망 같은 꿈이지만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아리울의 봄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아리울 둑에서 먼바다를 바라보니 봄빛이 일렁이며 나를 향해 팔을 벌려 미소 짖는다. 박귀덕은 <수필과 비평> 출신으로 행촌수필, 전북수필 회장을 맡아 『나의 등단작』,『나는 隨筆家』 문집을 발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수필과비평문학상, 작촌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 했고 『삶의 빛, 사랑의 숨결』 등 수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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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07 16:44

부안 앞바다와 이규보

불그레한 노을의 부안 앞바다 낙조를 보고 황홀경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평선을 향해 서서히 물들어가며, 그 빛을 받아 출렁이는 바닷물은 노래 속의 멜로디를 연상케해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진다. 저녁노을에서 잠시 깎아지른 바닷가로 눈을 돌리면 밀려오던 바닷물이 부딪쳐 부서지는 모습이 꽉 막혔던 가슴을 뚫어주며 상쾌해진다. 오랜만에 나들이를 한 아내의 눈치를 보니 흐뭇해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거뭇한 배가 멀리 황금빛 노을과 어울려 휴대폰을 꺼내 서너 폭을 담았다. 고려시대 이규보도 63세에 부녕현扶寧縣에서 벌목의 작목사로 잠시 관직에 있을 때 여러 편의 시를 창작했다. 그가 곰소항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파란 물결과 푸른 산들이 들락날락하고 붉은 저녁노을로 바다가 붉으락푸르락, 마치 만첩병풍萬疊屛風을 두른듯이 아름다웠다고 했다. 이때 시를 읊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했는데, 부안의 주사포구를 지나다가 휘영청 밝은 달이 해변의 모래사장을 비추어 밤바다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워 시를 한 수 읊었다고 한다. 이 시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과 조선시대 선조의 명으로 조선전기 문신들이 시문을 모아 편찬한 『동문선』 권14에 실린 ‘부녕포구扶寧浦口’이며, 부녕은 지금의 부안이다. 流水聲中暮復朝 흐르는 물소리 중에 저녁은 다시 아침이 되고 海村籬落苦蕭條 해촌마을은 참으로 쓸쓸하다. 湖淸巧印當心月 호수는 맑기에 호수 복판에 당하여 달이 교묘히 찍혀 있고, 浦闊貪呑入口潮 포구는 넓기에 어귀로 들어오는 조수를 탐내어 삼킨다. 古石浪舂平作礪 물결이 찧어 옛날의 돌은 평평한 숫돌이 되고 壞船苔沒臥成橋 이끼가 들어차 무너진 배는 누워 다리가 되었다. 江山萬景吟難狀 강산의 모든 경치 시로 읊어 형상하기 어려우니, 須倩丹靑畵筆描 모름지기 화가에게 붓으로 그려 달라 부탁해야지. 고요한 바닷가마을의 쓸쓸한 정경에도 맑은 바다에 달이 찍혔으니 아름다웠고, 넓은 포구가 조수를 탐내어 삼킨다고 표현했다. 돌은 물결로 숫돌을 만들고 무너진 배도 예쁘게 보였으며, 포구의 모든 경치를 시로 읊어 형상하기 어려우니 화가에 그려달라고 싶다고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경기도 여주 출생인 이규보가 우리 고장 부안을 이렇게 아름답게 시로 읊었겠는가. 지금은 갯벌이 밀려와 썰물이 되면 바닥이 드러나 바닷물이 멀리 보이지만, 이 시를 읊을 때만 해도 원시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부안을 찾을 때마다 곰소항 부근의 염전에서 소금을 긁어모으는 풍경, 곰소항 어시장에서 펄펄뛰는 활어를 떠 소주 한 모금에 회 한 점을 넣고 씹는 맛이라니, 그 맛이 그리워 이곳을 찾는다. 이규보의 ‘부녕포구’라는 시를 접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곳에서 있었던 추억을 더듬게 되었다. 고려시대 이규보가 본 부녕포구의 정경이 내가 그려본 모습과 다르지 않아 감상에 젖은 듯하다. 부녕포구의 아름다움을 노래해준 이규보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머지않은 날 이 시를 들고 우리 고장 전북의 아름다운 부안을 아내와 다시 한 번 찾으리라. △이종희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하고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 회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초원을 찾은 나그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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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31 16:56

천년고도 전주의 곰솔, 그 고고한 자태

천년고도 전주에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준엄하게 꾸짖는 곰솔이 있다. 곰솔은 예부터 여느 소나무보다 억세고 강인함의 상징이다. 바닷가에서 자란 해송(海松), 껍질이 검은 흑송(黑松), 고고한 학의 자태를 닮은 학송(鶴松)이 있지만 천년고도 전주 완산칠봉 끝자락에서 250성상을 독야청청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며 버티고 서 있는 곰솔은 내륙에 깊은 뿌리를 묻고 전주를 지켜온 소나무다. 곰솔은 그동안 열여섯 가지를 사방팔방으로 펼쳐서 마치 학이 땅을 차고 하늘로 비상하는 웅장한 자태를 연상케 한다. 또 한편으로는 12m 높이와 9.6m의 가슴둘레로 학이 땅에 내려앉을 듯이 날개를 늘어뜨리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곰솔은 본디 인동 장(張)씨의 선산을 지켰던 나무다. 고요한 숲속에 파묻혀 하늘보다는 땅을 좋아했다. 대지를 향해 사방으로 고르게 가지를 뻗을 줄 아는 조선 선비의 겸손함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선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겸비한 나무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솔로 꼽힐 정도이며 문화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내륙지역에 자라는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솔로 여겼을까 그런데 2000년 초 전주시의 안행택지지구개발로 곰솔 앞에 8차선 도로가 뚫리는가하면 그 주변에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해 목숨 보전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다행이도 그런 가운데 1988년 곰솔이 천연기념물 355호로 지정되자 그 부근이 문화재 보호구역이되어 택지개발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근본적 대책은 될 수 없어 택지개발로 도심 한가운데 서 있는 곰솔 주변은 외로운 섬처럼 변해가며 끝없이 이어지는 아픔과 상처로 곰솔은 속울음을 삼켜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토지개발이익을 노린 무지몽매한 누군가가 곰솔이 죽어야 천연기념물과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제될 것이며 개발 이익도 챙길 수 있다는 탐욕으로 곰솔의 몸통에 구멍을 뚫고 독극물을 투여한 사건 벌어졌으니 곰솔의 생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였으며 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다행이 2005년 큰 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을 보전했지만 인조나무를 붙인 몸통과 죽은 열두 가지의 볼썽사나운 몰골이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곰솔은 생사기로를 헤매다가 16개 가지 중에서 겨우 4가지가 살아서 남쪽으로 뻗어가며 학이 다시 비상의 꿈 꾸며 날이 갈수록 신비롭게도 푸름을 내비치고 있다. 전문가들의 정밀조사에 다라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사망 진단까지 받을 정도로 몰골이 참담했었다. 찢기고 부러진 곰솔의 상처를 실제 육안으로 보아도 애처롭기 짝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자칫 곰솔은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될 뻔했지만 온 몸이 찢기면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주어서 비록 온전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그 후손들이 옆에서 조상의 아픔을 함께하고 있어 대견스럽다. 각종 위해(危害) 등으로 생육 환경이 나빴던 곰솔의 보호를 위해 주변의 사유지를 사들이고 시민휴식공간으로 조성하려는 계획도 세워져서 여간 다행스러울 수 없다. 인간들의 탐욕 '불천노 불이과 (不遷怒, 不貳過)정신 즉 화(禍)를 옮기지 않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학처럼 독야청청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는 곰솔에게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품위와 도리를 배워야할 일이다. 김정길 수필가는 한국문학신문 수필부문 대상, 새전북신문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그동안 5권의 수필집을 냈다. 현재 전북문인협회 이사 겸 수필분과위원장과 영호남 수필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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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24 17:42

상가(喪家)집 유감

상가(喪家)집 유감 윤 철 친구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받았다. 상가는 슬픔이 물안개처럼 번지며 숙연한 분위기다. 코주름 따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도 괜찮고, 두 다리를 뻗고 구구절절한 사설과 함께 코를 팽팽 거리며 슬픔을 과도하게 풀어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곳이 바로 초상 마당이다. 그리고 상가(喪家) 분위기는 이렇듯 슬퍼야 제맛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작 슬픔을 보여야 할 상주(喪主)의 표정에 슬픔이 보이지 않는다. '긴 병에 효자 없다더니 너무 힘들어서 감성이 말라버렸을까?' 잠시 머뭇거리는데 '의식도 없는 상태로 고생만 하시느니 92세까지 사셨으니 차라리 잘 가셨다'며 호상이라고 상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인의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 운명 직전까지 산소호흡기에 의지했다는 말을 듣고 죽음이 슬픔만은 아니라는 것을 긍정했다. 쌓여가는 병원비 때문도, 남의 눈 때문도 아니며 떠나보내기 싫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혹시 남들의 눈에 불효자로 비칠까 봐 각정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체면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삶인데 타자(他者)의 삶을 살아간다. 행복하게 살았어도 체면 때문에 눈치를 보며 생을 마쳐야 하니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으랴. 우리 주변에는 지금도 목숨을 산소호흡기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환자가 많다. 금방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환자도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이는 꼭 필요한 처치가 아니라 과잉진료다. 이미 뇌사상태에서 맥박만 유지하고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도 그중 한 사람이다. 부모가 나이를 드실수록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과 의무의식에 따른 강박 관념과 함께 고인들도 병원이 편하고 좋다며 집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편과, 오직 집 쪽으로만 머리를 돌리고 심지어 무단퇴원을 감행하는 노인들도 있다. 내 어머니는 집과 병원을 왔다 갔다 하신다. 입 퇴원을 수시로 반복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모두가 짧든 길든 죽음을 앞둔 환자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모범 답은 인생을 미리 그려보는 것이다. 노년의 삶을 먼저 살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살아보면서 꼭 일어났으면 좋을 일을 아주 상세하고 생생하게 미리서 그려 보고 실천도 해 보는 것이다. 내가 그리던 일과 비슷한 일이 생길 때, 마치 내가 기다리던 버스를 타는 것처럼, 그냥 올라 타면 되는 것이다. 난 아직 한참 멀었고 죽음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다며 나는 아직 젊고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이 앞에 너무도 창창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생명이 있는 것들은 정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여러분은 내가 미래에 언제 다시 환생을 할지 할 지 모르는 그 날을 위해 현재를 너무 안위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무런 생각 없이 오늘도 일터로 나가 사람들과 거의 대화 없이 일하고 집에 와서 다시 스러져 잠들고, 내일도 똑같이 반복, 모레도 마찬가지. 누군가를 만나기보다 돈을 더 벌겠다고 당장 만날 수 있는 웃음과 행복을 너무 멀리 계속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 아름답고 소중하며 감사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자. 아마, 내일도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현안의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언젠가는 만날 미래의 나를 상상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잠시라도 생생하게 꿈꾸며 삶의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따금씩 떠올리는 그런, 따뜻하고 생기있는 하루를 보내도록 노력하자. 윤철 수필가는 진안군 부군수를 역임하는 등 36년의 공무원 생활을 했으며 수필전문계간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한 수필가로서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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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10 15:32

굴림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굴러가는 것들의 위력에 대해서 생각이 맴돌고 있다. 지금도 88올림픽 때 8살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던 장면이 종종 떠오른다. 넓은 경기장 가운데로 굴렁쇠를 굴리며 갈 때 넘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있다. 굴렁쇠! 누구나 한 번쯤 굴려 보고 싶었을 것이다. 굴렁쇠를 굴리는 의미가 세계 평화와 동서양의 화합을 소망하는 퍼포먼스임을 알고 감탄했다. 아름다운 것들은 둥글다. 꽃들은 둥글게 피어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나무들도 둥글다. 풀잎 아플까 봐 방울은 둥글게 몸을 말아 내리고 소나기 지나고 일곱 빛깔 무지개도 둥그렇게 뜬다. 순하고 착한 것들도 둥글다. 젖내 나는 아기의 얼굴도 옹알이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미소도 둥글다. 마음과 몸의 수고로움, 제 고단함으로 남들을 이고 지고 가는 것들 바퀴들은 모두 둥글다. 나이 드는 것들 둥글다 오랜 세월 물살에 깎이며/먼 곳까지 구르고 굴러온/작은 조약돌들 둥글다/손때 묻어 낡아져 가고/정 들고 길들여진 것들/내 그리움도 꺼내보면/달님처럼 둥글 것이다 아마도 88올림픽 이후부터, 굴리는 것의 위대한 힘이 젊은이들을 열광케 한 것은 아닐까. 작은 골프공, 야구공, 축구공, 배구공 등 제멋대로 굴러가려는 작은 물체에 온 정신을 모아 기도하듯 뽑아내는 성취는 기적이 아닌 굴러가는 자성(自性)과의 싸움이다. 둥근 것의 우월성은 끊임없는 도전을 부른다. 둥글다는 것은 민첩성과 유연성으로 쉬지 않고 도전을 하게 한다. 평면은 안주하고 안전하다면 둥근 것은 발전적이고 진취적이다. 나는 구르는 것들의 관성(慣性)을 이용하거나 정지시킬 줄을 모른다. 나에게는 평면적인 내성이 잠재하고 있는지 모른다. 굴러가지 않는 것들이 거의 없을 만큼 눈만 뜨면 바퀴들을 굴려야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나 스스로 굴러가게 하는 능력이 없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승용차를 쌩쌩 굴리는 것을 보면 나도 한번 신나게 달리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집에 차가 있어도 나에겐 무용지물이다. 간혹 진작 운전을 익혀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15년 전 면허증 취득 할 때의 스릴이 아직 생생한데 장롱 속 녹색 면허증은 주인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굴려야 부자가 된다는 펀드도 무용지물이다. 서울에 가는 친구는 대박을 터트렸다고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분명 어깨에도 이 생겼을 것이다. 나도 한번쯤 구경하고 싶어 어느 날 광판에는 붉은 글시 파란 글씨가 반짝이는 증권사에 들어가 보았더니 눈이 부셨다. 구석자리에서 구경 좀 하려는데 가만두지 않는다. “어떻게 오셨어요?”, “무엇을 안내해 드릴까요?” 구르는 세상 속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잔머리 굴린다는 말이다. 잔꾀, 잔머리, 말 돌리기, 말 바꾼다. 말만 비단이지 말장난 치는 사람은 진실성이 없어 보인다. 상대방을 무시한다고나 할까. 자기 말에 속아 줄 것으로 착각을 하는데, 사실은 속이 다 보인다는 것을 아는지 모를 일이다. 말이 투박하고 앞뒤가 잘 맞지 않아도 속마음은 상대가 알아주게 되어 있다. 굴리는 재주가 없어도 굴러가는 것들에 얹혀 세상 구경을 좋아하여 무료한 시간이면 마을버스에 오른다. 낯선 골목길에는 생동감이 넘치고 잔잔한 인정이 보인다. 그리고 평온한 일상이 엿보인다. 정신없이 굴러가는 도심보다 소박한 그런 마을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삶의 잔잔한 즐거움을 찾아 종종 마을버스에 몸을 실어 볼 일이다. 요란하게 굴러가는 세상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한눈팔지 말고 잘 붙들고 얹혀 가야 한다. 얹혀가자면 내가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 김덕남은 초등 교장으로 정년하고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향촌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아직은 참 좋을 때> <추억의 사립문> 등이 있으며 삽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김덕남 수필가.

  • 문화일반
  • 이강모
  • 2022.02.24 14:23

예술인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예술’이란 미적(美的)사회를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 활동이다. 그렇다면 21C인 지금 문화예술이 현대사회에서 갖는 역할과 가치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예술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라진다면 어떠할까? 사실 예술은 물이나 공기처럼 생활 깊숙이 밀착되어 있어서 그 중요함을 잊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의 정신적, 지적 활동에서 공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이다. 만약 예술을 빼버린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지루할지는 명약관화하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는 우리의 정체성을 담은 예술 활동이 더 활발히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지난해 『전북예술문화 60년사』를 만드는데 총괄기획을 했다. 전북예총 창립 60년을 기념하여 의욕적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전북의 예술문화 발자취와 전북을 빛낸 예술인들, 전북을 대표하는 전통예술과 문화재 현황, 그리고 전북예총 10개 협회와 12개 시군 예총으로부터 자료를 받고, 선배예술인들이 남긴 기록과 영상자료를 찾아 정리했다. 1986년 전라예술제 때는 활옷에 원삼족두리를 쓰고 청사초롱을 들고 가장행렬을 하는 여성예술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북예총 사무국에는 5명의 직원이 있었고, 회장과 직원들이 운영하는 전용 차량이 있었다. 그런데 현재 전북예총은 어떠한가? 상주직원은 2명으로 줄었고, 10개 협회는 운영비가 없어 직원들의 급여는 물론 사무실을 운영할 능력마저 상실한 상태로 힘든 운영을 하고 있다. 예총은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문화를 대표하는 단체이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역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예총이 하는 일이 바로 정부가 해야 하는 일들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을 예총이 대신해 주고 있다.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코로나로 지친 주민들에게 정서함양과 삶의 여유를 찾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문화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예술인들처럼 어렵고 힘든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일자리를 잃고 건설현장에서 힘든 노동을 하거나 붓 대신 대리 운전대를 잡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통계에 의하면 예술인들의 학력은 대졸이 80%, 대학원 졸업이 32.4%인데 월 소득은 1백만 원 미만이 60%나 된다. 예술대학을 졸업해도 제대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사람이 적고, 예술이라는 자부심으로 끝까지 버티어보지만 척박한 예술판에서 협회비 꼬박꼬박 내면서 예술단체에서 활동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선거철이 되었다. 예전처럼 후보자들은 “지역간 계층간 문화향유의 불균형을 줄이고, 농촌 산촌 어촌 전국 어디서나 누구든지 일상 속에서 예술문화를 즐길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외친다. 문화향유권을 누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하루속히 정부의 법적인 뒷받침으로 예총을 비롯하여 일정 수준의 조건을 갖춘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지원이 있어야 하겠다. 한 나라의 문화예술정책은 정부의 몫이고,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것도 바로 정부의 몫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예술은 우리의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때로는 유희적 표현뿐 아니라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문학 치료, 음악치료, 연극치료, 무용 치료 등의 예술치료는 사람들의 심리적 혹은 신체적인 질병까지 치료한다. 이러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 예술인들에게 박수와 더불어 응당의 대우가 필요하다. 백봉기 수필가는 <한국산문>으로 등단하여 4권의 수필집을 발간했으며, 전북문학상과 전북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전북예총 사무처장과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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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17 17:26

너와는 인연이 아닌가 봐

나는 참 못났다. 촌스럽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커다란 컵에 커피를 담아 거리를 활보하며 커피를 마셔대던 일은 영화 속에서나 보던 외국의 풍경이었다. 우리나라도 지금 길에서 음식을 먹지 않던 동방예의지국의 예(禮)를 벗어던진 지 오래다. 커다란 컵과 겉면에 뜨겁지 말라고 끼워 놓은 외컵 반지는 다시 오라는 상호의 심벌과 함께 컵 모양을 더 예쁘게 한다. 젊은이들이 그런 컵을 들고 길가에서 홀짝거리는 모습이 추하기보다는 굽 높은 하이힐의 키만큼 세련되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커피가 지나간다. 아예 커피로 표현하련다. 무엇이 저토록 신비로워 냄새도 잘못 맡는 부실한 내 코가 킁킁거리며 그걸 따라 돌아갈까? 유혹에 못 이겨 옆 사람의 커피를 한 모금 얻어 마신다. 병아리 눈물만큼이나 적은 커피를 입술에 적시는 순간 혓바닥이 철옹성 같은 이빨을 열어 재키고 개구리 파리 채듯이 잽싸게 채 가버린다. 맛봉우리가 발돋음하며 그 맛을 감지한다."아! 이 맛. 이 향기. 난 이제야 그 세련된 사람들의 부류에 합류되려나 보다." 커피 향이 아까워 차마 삼키지 못하고 입 안 곳곳에 스미게 한다. 미뢰가 탄성한다. 스르르 눈을 감고 '으∼음' 코끝을 발름거리며 귀까지 걸린 웃음으로 태평양의 그 푸른 물결을 날아다닌다. 그맛과 향기는 나를 중독시켜 또 한 모금 마시라 유혹한다. 입안에 향기를 남기고 목으로 넘긴다. 혀가 그 달콤함을 즐기는 여유가 너무 짧다고 투정한다. 목을 타고 넘어가니 요부의 독배를 마신 듯 난 그만 녹초가 되고 만다. 첫사랑을 만난 듯 가슴은 쿵쾅대고 팔다리에 힘이 쪽 빠지며 현기증마저 든다. 주저앉고만 싶다. 독한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후들거리기도 하는 것이 밤새도록 생맥주 500cc 를 반도 못 마시는 주량과도 닮았을까? "너와는 인연이 아닌 가 봐." 난 영락없는 커피 알레르기 환자 '촌닭'이다. 커피, 아직도 나는 네 정체를 모르겠다. 얄밉다가도 노을 녘엔 살짝 그리워지니 애증의 신비한 벗. 커피여! 너의 본능은 유혹인가? 진한 향기는 와인 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사랑처럼 달콤하다. 아무런 느낌도 필요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마시면 된다. 맛이 없어도 굳이 어떤 맛이라고 말하지안하도 된다. 무덤덤한 표정도 괜찮다. 원래 그런 거니까 굳이 맛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그 자리에 없어도 블랙커피는 그냥 탁자에 식어가도 된다. 어차피 주인 없는 커피였으니 그냥 오고 가다 생각나면 머물던 곳에 찾아와 바라만 봐도 좋은 게 블랙커피니까 그래도 난 아침마다 네가 그리워 커피를 잔에 말아 넣고 독특한 향기를 자주 마신다.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면 블랙커피만 한 향기도 없으니 난습관처럼 커피향을 즐긴다. 아무리 그래도 너와 나는 깊은 인연은 아닌개비여. 양영아는 남원 출생으로 교직에서 정년했다. ‘대한문학’ 수필, ‘표현’에서 시로 등단했으며 꽃밭정이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행촌수필문학회 회장으로 있다. 수필집 '슴베', '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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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10 16:56

긍정적인 삶 - 김길남

김길남 수필가. 어느 여대생의 푸념이란 글을 읽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무얼 하겠어요. 결과가 너무 뻔하다는 말이에요. 취직을 해 봤자 대학 4년을 배운 지식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나 할 텐데. 차나 나르고 그렇지 않으면 서류나 챙기고, 그 일도 못하면 결혼이나 하고 4년 동안의 꿈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가 시작 될 것 같아요 였다. 나무나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다. 어떤 일이나 나 나 나로 시들하게 여겼다. 요즘 가정에서 아들딸을 하나만 낳아 귀하게 키우고 어려운 일을 시키려 하지 않는다. 편한 것만 찾게 하고 쉽게 이루려 한다. 오직 입시에서 일류대학에 가야 하는 것으로 몰아붙이며 학원을 이 곳 저 곳 보내고 공부 잘 하기만 바란다. 그리고 사회풍조도 조금만 고통스러워도 못 참고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 경향이다. 그래서 편하게 살려고 결혼도 포기하고 직장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너무 도전정신이 없다. 힘껏 싸워 이기려 하지 않는 나약한 젊은이가 많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나를 도로 바꿔야 한다.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차도 나르고 서류도 정리하고 결혼도 하고로 바꾸면 시들하던 일도 재미가 있고 캄캄하던 앞길도 훤하게 보일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열정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맞이하면 앞길이 열릴 것이다. 이 세상의 일은 하찮은 일이 있고 보람찬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람 사는 일이 날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일 같은 큰 일만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사는 일이란 다 하찮기도 한 소소한 일들이다.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보람을 느끼는 자만이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옛날 숙종대왕이 암행에 나섰다. 어느 오두막집을 지나는데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양반집에서도 보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상하여 주인을 찾아 지나가는 나그네라 하고 물 한 그릇을 청했다. 그 사이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니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고 있고 손자들은 짚을 골라 주었으며 할머니는 빨래를 밟고 며느리는 옷을 깁고 있었다. 물그릇을 받아들고 이렇게 어렵게 사는데 어찌하여 웃음이 그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이렇게 살아도 빚도 갚아가며 저축도 하면서 살고 있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임금이 돌아가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다음날 다시 찾아가 어떻게 빚을 갚고 저축을 하는가 물었다. 주인이 대답하기를 부모님을 공양하는 것이 빚을 갚는 일이고 제가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이 아닙니까? 했다. 삶이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못 사는 것을 원망하고 산다면 무슨 웃음이 나오겠는가? 이만큼 사는 것도 부모님 덕이고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라 여기니 웃음이 그치지 않은 것이다. 행복은 소득수준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국민소득이 최하위인 부탄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현실에 만족하고 더 바라는 것이 없는 순박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너무 욕심을 부리면 행복지수는 낮아진다. 사람이 사는 일이란 모두 이렇게 사소한 일이다. 조그만 일에서 만족을 느끼고 보람을 찾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행복은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찾아 하루 종일 헤매다 지쳐 해질녘에 집에 돌아왔는데 찾던 행복이 집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족이 저녁에 오순도순 모여 밥을 먹으며 아이들 재롱을 보는 일 그게 행복이다. 일상의 일에서 보람을 찾고 행복을 느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가 보다. /김길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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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03 19:26

내 생활의 좌표(座標) - 신팔복

신팔복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일상이 시계의 톱니바퀴를 돌아 나온다. 그런데 노년에 접어들수록 평범한 내 생활의 위치가 더욱 더 궁금해졌다. 1946년 진안의 작은 산골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치고 무주 안성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전북에서 37년 동안 교직 생활을 했다. 가는 곳마다 새로운 경험으로 즐거웠다. 남자들의 안줏거리로 등장하는 군대 생활은 여름 더위는 짧고 겨울 추위는 길었던 강원도 인제에서 했다. 제대하고 용담중학교에서 1년, 마령중학교에서 2년을 근무했으며 안천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던 장인의 관사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진안중학교로 전근하여 첫아들을 낳고 진안읍으로 내려와 살았으며 진안종합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두 번째로 딸 낳았다. 그리고 군산여고로 전근해 월명공원 밑에서 살며 둘째 아들을 낳았다. 아내의 헌신과 함께 가족이 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이후 진안여고를 거쳐 전주동중학교로 발령받아 전주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시 진안제일고로 전근했고 장계중학교와 전주신일중으로 옮겨 무사히 교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등산이 좋아서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와 치악산, 월악산, 태백산, 함백산, 소백산을 올랐고, 신혼여행지였던 속리산 정상과 문장대에도 올라서 아름다운 우리 강산의 경치를 즐겼다. 산이 생각나면 산을 찾았았으며 혼자서 지리산 천왕봉을 하루에 다녀왔고, 아내와 함께 지리산 정상에도 올랐었다. 또 해인사 경내를 둘러보고 가야산도 올랐었다. 진안여고 학생부장이었을 때는 극기훈련으로 간부 학생 30여 명을 인솔하고 덕유산 정상에 올라 대피소에서 자다가 새벽잠을 깨워 해돋이도 보았다. 학생회에서 결정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실행했다. 남해의 상주 바닷가에 숙소를 잡고 해수욕도 즐겼고, 지리산 달궁계곡, 성삼재, 비를 피하며 험하고 먼 산길을 걸어 천은사로 내려간 추억도 있다. 가끔 만난 옛 제자들도 학창 시절에 좋았다며 고마워함을 볼 때마다 새삼 보람을 느꼈다. 북한을 갈 기회도 있어 금강산은 네 차례나 다녀왔다. 맑은 물과 우람한 봉우리들이 첩첩이 수려했는데 그중 만물상의 빼어난 경치가 백미였다. 통일되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 텐데 이산가족도 상봉의 길이 막혀 매우 안타깝다. 가족끼리 중국 북경과 만리장성, 상하이를 여행한 뒤로 장가계 원가계도 여행했었다. 회갑을 맞아 몇몇 가족들과 뉴질랜드와 호주를 다녀왔고, 대학 동기 모임에서는 베트남 하노이와 하롱베이,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와 시엠레아프호수를 구경했다. 군산에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 중국 청도도 다녀왔으며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여행했고, 게르 체험을 하며 유목민의 사는 모습도 보았다. 세 동서 내외가 대만의 대북과 동쪽 지방도 다녀왔다. 고등학교 친구 모임에서 일본 규슈 온천욕을 즐겼으며 작은아들이 캐나다 렛츠브리지 대학 교수로 근무할 때 아내와 함께 북쪽 밴프국립공원을 구경했다. 그리고 작년에는 고등학교 친구 모임에서 내외간에 라오스 수도인 비엔티안과 루앙프라방의 메콩강 지류와 불교사원을 여행하고 왔다. 아직도 나는 유럽이나 미국, 남미, 아프리카 등 가보지 않은 곳도 많다. 마음은 있어도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욕심을 쫓다 보면 불행을 자초할 수도 있다. 지혜로운 자족이 행복의 근원이려니 싶다. 이제는 아내와 함께 국내의 좋은 관광지를 찾아다니며 여러 풍물을 즐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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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27 17:20

띠풀 - 김재희

김재희 수필가 평소 다니던 산책로가 엉망이다. 도로 공사를 위해 길을 막아서 돌아다녀야 한다. 늘 다니던 길이었는데 아쉽다. 어느 땐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그 길로 들어섰다가 되돌아 나오곤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니 자연히 그 길은 멀어지고 이제 새로운 코스가 길이 되어 버렸지만 옛길이 그리워 근처를 서성거리기도 한다. 문득 맹자의 '盡心章句'가 생각난다. 孟子謂高子曰/山經之蹊間/介然用之而成路/爲間不用/則茅塞之矣/今茅塞子之心矣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산길이라도 사용하면 길이 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띠 풀이 자라서 길을 막는다. 지금 그대의 마음을 띠 풀이 꽉 막고 있구나. 사람의 본성도 마찬가지여서 수양하지 않으면 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실현하기 쉽지 않은 글귀다. 누군들 이 사실을 알지만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오래된 일이다. 평소 상당히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있었다. 그와는 마음 내키면 아무 때나 드라이브도 하고 여행을 다니면서 거리낌 없이 속내를 보이던 사이였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르다면 그는 농담을 좋아하고 나는 농담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농담이고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심처럼 받아들이는 관계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하는 농담을 별생각 없이 받아넘겼다. 그런데 그는 본인이 한 말은 농담으로 생각하면서 내 말은 진담으로 알아듣고 마음이 무척 상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연락을 취했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와 결별을 작심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뭐라 변명조차 하기 싫어 그 길로 소식을 끊어버렸다. 그런데 몇 년이 흐른 뒤 정 반대의 일이 생겼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정말이지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척 마음 상한 일을 당했다. 그러나 그만한 일로 정을 끊어 버린다면 내 곁에 남을 친구는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하니, 외톨이가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친구를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다. 우선 내 마음의 상처가 가실 때까지는 자주 마주치지 말자는 생각에 되도록이면 오래 대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래서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예전처럼 가까운 관계로 회복이 되었다. 어느 친구와는 그야말로 띠풀로 막힌 길이 되어 버렸고 다른 친구와는 그런 길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위기를 넘겼다. 진작 그랬더라면 그 어떤 친구도 띠풀로 키웠을지 모른다. 가끔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면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야 좀 더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시행착오 끝에 얻은 결론이다. 인생 공부는 왜 꼭 이런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터득할 수 있는 것인지? 하긴 그런 일들이 있었기에 내가 조금은 성숙해졌는지도 모른다. 부딪치고 꺾이면서 생긴 상처들을 안고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치받고 일어날 때 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고, 극에서 극을 넘나드는 감정의 변화가 때론 삶의 무게를 높여 주기도 했다. 생각이 단순하지 못하다는 것은 맑은 성격이 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많은 삶의 굴곡을 들여다본 경험으로 세상을 깊게 보는 눈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그 친구와의 결별이 오히려 내 삶의 길을 올곧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 지침서가 된 듯싶다. 내 본성을 잃어버리거나 어긋나는 일 없이 잘 비껴갈 능력을 키워 준 것이리라. 이렇듯, 한 번 겪은 띠풀의 경험이 있었기에 내 안에는 다시 그런 띠풀을 다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다. /김재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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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3 20:00

잠이오지 않는 밤이면 - 황복숙

황복숙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슬그머니 일어나 컴퓨터를 켠다. 남편이 깰까봐 불도 켜지 않고 볼륨은 낮추고 어릴 적 아버지 몰래 이불 속에서 만화책을 읽듯이 말이다. 컴퓨터에서 흐르는 트롯에 발을 맞추고 흥얼거리면서 추억의 영화 한 장면처럼 해변을 거닌다. 미국영화 피서지에서 생긴 일을 본 지가 50년 전이었을까? 여학교 때 단체로 관람했던 영화였다. 오래되어 내용은 떠오르지 않고 검푸른 바다 쏟아지던 태양 은빛모래의 해변에서 조니와 몰리가 입을 맞추던 광경만 떠오른다. 2시간 넘게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조니와 몰리의 입 맞추는 횟수만 세었던, 영화를 관람하고도 서로의 의견이 달랐다. 난 91번이라고 했고 담임선생님은 76번 키스를 했다고 하셨다. 지금 다시 그 영화를 보게 된다면 주제곡 선율을 음미하면서 조리와 몰리의 입맞춤을 정확하게 셀 수 있을 것인데라고 생각을 해 본다. 요즈음에는 유학을 가면 외국인과 인연이 되어 국제결혼을 하고, 우리 동네에서도 외국인들이 살고 있기에 외국인을 만나도 별 느낌이 와 닿지 않지만 그때는 쌍커풀진 푸른 눈동자에 금발머리 조니와 몰리가 무척 부러웠었다. 10대의 사랑을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재미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태양이 쏟아지는 해변에서 잔잔히 음악이 흐르고 청춘남녀가 껴안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은 우리의 영화, 음악이 세계화 되어 우리 영화를 지구촌 어디서든지 관람할 수 있고 음악은 화려하게 퍼져 외국인들도 우리말로 부르는 노래를 흔히 볼 수 있다. 잊혀진 영화의 장면을 기억하려고 인터넷으로 내용을 알아보았다. 바트와 실비아의 아들 조니 그리고 켄과 헬렌의 딸 몰리, 몰리의 아버지 켄은 과거에 안전구조요원으로 일하며 내세울 것 없던 청년이었다. 그래서 첫사랑 실비아를 붙잡지 못하고 떠났다. 악착같이 노력하여 백만장자가 되어 살면서도 첫사랑 실비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20년 만에 안전구조요원으로 일했던 파인섬으로 여름휴가를 즐기려고 돌아온다. 다시 만나게 된 켄과 실비아는 아직도 사랑하고 헤어질 수 없음을 확인한다. 이혼을 하고 켄과 실비아는 결혼을 한다. 실비아의 아들 조니와 켄의 딸 몰리는 이 곳에서 만난다.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을 하게 되지만 조니의 아버지 바트, 몰리의 어머니 헬렌이 반대를 한다. 양가 부모님의 반대에도 둘이는 서로 관계를 이어가고 모리가 아이를 갖게 된다. 변호사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켄과 실비아 덕분에 조니와 몰리는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켄과 실비아는 두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이겨 내자고 한다. 안식을 찾은 두 사람, 조니와 몰리가 키스를 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인터넷에 기록된 내용 읽으니 어렴풋이 줄거리가 떠오를까 말까 영화가 끝나면서도 조니와 몰리가 서서 서로 껴안고 키스하면서 끝났던 게 기억된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란 영화를 관람했을 때 미국에 가고 싶었다. 태평양의 검푸른 바다, 쏟아지던 태양, 은빛해변을 동경했다. 그들의 자유분망한 낭만이 지금은 부럽지 않다. 우리의 영화예술이 셰계 각지에서 빅히트를 기록한다고 하니 자랑스럽다. 금발머리와 쌍커플진 푸른 눈동자보다 반달 눈썹의 얍실하고 쌍커플 없는 우리의 얼굴이 미인이란다. A summer place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란 아득히 멀어진 영화주제곡이 내 안의 꿈이 되어 흥겨운 리듬을 타고 날아오른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빠져 보는 매력이지 싶다. 황복숙은 성심여고 시절부터 꾸준히 수필을 써왔으며 온글문학 회원이다. 현재 안골수필반 총무를 맡고 있으며 수필가의 꿈을 안고 습작 중이다. /황복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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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30 19:15

‘저승에는 주막이 없다는데’

최기춘 작가 010-87**-39**신호음은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몇 번 시도하다가 무심결에 상당한 시간이 지나갔다. 수필을 쓸 때는 자주 만났는데 둔산 형이 문인화를 그린 뒤부터 만나는 횟수가 뜸했다. 인구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둔산 김상권 형이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의 무심함이 후회스러웠다. 가슴이 먹먹했다. 예수병원 장례식장은 코로나19로 한산했다. 나 또한 의례적인 인사치레만 하고 왔다. 허망한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오랜 세월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10여 년을 친하게 지냈던 분이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허탈했다. 둔산 형과는 정년퇴임 뒤 수필 부를 하면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103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다. 형은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평생을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 교장선생으로 정년퇴임했다고 했다. 첫인상은 평생 교육자로 살아오신 분답게 따뜻하면서도 근엄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은 꿈을 안고 살아서인지 평생 선생님으로 재직하시다가 정년퇴임했다는 말에 처음부터 호감이 갔다. 나에게는 지금도 선생님이 되고 싶은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103호 강의실 분위기는 참 좋았다. 강의는 수필 이론과 습작한 수필을 발표하고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를 가르치는 교수님은 열성적이었다. 이론 강의와 더불어 수강생들이 쓴 수필을 하나하나 첨삭지도까지 해주셨다. 수강생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단합도 잘되었다. 수필은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함께 공부를 하다 보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다른 곳에서 만난 사람들보다 빨리 친해진다. 강의가 끝나면 교수님과 수강생들이 함께 점심을 먹었다. 반주를 마실 때면 둔산 형이 창작한 건배사 수필아, 고맙다!를 연발했다. 둔산 형이 떠난 지금도 간혹 건배사에 수필아, 고맙다!가 등장할 때면 형 생각이 난다. 형은 문우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글도 잘 쓰지만 때로는 재치 있는 농담도 잘했다. 어디에서나 지갑도 잘 열었다. 나와는 간이 맞았다. 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 같이 맛을 느끼는 사람과는 더 빨리 친해진다. 처음에는 주로 강의실에서 만났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간혹 좋은 수필을 한 편 쓰고 나면 기분이 좋아 서로 전화해서 주로 가맥 집에서 만나 맥주잔을 기우렸다. 가맥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을 테지만 둔산 형과는 서로 입맛이 맞아 어느 장소보다 가맥집이 좋았다. 술은 어디에서 무슨 술을 마시냐보다 누구와 잔을 부딪치냐가 더 중요하다. 술을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소재는 수필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했지만 그간 살아온 추억을 이야기했다. 선생님들은 교감 승진 시험공부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동병상련이랄까 행정 공무원들은 사무관 시험공부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교감이나 사무관 승진시험은 나이 들어 공부해야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그래도 승진한 뒤에는 과정이 어렵기에 성취감이 크다. 형과 나의 삶에 비슷한 과정이 있었기에 더욱 친해졌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생활사는 별다른 이견이 없지만 정치나 종교문제는 때론 의견이 대립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나 종교문제도 성향이 비슷하여 무슨 이야기를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명심보감 언어 편 주봉지기 천종소 화불 투기 반구다(酒逢知己 千鍾少, 話不投機 半句多)" 한 구절이 생각난다. 저승에는 주막이 없다는데 둔산 형과는 이제 잔을 마주댈 기회가 없어 더욱 아쉬움만 남는다. 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은발의 단상〉외 1권이 있다. 대한문학작가회, 영호남수필 회원이며 전북수필 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임실문학회 회장으로 있다. /최기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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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3 19:23

끝까지 못 지킨 약속 - 정석곤

정석곤 2월 초 오후, L교장과 같이 장례문화원 유현상 교육장의 빈소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놓았다. 평상복 차림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머리 숙여 묵념을 했다.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에게 위로의 인사를 드렸다. 세 손주는 그저 좋아서 재롱을 부리며 놀고 있었다. 대학교 5년 후배이지만 세 살 뒤라 올해 집 나이로 일흔 살이다. 지금은 100세 시대가 넘는다고 하는데, 뭐가 그리 바빠서 서둘러 하늘나라에 먼저 갔을까? 가슴이 찡하며 답답했다. 유교육장과는 전북문인협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미리 전화나 문자로 약속을 하고나서 참석하곤 했다. 재작년 늦봄인가? 우리 한 번씩 더 만나게 교원문학회에 가입하라고 서너 번 권유했다. 자기도 이제야 회원이 됐다며 맘이 내키지 않아 두어 달 망설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가입을 했다. 누구보다 진실하신 분인데, 세 번인가 교원문학회 모임에 같이 참석하고서 우리 한 번씩 더 만나자.는 약속을 끝까지 못 지키고 훌쩍 하늘나라로 떠나다니 마음이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나와 만남은 깊었다. 30여 년 전 10일간 국어과 하계연수 때였다. 교육장님은 강사로 와 많은 자료를 나누어주며 열성적으로 강의를 해 첫인상이 믿음직스러웠다. 그 뒤로 2002년 여름방학 때 전라북도교원연수원에서 교감자격연수를 같이 받았다. 익산시내에서 근무하니까 가끔 만났고, 토요일 퇴근길에 점심도 몇 번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교육장은 교감자격연수 성적이 우수하여 승진발령 서열이 앞섰다. 난 그 다음다음이라 희망 지역을 상의해서 임실군으로 내신했다. 그런데 두 자리뿐이라고 전라북도교육청의 연락이 와서 또 둘이 진안군으로 내신했다. 바람대로 다음해 3월 1일자 승진발령을 받았다. 나중에 교육장님의 이야길 듣고 맘이 아팠다. 교육장님이 가고 싶은 M학교를 내가 갔기 때문이다. 자격연수와 발령 동기라 자주 만나고 정보를 교환해 근무가 재미있었다. 그런데 여섯 달이 지나자 K교육지원청 전문직으로 영전을 한 게 아닌가? 한 쪽 날개가 부러진 것 같았으나 축하박수를 보냈다. 유교육장은 본디 명랑하고 겸손한 데다 대학 선배라고 날 만날 때마다 깍듯이 대해주어 미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신할 땐 꼭 내가 좋아하는 정석곤 선생님이라고 시작했다. 그 문자를 받으면 가슴이 뭉클해지며 교육장님을 더 가까이 하고 싶었다. 서로 속맘을 열어 놓고 교제의 끈을 이어갔다. 교육장님은 신실信實한교육자로서 성품이 둘째가라 하면 서운할 정도로 늘 미소 지으며 쾌활하고 겸손하신 분이었다. 게다가 일찍부터 어린 아이 맘을 소유한 아동문학가로서 어린이를 사랑하며 작품 활동에 정진했다. 존경하는 유현상 교육장님! 시인 나태주 시 〈바로 말해요〉가 생각납니다. 지금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말하렵니다. 사랑한다고 말해요, 좋았다고 말해요, 보고 싶었다고 말해요. 거기다 정말을 덧붙여서요. 교원문학회 행사 때는 교육장님과의 약속, 한 번 더 만나자.를 되뇌면서 참석할게요.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어린이들이 꿈을 키우는 글을 많이 쓰는 천사가 되길 소원해요. 운명 같은 만남! 그런데 운명도 돈과 같아서 돈을 쫓아간다고 돈이 달라붙는 것도 아니고, 돈이 사람을 따라야 한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그 누구라도 각자가 갈구하는 짝을 만나는 것도 이런 이치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호연이든 악연이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간에 억지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정석곤 △정석곤은 관촌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하여 <대한문학>수필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풋밤송이의 기지개>등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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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09 19:44

[금요수필] 겉모습과 속마음 - 최정순

최정순 학생들이 내리자 시내버스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빈자리가 생겨 앉으니 기사님의 뒷모습과 수다스러운 동네 아줌마도 보였다. 촉촉이 비가 내리는 차창밖 풍경에 젖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아까부터 띄엄띄엄 앉은 손님 중에 왼쪽 창가에 앉은 아주머니의 옆모습에서 누구인가를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드디어 생각이 났다. 그 아주머니가 누구인가를 알아낸 순간, 단 몇 초 사이에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젊은 시절, 같은 직장에서 나는 서무과 일을 보고 그 분은 국어 선생이었다. 총각선생 두 분 중에 X총각선생이 여 선생의 오빠 친구였다나?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서로 챙겨주는 것으로 보아 좋아하는 사이로 알았다. 그러나 어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이던가?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종아리 보고 허벅지 보았다고 말하는 세상이다. 남녀 관계는 예민한 일이어서 어떻게 그 속을 알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나는 두 사람 사이를 겉만 보고 판단했으니, 나도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어느 날 오후였다. 갑자기 국어선생이 나한테 자기 오빠를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당시 그녀의 오빠는 서울에서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오빠가 없는 나로서는 호감이 갔다. 그리고 오빠가 있는 그 여 선생이 부러웠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오빠를 내게 소개하려는 의도를 알게 되었다.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인가, 퇴근하려고 신장을 열어보니 샌들 한 짝이 없어져서 한참 찾았다. 그때 총각선생이 해성처럼 나타나 복도 천장 벽에 걸린 내 구두 한 짝을 찾아주는 게 아닌가? 장난을 치려고 본인이 해놓고 본인이 찾아준 셈이다. 나는 그때 확실히 알아차렸다. 등불을 켜 됫박으로 덮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총각선생이 국어선생을 좋아한 게 아니라 서무과 직원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 들통나고 말았다. 이것을 눈치챈 여 선생은 그래서 나를 자기 오빠와 맺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을 평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몸, 그 중에서도 얼굴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옷이 날개라는 속담도 있는데 하물며 얼굴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다만 외모지상주의, 외관 중심주의에 집착하면 개인이나 사회나 많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든다, 얼굴 및 몸의 성형에 관해서는 사람에 따라 나름대로 찬반이나 장단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각각 가지고 있으나 나이가 들어서인지 나로서는 겉모습보다는 속 마음을 더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다. 육안보다는 <마음의 눈>으로.....겉모습과 속마음이라는 제목을 접하니, 문득 빅 토르 위고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56년도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가 생각난다. 남녀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의 바탕을 겉 모습보다는 속마음에 두어야 굳건하게 오래 가리라는 생각이다. 인간의 특징 중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반드시 속마음과 겉모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마음은 울면서 겉으로 웃고, 속마음은 싫어하는 데 겉으로 좋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예를 들어 뜨거운 목욕탕에 들어가 아~ 시원하다고 말하는 경우처럼, 인간의 말과 행동은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다양하며 독특할 수 있다. /최정순 최정순 수필가는 196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수필가로서.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대한문학회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속 빈 여자외 4권의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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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02 14:58

어머니의 구슬백

유대성(전주왱이콩나물국밥전문점 대표) 싸드락 싸드락 하릴없이 나선 걸음이었다. 한옥마을에 모처럼 활기가 돋아 가게에서도 하루종일 손이 모자랐지만 한숨 돌리지 않고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가 손을 끌어준 것도 아니요, 오라 부른 것도 아니니 걸음이 내키는대로 휘적이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꽤 멀리 빙빙 돌 듯 발길을 이어갔다. 잠깐 고개를 돌려 한눈 팔 듯 걷다보니 눈 앞에 낯선 조형물이 우뚝 솟아있었다. 순간 낱낱의 기억들이 커다랗게 덩치를 키웠다. 어머니가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날은 무언가 특별한 날이었다. 한복을 입고 길을 나서는 어머니의 손에는 늘 구슬백이 들려있었다. 팥알 크기의 작은 단추 같은 알갱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 손가방은 한복 차림과 어딘지 이질적이면서도 무척 어울렸다. 마디가 불거진 어머니의 손도 구슬백을 들었을 때만큼은 곱디 고와 보였다. 잡는 모양대로 일그러지는 그 구슬백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도무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던 날이 있었다. 장롱을 열고 선반 안쪽 깊이 놓인 구슬백에 겨우 손이 닿았을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던가. 가방 하나 손에 쥐었을 뿐인데 멋쟁이 구두까지 챙겨 신어야할 것 같아 방문으로 향하다가 멈칫했다. 어머니가 꽤나 아끼던 물건 같았으니 몰래 만지다 들키면 야단을 들을 터였다. 대신 언제라도 다시 제자리에 던져놓을 수 있도록 장롱 앞에 서서 슬그머니 입구를 열었다. 구슬 안쪽으로 손에 만져지는 무언가가 있는데 무엇일까. 안에 들어있던 것은 여러 개의 봉투였다. 봉투마다 지폐가 몇 장씩 들어있었는데 그제야 가끔씩 어머니가 누군가의 손에 봉투를 쥐어주던 것이 생각났다. 그 중엔 우리 담임선생님도 있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올케 언니의 손에도 구슬백 안에서 나온 봉투가 쥐어졌다. 참 오랜만에 어머니의 구슬백이 나들이를 나왔다. 멀지도 않은 거리지만 어머니는 딸이 시집 간 전주로 좀처럼 걸음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작은오빠를 불러 여기까지 오셨다. 머문 시간이 한나절이 되지 않으니 그야말로 딸내미 얼굴 보겠다고 오셨다는 말씀이 맞는 듯했다. 바리바리 챙겨오신 꾸러미를 받아들고는 드릴 게 없어, 얇은 봉투 하나를 챙겼다. 손을 내젓는 어머니의 구슬백을 얼른 당겼다. 느낌이 달랐다. 예전에 구슬 너머 느껴지던 봉투의 흔적이 없었다. 뒤돌아 얼른 봉투를 집어넣으며 가방 안을 슬쩍 보니, 참으로 가난하게도 사탕 몇 개가 전부였다. 어쩌면 어머니가 손에 들고 있는 저 손수건 정도나 여기서 나왔을 터였다. 기껏 빈 것이나 별 차이 없는 얇디 얇은 봉투 하나 넣어드린 게 오빠 차가 떠난 후에도 못내 마음에 남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디론가 사라진 구슬백이 한옥마을 그 거리에 있었다. 저 가방 안에 지금은 무엇이 있으려나. 문득 구슬백 들고 한복 치맛자락 날리며 걷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그리워졌다. /유대성(전주왱이콩나물국밥전문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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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25 17:19

거짓말

이성수 수필가 지구에서 상대방과 의사소통하기 위해 말을 하는 동물은 우리 인간뿐이다. 그런데 언어가 먼저일까, 사고(思考)가 먼저일까? 어느 것이 먼저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어도 언어와 사고가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논리적 사고력을 갖춘 사람은 논리적 언어를 구사한다. 이는 사고가 언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사회적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발전시켜 나간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그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즉 언어는 해당 사회의 모습이나 특성을 드러내며, 경우에 따라 언어가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어에는 지역, 인종, 나이, 계층, 신분, 성별, 직업, 이념 등에 따른 사회적 특성이 드러나 있다. 지역 방언을 예로 들어 보자. 부추는 지역에 따라 솔(경상, 전남), 졸(충청), 정구지(충청, 전북, 경상), 분추(강원, 경북, 충북), 쉐우리(제주), 푸초(평북), 염지(함경)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같은 부추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따라 부추를 가리키는 말이 다른 것이다. 우리가 말을 하면 누구나 참말이든, 거짓말이든 내 말을 듣고 관심을 보인다. 오늘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를 좋아하고 기쁨을 안겨주기도 한다. 상대방의 인격과 취향에 따라 나에게 믿음을 주며 자기 속내를 들추어 보인다. 자라면서 학교와 직장에서 맺어진 인연은 나의 언행을 보고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며 평생을 이어간다. 자기의 능력과 역할에 따라 각기 다른 일터에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며 아름다운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에게 꿈을 주어 행복을 키워나간다. 아내가 화장을 하고서 여보, 나 예뻐? 하면 참이든 거짓이든 안 예쁘다고 말하는 남편은 없을 것이다. 더욱이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의사는 불치병도 곧 나을거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거짓말은 선의인데 사람들 중에는 양심을 저버리는 거짓말을 쉽게 하기도 한다. 요즈음 매스컴을 보면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피하기 위해 얼굴 색 하나 바꾸지 않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지만 결국 판결에서는 거짓말임이 판명되어 옥살이를 한다. 거짓말을 밥 먹듯 쉽게 하는 그들을 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한 번은 깊게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내 잘못을 인정하면 그 사람의 품위가 평가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을 텐데 한결같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속셈은 무엇일까? 다른 영향도 크겠지만 인간의 기본 인성과 인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올바른 사고, 인간의 가치관, 사물에 대한 진실의 판단이 잘못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가끔 교육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글을 쓰고 사회의 중추적인 핵심 부류의 사람을 만드는 인문학의 길이 잘못 이어오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순자(荀子)의 성악설과 맹자(孟子)의 성선설을 보면서 그에 따른 진위를 평가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알고 거짓과 참을 구별하게 된다.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인간으로서 이 일이 옳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분별력이 있다. 감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다. 어쩔 때는 자기 양심을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감으로 자살하는 경우를 본다. 거짓말이 판쳐도 배우고 깨우치는 한 우리 인간이 질서와 예의를 지키면서 올바른 사회를 이끌어 갈 현명한 두뇌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성수 수필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하고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은빛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을 동해서 정화된 사회 가꾸기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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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1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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