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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빨간 머리 병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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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순 수필가

해마다 3월이면 마당에는 햇병아리가 그득했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시골에서는 가용비 마련이나 식구들 보양식 감으로는 닭만 한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네집 할 것 없이 병아리를 길렀지만 사료를 사서 기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주로 방목이었다.

 아버지는 덕가리에서 병아리를 한 마리씩 꺼내 머리에 빨간색 물감을 발라 마당에다 훅 던지며 "잘 주워 먹고, 잘 찾아오너라." 하시던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난다. 한 배에서 태어난 병아리가 스무 마리 정도였는데 아버지는 허실 없이 키워야 한다며 암컷을 더 챙기셨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요놈들을 여섯 달만 잘 키우면 알을 낳을 것이고, 그러면 딸내미가 사달라는 별표 운동화랑 크레용도 사줄 수가 있지.'하셨다. 검정 고무신만 신었던 나는 운동화를 사준다는 말씀에 병아리를 정성껏 돌보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꼬리를 치며 반기는 강아지는 뒷전이고 병아리부터 찾았다. 만약 병아리가 보이지 않으면 입술을 쭉 빼고 '구- 구-구'를 외치며 집 안팎을 샅샅이 뒤졌다. 

 입술이 얼얼해져 헛바람이 나오도록 한참 찾다보면 엉뚱하게도 뒷집 대밭 속에서 어미 닭과 함께 삐약거리며 따라오는 병아리를 보면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대숲은 족제비나 들고양이들이 득실대는 곳이라 행여 잡아먹힌 병아리는 없는지 세어보고 또 세어보곤 했었다. 이렇게 돌보아도 병아리 수는 차츰 줄어 열서너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알에서 깬 지 3~4개월쯤 자라면 중병아리라 했고 대략 6개월이 지나면 암탉은 알을 낳았으며 어미 닭도 이 무렵이면 젖떼기라도 하듯이 새끼들을 아프지 않을 만큼 쪼아댔다. 3~4개월이 지나면 암수 자웅을 구별할 수 있었는데 수컷은 암탉과 달리 다리가 길고 꺼벙했지만, 벼슬이 돋고 혈기가 넘쳐 눈도 불그스레 번쩍거리며 가끔 하늘로 목을 쳐들고 '나는 왕이다'고 외치듯 '꼬끼오' 소리도 제법 질렀다.

 수컷들은 암컷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싶은 자리다툼 싸움이 갈수록 치열했다. 피가 나도록 상대방을 마구 쪼아대며 싸우다가 한 쪽이 날개를 서서히 접으며 눈꺼풀을 내리깔면 한바탕 싸움은 끝났다. 그뿐만 아니라 닥치는대로 먹어치우고 파헤쳤다. 

 사춘기 시절의 반항아들이라더니, 우리집도 남동생 넷이 모이면 수탉처럼 형과 아우가 따로 없이 서로 욕지거리며 힘겨루기를 하며 자랐다. 사실 나도 병아리가 아니던가.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날 때쯤이면 대추 볼때기가 발그스름했다. 아침 일찍부터 대추나무 밑을 서성였던 일이며, 벌집이 달린 줄도 모르고 나뭇가지를 흔들다가 주인집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에 놀라 신발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도망치지 않았던가?

 그날 밤, 벗겨진 신발짝 때문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날이 밝았다. 날이 밝자, ‘최 생원 계신가?’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때는 무서워 떨었건만, 지금은 토방에 놓인 신발짝 하나마저 왜 이리도 그리움으로 밀려오는지! 여섯 달만 잘 키우면 알을 낳을 것이고, 그러면 운동화와 크레용도 사줄 수가 있다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은 내 어린 시절 병아리와 함께 자라면서 머릿속에 도장 찍힌 희망이었다. 

 병아리는 자라서 어김없이 알을 낳았는데 딸 결혼식도 보지 못할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 선반에 올려놓고 저고리 동정을 달아 벽에 걸어 놓았건만, 입어보지도 못하신 아버지였다. 지금도 달걀만 보면 아버지가 생각나고 별표 운동화가 머릿속에 떠 오른다. 

최정순 수필가는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대한문학회·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속 빈 여자‘외 4권의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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