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홧가루 흩날리는 계절이다. 비록 윤사월은 아니지만 요즈음은 송홧가루가 뿌옇게 하늘을 뒤덮은 채, 살랑살랑 봄바람에 날아든다. 그렇게 날아온 송홧가루가 지붕위에도 내려앉고, 꽃밭에도 뿌려지다가, 때로는 문틈이나 마루틈에도 소리 없이 끼어든다.
정말 이맘때는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는 박목월의 ‘윤사월’이라는 시가 절로 생각나는 계절이다. 그런데 시는 그렇게 애절하지만, 여기에서 문설주를 모르면 그 시를 읽는 감흥이 반감된다.
문설주(柱)는 그 이름에서 짐작되는 것처럼 기둥이다. 아니, 기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해진다. 문설주는 문을 내기 위해서 문꼴의 좌우에 세워둔 수직부재다. 문설주를 알게 되면 문인방과 문지방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문설주를 기둥으로 그 위에 수평으로 걸쳐댄 부재를 문인방이라고 하고, 그 아랫부분에 받쳐놓아서 사람이 넘어 다니는 문턱을 보통 문지방이라고 한다.
시에 나오는 눈먼 처녀도 아마 여느 여염집 처자처럼 수줍음이 많았던지 차마 방안 풍경을 쉽게 엿보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에 돋아나는 궁금증을 감추지도 못했나보다. 그래서 아랫마을 박 서방이 사랑방으로 들자마자, 아궁이에 불을 때다 말고 살금살금 마루로 기어 올라가 어른들의 얘기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띠살문도 아니고, 하얀 회벽도 아닌, 문설주에 귀를 대고 엿듣고 있다는 어느 늦은 봄날의 나른한 풍경을 이 시는 스케치해놓고 있다. 물론 그녀가 엿들은 것은 시답잖은 혼담 얘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긴 봄날 덧없이 우는 꾀꼬리 울음소리였을 수도 있고, 송홧가루를 흩날리는 바람소리였을 수도 있다.
운치 없이 벌쭉하게 서있던 문설주도 그런 때가 있었다. 이 방 저 방을 펄렁거리며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리던 애들 때문에 다소 헐렁해진 돌쩌귀를 단단하게 다시 고쳐 박느라, 망치로 이리저리 애꿎게 얻어맞을 때에만 그 존재를 알리던 문설주도 그렇게 행복한 때가 있었다.
건축은 그런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서 그저 묵묵히 배경으로서만 존재하다가도, 때로는 이렇게 양념처럼 툭 튀어나와 극중 재미를 더하게 할 수도 있다. 옛날에는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더 이상 그런 걸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인생에서 관객과 배우 그리고 시나리오는 모두 그렇게 제각각 타고난 사주팔자대로 서로 다르게 구성되지만, 어느새 그 무대는 한결 같이 아파트만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삼호건축사사무소 최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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