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부채질 그리워지는 여름
요즘 여름은 예전보다 훨씬 더 무덥고 길어졌다. 그래서 옛날 같으면 정자나무 아래 삼삼오오 모여앉아 한가롭게 부채질을 하거나, 등목을 하는 것만으로도 한여름 무더위를 쉽게 이겨나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어림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더위도 훨씬 더 지독해졌고, 훨씬 더 매서워졌기 때문이다. 농약에 내성을 가진 병충해가 더 기승을 부리는 것처럼, 아마 더위도 내성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아니,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적응력이 형편없이 떨어져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름이 다가오면 남보다 먼저 냉방용품부터 챙기는 풍경이 이젠 낯설지 않게 되었고, 또 어딜 가나 집집마다 외벽에는 에어컨의 실외기가 나보란 듯이 걸려있다. 이제 정말 에어컨 없이 한여름을 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아파트에 살다보면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뜨끈뜨끈하게 지핀 보일러 때문에 속옷차림으로 생활한다고들 하지만, 그러한 무감각이 비단 겨울풍경만은 아닌 것 같다. 요즘같이 무더운 한여름에도 에어컨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 때문에 간혹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생활하는 경우도 있고, 또 때로는 개도 안 걸린다는 그 오뉴월 감기를 달고 사는 사람도 있다. 이른바 에어컨이 쏟아내고 있는 ‘자연의 바람’을 과신하고 있는 탓이다.
물론 바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바람은 아니다. 정자나무 밑으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물길을 따라서 다리 밑을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도 있고, 여인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봄바람도 있다. 또 꽃바람, 샛바람, 하늬바람, 된바람도 있고 산들바람, 건들바람, 실바람, 남실바람, 왕바람도 있다. 그리고 선풍기나 부채질로 가볍게 기류를 공간이동 시켜서 얻어지는 산산한 바람도 있다.
그런데 다른 바람하고는 달리,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는 문제가 있다. 에어컨을 켜놓은 방은 시원한데, 그 시원한 바람의 량만큼 데워진 공기는 다시 외부로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실내는 시원한데, 실외는 더 더워지게 된다. 결국 나는 시원한데, 다른 사람은 그만큼 더 불쾌한 공기를 들여 마셔야 하는 것이다. 부채질을 하면 주변까지 다 함께 시원해지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에어컨에 따라붙는 실외기 설치위치에 대해서 별도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이게 모두 다 현대 기계문명 자체의 태생적인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쾌적하고 편리하고 안락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불편과 희생일랑 아예 모른 체 해야 한다. 에어컨이 그 창구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에어컨의 실외기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열기로 후끈 달구어진 도심거리를 지날 때마다, 나지막한 툇마루에 나란히 누워 살살 부채질을 해주시던 옛날 할머니 모습이 유난히 더 그리워지는 여름이다.
/삼호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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