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작 모두 사들인 우진문화재단 25일까지 도청서 전시회 마련
1991년 기업메세나 일환으로 우진문화공간을 개관한 우진건설의 김경곤 회장은 1997년 서양화가 권영술(1920∼1997)의 장례식장에 문상을 갔다. 그 자리에서 김회장은 유족들에게 언젠가 작품을 내놓아야 할 때 우진과 상의해 달라고 했으며, 몇 년 후 권영술이 남긴 150여점의 작품을 통째로 구입했다.
1995년에는 전북미술협회가 주최한 김현철(1924∼1980) 유작전이 열렸다. 그가 세상에 남긴 작품은 30여점이 전부. 역시 우진에서 사들였다.
김회장이 권영술과 김현철의 작품을 일괄구매하다시피 한 것은 그들이 바로 전북 서양화단의 1세대들이기 때문이다. 전북 근대미술은 식민지시대 현실에서 일본의 창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흡수됐고, 권영술과 김현철은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의 시대적 아픔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북의 근대 서양화단의 형성을 주도했다.
김선희 우진문화재단 기획실장은 "우진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기업메세나가 미술사업이었고, 회장님 개인적으로도 미술인들이 특히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며 "가족들이 작품을 가지고 있을 형편이 안되는 상황에서 원로작가나 작고작가 작품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누군가는 모아두는 작업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우진문화재단이 전북도립미술관과 함께 '전북근대미술의 선구자-권영술 김현철'전을 마련했다.
30일 전북도청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전시 개막식에서 김경곤 회장은 "우리 지역 작고작가의 작품이 전국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가치가 인정되고 후대에 전할 수만 있다면 일괄구매의 의사가 있다"고 다시한번 밝혔다.
권영술은 완주군 이서 출생으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동경독립미술협회전에서 입선하며 두각을 나타냈지만, 귀국 후 당시 식민지 문화정책에 회의를 느끼고 고향으로 낙향해 36년간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그의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과 시골 풍경들은 소박했던 우리의 지난 모습을 담고 있으며,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 속에서도 깊은 공간감을 형성하면서 화려하지만 결코 과하지 않은 풍부한 색채의 표현으로 서정적이면서도 담백한 우리의 미의식을 추구했다. 1954년 '신상미술회' 창립회원으로 전북지역 근대서양화 도입기의 산파역을 담당했다.
김현철은 부안 출생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30여년 간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194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여차례 개인전을 가질 정도로 창작열정이 남달랐다. 권영술과 함께 '신상미술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69년 '전북미술대전' 창립위원, 1970년 '전북미술연구소' 창설 등 지역미술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섬세한 관찰과 진지함으로 접근해 자신만의 사상과 해석을 작품에 투영했다. 그의 작품은 엄격한 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나이프로 긁어내는 독특한 질감 표현과 힘찬 터치, 절제된 색감은 짧은 생애만큼 강렬했다.
권영술 작품이 따뜻한 봄날의 느낌이라면, 김현철 작품은 가을과 겨울의 스산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서로 다른 예술세계를 가졌지만, 그림에 대해서는 치열한 예술정신으로 지역 화단을 고민했던 진정한 작가들. 그들의 체취를 25일까지 전북도청 기획전시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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