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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⑮손과정의 서보(書譜)

문학적 심도가 깊은 초서의 대가…힘 넘치는 남성적인 글씨 구사

孫過庭 撰書 '書譜'(687년) (desk@jjan.kr)

손과정(648?~703?)의 자는 건례(虔禮)이며 부양(富陽 절강성) 사람이다. 그에 관한 전기는 보이지 않고 여러 서론에 단편으로 언급되어 있어 그 대략만을 추정할 수 있다. 40세에 벼슬하여 우위주조참군과 솔부록사참군(率府錄事參軍)에까지 이르렀으나 참언으로 물러나 빈곤하게 살다가 낙양 식업리(植業里)의 객사에서 죽었다. 진자앙(陳子昻)이 묘지를 썼다.

 

고전을 좋아하고 문학적 명성도 있었으나 특히 초서를 잘 썼다. 이왕(二王)을 배워 임모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는데, 당대의 서론가 장회관(張懷瓘)은 「서단」에서 손과정의 글씨를 신(神)·묘(妙)·능(能) 3품 가운데 능품에 배열하고 "儁拔剛斷 尙異好奇"라고 평하였다. 이왕의 글씨를 배워 힘이 넘치는 남성적인 글씨를 구사하였으며, 글씨에 기이한 풍도가 깃들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는 "왕소종(王紹宗)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의 글씨는 지나치게 느리게 써서 느슨한 폐단이 있었고, 손과정은 늘 급하게 써서 버리곤 하였다. 이에 왕소종의 너그러움(寬)과 손과정의 사나움(猛)을 중화하면 좋을 것이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 가운데 특히 '少功用有天材'라고 평한 구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손과정이 천재성을 보이며 힘써 연습하지 않아도 금새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공부에서 천재설과 장인설을 일컫는데, 대부분의 경우 장인설을 높이 평가한다. 천재가 쉽게 일가를 이루는 것보다 평범한 사람이 오랫동안 공부하여 마침내 깨달은 뒤 뛰어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보다 드라마틱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회관의 말대로 손과정은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정작 손과정은 자신의 천재성을 꾸준한 노력과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발현했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렇게 결실을 맺은 「서보」는 그의 문재과 필재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서품이다.

 

손과정이 직접 글을 지어 초서로 쓴 「서보」는 초서에 관한 의견을 진술한 것으로 시작한다. 변려문의 형식으로 작성된 글은 왕희지를 전형으로 삼고, 위진 이래의 능서가들을 품제하면서 서예술의 가치 및 학서이념을 논하였다. 특히 창작론으로 제시한 오합오괴(五合五乖)는 매우 유명하여 일찍이 추사 김정희도 작품으로 써서 남긴 바 있으며, 이외에도 집사용전(執使用轉), 삼시삼변(三時三變)의 설을 통하여 작가와 운필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서보」의 글씨에 대하여 당대에는 천편일률적이라서 변화가 적고 운필이 너무 빠른 단점이 있다고 폄하하고 있으나, 북송 이후에는 초서의 전범으로 존중되었다. 예컨대 미불은 당대의 초서 중 이왕의 법을 회득(會得)했다는 점에서는 손과정을 앞서는 자가 없다고 추켜세웠다. 이후 왕희지의 「십칠첩(十七帖)」과 더불어 초서 학습의 지남서로 지칭되었다. 지면 관계상 앞서 언급한 오합오괴 중에 오합(五合)만을 여기에 소개한다.

 

"늘 기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힘씀이 '一合'이요, 민감한 감수성으로 두루 아는 것이 '二合'이요, 좋은 날씨에 원기가 풍부한 것이 '三合'이요, 종이와 먹이 서로 발하는 것이 '四合'이요, 우연히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五合'이다." (一時而書, 有乖有合, 合則流媚, 乖則彫疏. 略言其由, 各有其五. 神怡務閑, 一合也; 感惠徇知, 二合也; 時和氣潤, 三合也; 紙墨相發, 四合也; 偶然欲書, 五合也.)

 

/이은혁(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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