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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④백화양조-(1)백화에서 롯데까지

'백화수복'에서 '처음처럼'까지…'한국 술의 역사' 간직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1. 1947년 사입(술을 담그는 일)을 마치고 증미실(고두밥을 찌는 곳) 입구에서 강정준 사장(앞줄 좌에서 00번째)을 비롯, 전 사원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당시 조선양조는 양곡난, 쌀값폭등, 양조금지령 등으로 인해 청주생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국 48만5000원의 적자를 내고 말았다. 2.1950년 제1회 전국주류품평회에서 최우등상을 수상한 뒤 조선양조 입구 공터에서 찍은 기념사진. 3.1967년 군산시 대명동에 세워진 백화소주 공장과 주정공장인 백화산업 전경. 4. 백화양조 생산라인에서 작업하고 있는 여성 근로자들의 모습. 5. 백화양조 제품들. 맨 앞의 컵모양 제품이 1984년 출시한 신제품 원컵 청주. 마시기 쉽고 계산이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180㎖짜리 원컵 백화수복은 지금도 생산 판매되고 있다. (desk@jjan.kr)

군산시 소룡동 군산산업단지 내 12만6530㎡(3만8275평)의 광활한 부지에 자리잡은 (주)롯데주류BG 군산공장(공장장 강춘식)은 청주와 소주, 인삼주, 와인, 위스키 등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모든 주류의 역사가 담겨 있다. 정부의 주류정책, 서민들의 애환, 주류업계의 전쟁, 수출, 사업가의 고충과 기업(가)의 부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광복 후 고 강정준 회장이 설립, 65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백화양조는 두산주류BG를 거쳐 롯데주류BG로 거듭나는 등 경영권에서는 큰 변화를 겪어왔다. 하지만 백화양조가 국민 가슴에 깊숙히 새겨넣은 청주의 대명사 백화수복 브랜드는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2009년 3월3일자로 롯데주류가 인수한 군산공장은 연간 8만㎘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백화수복과 청하 등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청주에서부터 고급청주 설화에 이르기까지, 마시기 편하고 품질좋은 청주를 생산하는 전통기업으로 여전히 각인돼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주 '처음처럼' 생산량은 지난 12월 한달동안 4500만병에 달했다. 지난해 월평균 생산량은 4020만병이었다. 가정용과 유흥주점용 등을 모두 합했을 때 처음처럼의 마켓쉐어는 48∼5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주류는 사업을 인수한 후 16.8도의 저도주'처음처럼 Cool'을 출시, 젊은층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기업주는 바뀌었지만, 군산에서 생산되는 청주 수복과 설화은 물론 소주 시장에서도 '처음처럼'으로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다.

▲ 일본으로 건너가 '정종'된 전래의 술 '청주'

지난 15일 방문한 (주)롯데주류BG(Business Group·사업부) 군산공장. 홍보업무를 맡고 있는 관리팀 유진후 팀장의 안내를 받아 공장 견학에 나섰다. 하루에 860가마(80㎏들이)의 현미를 3차에 걸쳐 가공하는 대규모 도정공장을 출발해 홍보관과 세미, 증미, 발효, 압착, 저장에 이르는 일련의 청주 제조 공정 등을 살펴보는 견학은 1시간이 넘는 코스다.

청주(淸酒)는 쌀로 빚는 양조주다. 말 그대로 맑은 술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다보니, 청주는 일본식 표현인 '정종'으로 불리고, 일본 전통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청주는 우리 전래의 술로서, 일본에 건너간 술이다.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응신 천왕 때(AD 270∼312년) 백제사람 인번(仁番)이 일본으로 건너 와 청주 제조 기법을 전수하였다"라는 기록이 그 근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집에서 청주, 약주, 막걸리 등을 빚어 마셨다. 하지만 술빚는 일이 양조업으로서 기업화된 것은 대부분의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1900년 이후 일이다. 1909년 주세법이 공포됐고, 각 지방마다 주조장이 세워져 규모화 된 생산이 이뤄졌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 일제의 쌀 침탈 창구가 되면서 군산은 정미업과 양조업이 성행하는 계기가 됐다.

'군산상공회의소 100년사'에 따르면 개항 당시부터 군산에 세워진 주요 회사 및 공장은 1899년 상야주조장, 암본주조장, 1908년 적송장유 주조장, 1909년 향원주조장, 1920년 군산주조(주), 1927년 조선주조(주) 등 양조기업이 많았다. 이들 양조장은 모두 일본인 소유였다.

청주 공장 설립은 타지역에 비해 늦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청주 공장은 1883년 1월 부산에 세워졌고, 이후 인천과 부평, 서울, 마산에도 들어섰다.

군산에 청주 공장이 세워진 것은 1917년으로 알려져 있다. 1915년 일본인 니시하라가 충남 논산에 조선주조(주)를 세운 뒤 '조화(朝花)'상표를 단 청주를 생산했는데, 생산이 늘어나자 1917년 군산에 조선주조 군산분공장을 설립해 경성(서울) 공급 물량을 맞췄다. 당시 전국에는 120여개의 청주 제조업체가 가동됐으며, 군산의 청주공장은 조선주조 군산분공장을 비롯해 향원양조장, 상야양조장, 암본상점, 군산주조, 일본주조 등 6개였다.

▲ 청년 강정준 조선주조 군산공장 인수해 창업

백화양조 창업주는 인당(仁堂) 강정준(姜正俊) 회장(전 호원대학교 이사장·2001년 4월 작고)이다. 해방 후 백화양조를 창업, 굴지의 주류기업으로 성장시킨 강 회장은 1915년 6월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강인지는 호조참판을 지냈고, 부친 강덕찬은 농업을 경영하면서 넉넉한 가세를 유지했다. 강 회장은 유복한 집안 환경 속에서 자라던 중 1931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했고, 와세다대학 상과에서 기업인의 꿈을 키웠다. 강정준은 25세이던 1940년 귀국 후 조선주조 군산분공장에 취직, 일하던 중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일본인 공장장 다음 서열의 부책임자가 됐다.

해방 후 일본인 기업은 모두 미군정청에 귀속됐다. 전북지역 귀속기업은 모두 219개였으며, 군산의 기업체가 67개로 가장 많았다.

군산분공장에서 경리와 판매책임을 맡아 일했던 강정준은 미군정청의 적산기업 관리방침에 따라 책임자로 선임됐고, 공장 내부를 정리한 후 1945년 11월1일 청주 생산을 재개하는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아울러 귀속기업 불하를 겨냥, 새로운 회사 설립 작업을 벌였으며 1946년 5월 '조선양조주식회사'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대표 취체역에 선임되는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46년 5월27일 설립등기 당시 자본금은 200만원이었고, 1주당 50원 모두 4만주의 주식이 발행됐다. 공장 근무자는 경리·판매직 4명, 생산공원 20명에 불과했으며, 양조 기술자가 없어 상야양조장에서 일했던 장동남을 기술자로 채용했다.

▲ 난관 헤치고 첫 해 15만원 순이익

조선주조 군산공장의 모든 시설과 재산을 임대해 출발한 조선양조는 1500여 평의 공장에서 연간 300∼400석(1석=180ℓ)의 청주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주요 시설은 가마솥 3개, 화입솥 3개, 압착기 2대, 정미기 2대, 여과기 6조, 목통 129개, 탱크 14개였다.

하지만 장밋빛 청사진을 그리며 조선양조를 출범시킨 강정준 대표의 앞에는 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철저한 저온관리가 요구되는 청주의 제조상 특성 때문에 여름철을 피해 공장을 가동해야 했다. 해방 전과 달리 현미를 구할 수 없어 밥을 지어먹는 반미를 도정해 청주원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청주 품질이 떨어졌다. 전력난 때문에 야간에는 촛불을 켜고 작업하기 일쑤였고, 물이 부족해 인근 샘물을 계약해 사용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제1결산기인 1946회계연도(1945.11.1∼1946.8.31)에 청주 352석을 생산판매, 194만 4930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15만 337원의 순이익을 냈다.

그러나 1946년 2월 한 가마니에 60원 하던 쌀값이 1947년에 8300원까지 치솟고, 미군정청이 식량난 해소를 이유로 1946년 11월22일 양조 금지령을 통해 쌀을 주원료로 하는 술 제조를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1948회계연도에는 주정에 기타 물료를 첨가한 합성청주를 생산하는 등 악전고투했지만 매년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조선양조는 '주질본위'의 경영방침을 고수하며 품질향상에 힘쓰는 한편 49년7월에는 자본금을 600원으로 늘렸다.이어 새로운 주세법 시행으로 양조의 쌀 사용조치가 완화되자 1950회계연도에는 청주 453석을 생산했다. 특히 1950년 5월8일 열린 제1회 전국주류품평회에서 최우등상, 전국상공장려관 개관 전시회에서 우등상을 잇따라 수상하며 청주 전국 제패의 서곡을 올렸다.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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