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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7)백화양조 ④두산 거쳐 롯데주류BG

경영권 바뀌고 시대 변해도 '백화수복' 명성은 영원히

사진 위에서부터 1986년 6월 생산된 '청하', 국내 양주시장에 새 바람을 일으켰던 '죠지 드레이크', 국산 위스키의 대명사격인 '베르나인 골드'. (desk@jjan.kr)

청주시장을 제패하고, 소주에 이어 양주시장까지 사업 규모를 확대하며 종합주류 메이커로 성장한 백화양조는 소주와 양주 사업 부문에서 패착에 빠지고, 경영권까지 흔들리면서 1985년 말 결국 두산그룹에 경영권을 넘기고 만다. 또 두산은 24년만인 지난 2009년 3월부로 주류사업부를 롯데주류BG에 양도했다. 65년 역사의 백화양조는 이제 롯데주류BG 군산공장으로서 고급청주 설화 등 청주와 소주(처음처럼) 명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 위스키 시장 진출 과정과 실적

1975년 12월31일 시판을 개시한 죠지 드레이크(원액함량 19.9%)가 국내 양주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키며 엄청나게 팔려나가자 백화양조는 위스키 제조공장을 이전 설립하기 위해 1976년 10월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에 60만평의 임야를 매입했다. 이어 12월에는 1980년말까지 몰트 위스키 국산화 시설을 완비하는 조건으로 위스키 제조면허를 받았다.

그러나 백화양조는 죠지 드레이크가 원액함량 19.9%로서 주세법상 '기타 재제주'에 속함에도 불구, 원액함량 20% 이상인 '위스키'로 표기한 것이 문제가 돼 결국 1977년 4월 탈세혐의로 수사를 받는 등 어려움에 처한다. 당시 기타 재제주의 세율은 100%인 반면 위스키는 200%에 달했다. 조사 결과 탈세는 무혐의 판정을 받았지만, 법인세 6000만원을 추징당했다. 또 죠지 드레이크라는 상표 사용은 물론 위스키 표시도 할 수 없어 죠지 드레이크 생산을 중단했다. 큰 타격이었다.

이 사건 후 국세청은 1977년 7월까지 원액함량 25% 이상인 위스키를 개발해 시판토록 조치했고, 주류업계는 주세법 제5조에 의거해 위스키 제조장을 별도로 세워야 했다. 백화양조는 시일이 너무 촉박했다. 중기 계획으로 세웠던 위스키 고창 공장 설립을 포기하고, 1977년 6월23일 군산세무서로부터 위스키 면허를 재발급 받은 후 군산시 월명동 군산 북중학교 자리에 위스키 공장을 세웠다.

백화양조의 새 위스키는 원액함량 25% 알콜도수 43도였고 원액은 노드런 맥콜사에서 공급받았다.

당시 국세청 방침은 위스키 상표명이 순수한 우리말이어야 한다는 것. 사내 공모 끝에 '베리에이틴'을 선정해 신고했으나 국세청은 순수 우리말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베리나인'이다. '베리'는 순 우리말 벼루의 사투리로서 '낭떠러지 아래가 강이나 바다로 통한 위태한 벼랑'이라는 뜻. 공교롭게 벼랑·계곡을 뜻하는 영어 'Valley'와 음과 뜻이 일치한다. '나인'은 궁중에서 왕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뜻한다. 백화양조는 '베리나인'에 대해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로 위스키를 만들어 왕과 같은 고객에게 바치겠다"는 해석을 붙여 가까스로 국세청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또 과거 공전의 히트를 친 죠지 드레이크의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가기 위해 죠지 드레이크 병을 사용하고, 상표 디자인도 그에 따랐다.

이 때 경쟁사들도 새 위스키를 내놓았는데, 진로는 '길벗' 해태주조는 '드슈'였다.

우리나라 주세법상 최초의 위스키 베리나인은 1977년 7월23일 첫 생산됐고, 대대적인 TV광고를 업고 7월25일부터 본격 시판됐다.

백화양조는 77년 하반기와 78년 상반기에 걸쳐 모두 5만 2856상자의 위스키를 출고, 51.6%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진로 39.3%, 해태주조 9.1%였다. 그러나 새로운 위스키 시장을 놓고 엄청난 판촉활동과 광고전을 벌이면서 위스키 사업분야는 적자를 면치못했다.

하지만 백화양조는 베리나인에게 압도당한 경쟁사들이 만회를 위해 고급 신제품을 출시할 것으로 판단, 고급 신제품 '베리나인 골드'를 개발했다. 베리나인 골드는 '주령 12년의 정상급 위스키 베리나인 골드'를 헤드라인으로 내건 광고를 앞세워 1978년 7월26일 시판에 들어갔다. 진로가 프리미엄급 위스키 '길벗 로얄'을 개발해 대항했지만, 1979년 1년간 베리나인 골드는 프리미엄급 위스키 부문에서 28만 2500상자를 출고, 시장 점유율 68.5%를 기록하는 등 시장 점유율을 더욱 확대했다.

하지만 1980년을 전후해 대통령 시해사건과 제2차 유류파동이 터지면서 국내 위스키를 비롯 맥주와 청주 시장은 침체됐고, 반면에 소주 소비량이 급신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 동양맥주가 미국 씨그램사와 합작, 오비씨그램을 설립한 후 1981년 8월 내놓은 위스키 '블랙스톤'이 점유율을 올려나가면서 백화도 타격을 받았다. 1983년 백화양조의 위스키 점유율은 50.2%로 내려앉았고, 진로 26.2%, 오비씨그램 23.6%였다.

▲ 위스키 생산 전문기업 설립과 실패

백화양조, 진로, 오비씨그램 등 위스키 3사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적자경영을 해야 했다. 다른 주류사업 부문에서 얻은 흑자로 위스키 부문 적자를 상계, 회사 전체의 이익을 줄였기 때문에 결국 법인세 납부액이 감소했다. 이는 다른 주류 가격 인상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이에 정부는 1981년 12월, 세수확보와 대중주 가격 인상 방지를 명분으로 내세워 위스키와 타주류를 함께 생산하는 기업에 대해 1982년 6월말까지(추후 12월말까지 연장) 위스키 부문을 별도 법인으로 설립하라고 지시했다.

이 당시 백화양조는 주력인 청주의 소비 감소와 건설 등 신규사업 실패 등으로 심한 자금 압박을 받고 있었고, 위스키 단독법인을 설립할 경우 존속시킬 능력이 크게 부족했다.

하지만 그동안 다져온 베리나인 골드 시장을 넘겨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위스키 전문기업 '베리나인'의 설립등기를 1982년 12월 10일 마쳤다. 자본금 5억 6000만원 가운데 5억원을 백화양조가 출자했다. 초대 임원은 회장 강정준, 사장 이건중, 부사장 강희중 등 이었다.

베리나인 위스키 공장은 백화양조로 부터 현물출자 받은 대명동 소주공장 자리에 세워졌다. 블렌딩실, 병입시설 등을 갖추고 1983년 11월 9일 첫 제품이 나왔다. 새 공장은 생산능력 1000㎘의 몰트위스키 제조시설과 연간 50만 상자의 병입시설 외에는 투자를 극소화한 시설이었다.

베리나인은 제1기(6개월)에 순매출 38억 7000만원, 순이익 2억원을 올렸다. 또 다음해인 1984회계연도에는 순매출 93억 3000만원, 순이익 2억 8500만원을 달성했다. 이 때 광고선전비가 무려 18억 3000만원에 달했다.

그러나 프리미엄급 위스키 베리나인 골드로 큰 성장을 이어가던 베리나인은 1984년 특급위스키 시장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며 1985년도 회계연도에 매출액이 72억 5700만원으로 떨어졌고, 무려 9억 4600만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정부의 특급위스키 생산정책에 따라 1984년 6월 내놓은 '베리나인 킹'이 오비씨그램의 '패스포트'와 진로의 '비 아이 피'에 밀린 것.

특급 위스키 시판 전 70일이었던 매출채권 회수기일이 베리나인 킹 시판 5개월 후인 1984년 11월에 100일을 넘어섰고, 1984년 6월 130억원이었던 차입금이 1985년 6월에는 209억원으로 늘어나는 등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됐다.

베리나인은 킹의 대체품으로 신상품을 계획, 1986년 7월28일 신제품 썸씽 스페셜을 첫 출하했다. 1912년 스코틀랜드의 힐 톰슨사가 발매한 프리미엄급 위스키로서 맛이 매우 부드러워 한국 소비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출하 초기 6개월동안 9만 2000상자가 판매돼 특급위스키시장 점유율 16.7%를 기록했다. 베리나인은 1987년 위스키 총판매량을 50만 상자로 끌어올리며 15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는 백화양조가 경영권을 두산에 이양한 후의 일이었다.

▲ 소주사업 포기와 원료용 주정배정권 매각

백화양조는 초기 청주 전문 생산기업으로 출발, 소주와 주정 생산에 뛰어들어 백화소주와 백화산업을 계열사로 이끌었다. 또 술 지게미(주박)을 이용한 식초 생산기업인 화영식품을 인천시 북구 작전동에 설립했고, 태양건설을 인수해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종합주류 메이커로 성장하기 위해 위스키 사업도 펼쳤다.

또 이 과정에서 백화양조는 김제 포도주 농장, 고창 위스키공장 부지, 경기도 용인 부지 등 많은 부동산도 보유했다.

백화양조는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할 만큼 청주 부문에서는 거의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화영식품도 창업 초기 어려움을 딛고 흑자를 내는 기업이었고, 위스키 부문도 베리나인 골드라는 명품을 내세워 기반을 탄탄히 했다.

하지만 1979년 무렵 내린 '소주사업 포기' 결정은 백화양조의 경영상 큰 오점으로 지적된다.

당시 백화양조 등 소주업체들은 경영상 어려움이 있었다. 정부가 1976년 11월 '도내에서 50% 이상을 의무 판매'하도록 조치, 백화양조의 경우 이리의 보배양조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게다가 정부의 주조 시설 개선책에 의거, 55만달러를 투자한 것도 자금부담을 가중시켰다. 소주는 출고량 비율로 원료 주정을 배정받기 때문에 주정 배정량 확보를 위한 밀어내기 출고에 따른 출혈도 심했다.

결국 백화양조는 전체적인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소주사업을 포기하기로 결정, 1980년 1월 소주 원료용 주정배정권을 진로와 무학, 보배, 보해 등에 12억 8530만원을 받고 매각했다.

하지만 이 무렵 제2유류파동 등 불황으로 고가의 위스키와 청주 판매는 줄어들고, 저가의 소주 판매가 호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소주 시장은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갔으니, 백화로서는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두산주류BG시절 옛 백화소주의 명성을 살리기 위한 계획이 추진됐고, 1999년 4월 '백화소주 20'이란 이름으로 20년만에 부활했다. 이후 2003년 산소주, 2006년 2월 처음처럼(19.5도)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백화양조는 두산을 거쳐 롯데 일가가 되면서 안정적 성장 기반을 구축했다. 비록 경영권이 변하고, 시대가 변했지만 '백화수복'의 명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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