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게 바로 인생
진실을 믿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주식이 하한가로 곤두박질 칠 때, 멀쩡하던 지인의 부음을 들었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TV에서, 눈 앞에서 일어날 때 나는 주문을 외운다. '아니야, 이것은 현실이 아니야.' 내가 본(들은) 것을 부정한다. 부정의 포즈가 강할수록 지독한 꿈은 현실이 된다. '천안함'과 '연평도'가 그랬고, 오늘 차 안에서 잃어버린 내 가방이 그렇다. 분명 차 뒷좌석에 있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보이지 않는다. 마술처럼 그것은 공기 중으로 증발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하서)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부엔디아 가문의 4대에 걸친 저주와 신기루처럼 사라진 '마콘도'라는 마을의 이야기. 이곳에 근친상간의 저주가 있다. 터부를 통해 마을은 생겨났고 도시로 번창했다. 이 모든 것이 백 년 전의 예언에 의한 것. 돼지꼬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연금술과 사랑, 전쟁과 암살, 농장주의 착취와 파업이 혼란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맞물려 전개된다. 정말 좋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리라. 현실과의 긴장감을 가지면서 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마콘도'를 '연평도'에서 보아내는 것.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환상인지 모를 때, 이 거짓말 같은 현실을 견디기 위해 자기만의 주문을 조용히 외워보는 것이다.
대학 2학년 때 그녀는 신입생이었다. 나는 인문대 계단을 언제나 뛰어내려오던 그녀가 들고 있던 노란 표지의 꽤 두꺼워 보이던 그 책을 굳이 빌려달라고 했다. 단숨에 읽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그녀에게 교통사고 후유증이 있다는 것을, 계단을 내려올 때 다리 저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내게 빌려준 「백년 동안의 고독」이 사실은 예비역 선배의 책이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다.
가방을 못 찾고 결국 차 밖으로 나왔다. 만추의 바람이 불었고 대학 캠퍼스의 미루나무에서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내 차 지붕에 쌓이는 잎들은 마술사의 손끝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종이 꽃잎 같았다. 문득 사라져 버린 것이 너무 많다고 나는 생각했다. 잊었던 나이를 한꺼번에 먹은 기분이었다. 20년 전 「백년 동안의 고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진실을 믿고 싶지 않을 때는 진실의 대가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표지가 바랜 책 속지에 '정말 잃어버린 것은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다.'라고 뒤늦게 쓴다.
▲ 박태건 시인은 199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현재 원광대 글쓰기센터 연구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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