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공적비…신라의 번영과 쇠락 보여줘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임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위계승을 살펴보자면 24대 진흥왕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흥왕의 장자로서 태자에 책봉되었던 동륜(東輪·銅輪)이 왕위를 계승하기도 전에 사망하자 그의 동생 금륜(金輪·舍輪)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이는 전통적인 종법(宗法)에 의하면 맞지 않는다. 동륜의 죽음을 둘러싸고 화랑세기에는 다소 의아한 일화가 전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그냥 웃고 넘어가기에는 의아심이 느껴진다. 동륜 대신 왕위에 오른 금륜이 25대 진지왕이다. 그 역시 음란을 일삼다가 폐위되어 사망하였다. 진지왕은 용춘(龍春·龍樹)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왕위는 제자리를 찾아 태자 동륜의 아들이자 진흥왕의 손자인 백정(白淨)에게 전해졌다. 그가 진평왕이다. 진평은 재위시절 많을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들 없이 두 딸만을 두게 되었다. 덕만과 천명공주이다. 성골의 왕위를 계승을 위하여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데 그가 선덕여왕이고, 천명은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내혼하여 김춘추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29대 태종무열왕이다. 진흥으로부터 태종무열왕에 이르는 역사적 전개가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태종무열왕은 삼국의 역사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비견되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라의 역대 왕 중에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태종무열왕은 그 업적에 비해 전하는 공적비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광개토대왕비의 위상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렇다.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는 신라의 역대 어느 왕보다도 우월하였겠지만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다만 경주 서악리에서 발견된 귀부와 이수를 통해 대략 그 규모를 추정할 뿐이다. 태종무열왕릉비의 일부로 추정되는 비편 하나가 발견되었으나 中禮라는 두 글자만이 판독될 뿐, 그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다. 그나마 발견된 이수 역시 철저하게 파괴된 역사적 상흔을 그대로 안고 있다. 신라의 번영와 쇠락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이수의 전액이 뚜렷하게 보임으로써 비로소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재위시절 위대한 업적을 이룬 왕이라 할지라도 후대의 평가는 냉정할 수밖에 없다. 신라가 독자적으로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나당연합을 통하여 삼국을 통일한 것이 후대에 비평의 대상이 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일례가 아닐까 한다.
비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中禮를 비신의 일부로 가정할 경우 해서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뿐, 대부분의 금석관계서에는 발견된 이수의 전액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大東金石名攷의 ()太宗武烈王陵碑額()조에는 "金仁問篆 辛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東國金石에는 좀더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慶州志를 인용하여 서악리에 있으며, 김인문이 비문을 썼다고 기록하였다. 아울러 전액은 양각되어 있는데 필획의 끝이 모두 말발굽(馬蹄)처럼 되어 있어 용속(冗俗)하다는 서평을 첨부하였다. 두 기록으로만 본다면 전액이든 비문이든 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김인문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