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고흐의 그림 한 점 앞에서 반나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꼭 십년 전,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오르세이 걸작전-인상파와 근대미술'에서였다. 대개들 거장임을 과시하듯 대형액자를 몇 점씩 걸었지만 고흐는 내가 처음 보는, 아주 작은 그림 한 점만을 걸어 놓았다. 그걸 일별하는 순간 휩싸인 전율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의 오리지널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열거하자면, 실로 엄청난 카리스마와 포스와 아우라를 갖고 있었다.
이런 순간이면 나는 '예술에는 정답이 없고, 따라서 1등이 없다'는 내 평소 신념을 수정해야만 한다. 가령 바흐의 '샤콘', 백석의 시'여승',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 같은 작품을 만나면, 예술에도 분명 1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과 시대와 사회를 '관통'해 버린다는 게 정답인 이들 작품의 위대함은 이 작가들의 치열한 삶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고흐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 그래서 고통과 격정과 창조적 열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삶을 내게 알려준 책이 바로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청미래·어빙 스톤 저, 최승자 역)였다. '20세기 전기문학의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 고흐의 인간적 체취와 절실하고 절박했던 예술혼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세 권의 서한집을 바탕으로 고흐의 자취를 추적하여 썼기에 이 '소설'은 거의가 '사실'이라고 저자는 후기에 밝히고 있다.
런던 구필상회 직원 시절의 실연으로부터 시작하여, 벨기에 보리나주 탄광촌에서의 전도사 시절, 신을 잃고 그림을 얻은 고향 네덜란드 에텐에서의 시절, 창녀 크리스틴과 동거한 헤이그 시절, 들판과 농부를 파헤친 누에넨 시절, 인상파 화가들과 조우한 프랑스 파리 시절, 태양을 만나고 귀를 자른 아를의 시절, 정신병원에서의 생 레미 시절,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 오베르 시절의 연대기가 목탄화, 연필화, 수채화, 유화로의 매체 변화와 함께 전개되고 있다. 수없는 실패와 수많은 유랑과 지독한 궁핍 속에서 한 위대한 예술가가 어떻게 탄생되고 완성되는가를 이 책은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는 고흐는, 강렬한 빛과 색채와 대기와 바람에 몰두했던 인상주의 이후로도 본질적으로는 지독한 리얼리스트였다. 그의 대상은 낮고 더러운 땅과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대상의 진실한 영혼을 본 대로 포착하여 골수까지 파헤쳤다. 움직이고 살아있는 것처럼 대상에 강렬한 생명을 불어넣었다. 또한 그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이기도 했다. 탄광촌 전도사 시절, 음식과 돈과 옷을 광부들에게 내주고 탄가루에 얼굴을 문질러 그는 광부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었다. 창녀 크리스틴과의 동거는 신분 차별을 벗어 버린, 발가벗은 두 영혼의 만남이었다. 유럽 제일 큰 화상 가문의 후임자, 유산 상속자였던 그는 고통의 본질에 다다르기 위해 선택한 그림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고, 마침내 힘찬 자기표현의 절정에 올라 후세에 '위안'을 주는 그 불멸의 예술 앞에서 순교한 것이다.
오래도록 예술을 동경해 온 내게 고흐는 늘 내 삶의 멘토가 되어 주었다. 내가 고독을 무기로 자기와의 고투를 고집하는 장인적 결벽성의 예술가를 흠모한다면 그건 그의 예술혼에 빚진 덕분이겠다. 내가 예술이 권력이 되거나 예술가가 공해가 되는 세상, 심지어 학력을 위조한 자가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고 예술교육의 전방에 서는 세상에 분노하고 절망하고 있다면 이것 역시 그의 탓이라 하겠다. 혹 예술가가 아닌 당신도, 천민 자본주의가 판치는 이런 시대일수록 외롭고 높고 쓸쓸한 예술가가 더욱 소중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당신이라면, 당신은 이미 이 책을 읽었거나 머지않아 그 첫 장을 넘기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에 밑줄을 긋게 될 것이다.
내 그림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다고 해서 내 자신이 천하게 됩니까? 내가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들의 집안에 들어가거나 그런 사람들을 내 작업실 안으로 끌어들인다고 해서 내 자신이 천해질까요?
▲ 김혜원 시인은 전주에서 태어나 전북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우석대 경영행정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재학중이다. 201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우석고 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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