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적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한 시인
야인 김창술(野人 金昌述·1902~1953)은 전주 출신의 시인이다. 일제 시대에 그는 유엽, 김해강 등과 전주시회를 조직하는 등 고향의 문학 발전에 공을 쏟았다. 해방 후에 그는 이병기, 김해강, 신석정, 채만식 등과 전북 문단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차에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수복되자 그는 향리를 떠나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1953년 11월 3일 그는 잠깐 외출하겠다고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유족들은 이 날을 기일로 삼고, 가묘를 써서 그를 기리며 봉제사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의 행적은 자세히 알 턱이 없는 연구자들은 한국근대시사를 그릇 서술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먼저 그는 무학의 노동자 시인이 아니다. 그는 전주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전주의 남부시장에서 순창상회라는 포목상을 하며 넉넉하게 살았다. 두 번째, 그는 시집 「열과 광」을 낸 적이 없다. 이 시집은 당시 조선일보에 출판 불허 사실이 나와 있고, 김창술은 문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시집을 내지 못하는 울분을 토한 바 있다. 셋째, 김창술은 1928년 동향의 시우 김해강과 함께 「기관차」라는 시집을 펴내려다가 그마저 불허되었다. 그는 생전에 변변한 시집조차 발간하지 못한 것이다.
김창술은 사상적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한 시인이었다. 그가 1927년 발표한 시 '전개'에는 '전북청년동맹위원회에게 보내노라'는 관련 정보가 부기되어 있다. 또 그 무렵에 발표한 시 '군산 해안에서'는 식민지시대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던 신간회의 군산 지부 활동을 암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밖의 시작품들도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강렬한 서사를 담고 있어서 문학사가들은 그를 카프 시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마저 부정확하다. 그는 해방 전에 전주를 떠난 적이 없고, 카프가 전주 사건으로 해산되기 전에 시작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의 전기적 생이 불확실한 탓에 이러저러한 문학사적 과오가 생겨난 것이다. 그 증거는 해방공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1946년 2월 그는 조선문학자대회의 참가를 요청받았다. 하지만 신석정의 출석과 달리 회의록과 출석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도리어 그는 1930년대 초반에 시작을 중단한 이후 작품 생산에 나서지 않았다.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에 그는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포목을 거래하느라 분주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그가 전쟁 중에 북한군에 끌려가 처형 직전에 탈출했다는 증언과 함께 해방기의 소란한 정국에서 시작보다는 은일을 택한 그의 행적을 유추하는데 도움을 준다.
김창술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말한다면, 반외세 민족 해방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1920년대 초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이 범주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비록 습작기의 작품에서는 개인적 서정을 노래한 작품들이 더러 눈에 띈다. 그러나 그가 강고한 시대 현실과 열악한 식민지적 조건을 직시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구체적 현실을 매개항으로 설정하여 당대의 상황을 응시하여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들에게 시급한 생의 조건은 '절대 평등'의 구현이라고 보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윤리적 명제를 정치적 명제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처럼 김창술의 시적 욕망은 철저히 식민지 현실에 기초하여 발아되었다. 그는 일제의 교활한 분열정책에 의해서 민족 구성원 내부의 균열이 발생하고, 식민 당국의 비호를 받는 부르주아지들이 발호하자 그의 시는 집단적 화자를 내세워 당대의 궁핍한 현실을 고발하는데 집중되었다. 이 무렵 전북 도내에서는 옥구 이엽사농장 쟁의 사건(1927. 11), 도내 최대 지주 백인기 댁 습격 사건(1928. 12) 등을 거치며 소작쟁의가 격화되고 있었다. 또 삼례에서는 정미소와 운송점 사이의 임금 문제(1930. 7) 등이 발생하여 노동권의 보장은커녕, 농산물을 수탈당하며 생존을 위협받는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김창술은 시 '앗을대로 앗으라'에서는 농민들의 울분에 찬 분노를 대신하고, '지형을 뜨는 무리'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만치 그는 현실에서 단련된 경험을 토대로 일상적 체험을 시적으로 수용할 만큼 각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그 "문명! 발달이 빠름을 더할 때 일거리를 잃은 자가 버쩍 느나니"('진전')라고 예언할 정도로, 그는 시대의 흐름을 진단하고 예견할만한 예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김창술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시작을 중단하고 말았다. 살아서 시집 한 권조차 펴내지 못한 그의 시편들은 식민지시대의 시사를 조감하는 연구자들이 필수적으로 검토할 만큼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만약 그가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전라북도의 시단은 더욱 다채롭고 풍요로웠을 터이다. 무릇 서정시를 사소한 개인적 감수성의 표현과 동일시하는 무리들을 대할 적마다, 그의 현실지향적 시편들이 시의 다양성을 웅변하기에 충분하여 삼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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