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삶이란 죽음의 또다른 얼굴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에서 들려온 지진 소식은 우리에게 살아 있음과 그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지진 이후 밀려온 쓰나미,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아내를 차 밖으로 밀어 살리고 사라진 남편이나 손자의 사진첩을 찾기 위해 죽음의 길을 떠났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족이, 또 아련한 추억이 우리 삶과 어느 지점 쯤에서 대체될 수 있는가를 반문하게 만든다.
지진과 쓰나미로 엉망이 되어버린 도시, 도처에 깔린 죽음의 상흔 한켠에서 떠올리게 되는 시가 바로 문태준의 「가재미」이다. 시인은 어느 날 들렀던 큰어머니의 병문안 길에서 "죽음만을 보고" 있는 모습을 통해 그이가 살아 왔던 치열한 삶을 떠올린다. 그리고 병실에 누워 있는 모습 너머에서 지난했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현실을 목도한다. '가재미'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우리에게 삶이란 죽음의 또다른 얼굴로 다가오기도 한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중략)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은 우리 주변에 늘 함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삶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느 순간에 죽음이 삶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나 어떤 특별한 계기들을 통해서, 다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서 후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얼마 전에 나온 시인의 산문집에는 그의 시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이 보인다. 산문집 제목도 「느림보 마음」이다. 각종 미디어와 인터넷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느림의 미학'이라니.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이는 시인의 심성과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알아차렸을 법도 하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맨발」은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 주변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일본 대지진의 희생자들도, 지금 이 순간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도 결국에는 맨발에서 와서 맨발로 간다. 이처럼 삶과 죽음, 열림과 닫힘을 아우를 수 있는 시선이야말로 이 시인의 가장 큰 미덕이다. 오늘날 우리는 취직에 힘들어하는 88만원 세대, 장 보기가 살벌한 물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부동산 시장 등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공허한 메아리보다 주변에 따뜻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시보다 더 큰 울림과 감동을 준다. 오늘만큼은 우울했던 세상사를 잠시 잊고 문태준의 「맨발」과 함께 멋진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겨우내 기다리던 봄이 성큼, 오고 있다.
▲ 장창영 시인은 전주 출생으로 200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으로 등단했다. 전북대 국어국문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전북대 국문과 겸임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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