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현실을 떠나서 존립할 수 없다"
신석정(辛夕汀·1907~1974)은 부안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본명은 석정(錫正)이다. 그는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한학을 수학하다가 1930년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경을 공부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불교의 사회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던 완주 출신의 유명한 박한영(石顚 朴漢永)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그는 유불선에 통달한 학승으로, 신석정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신심의 발원을 빌어주었다. 그의 작품에 배어 있는 유교적 영향이나 불교 사상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그곳에서 신석정은 선암사에서 올라온 시인 조종현과 동문수학하면서 죽이 잘 맞았던 듯하다. 둘은 동광사로 주요한을 찾아가거나, 불교사에 가서 한용운을 예배하거나, 동아일보사에 들러 이광수를 만나 문학과 세상에 관한 고견을 들었다. 이러한 만남이 인연이 되어 신석정은 훗날 김억 정지용 박용철 등과 교유하게 되었다.
고향에 내려온 신석정은 상경 중의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응시하는 안목이 넓어졌다. 그의 시가 1930년대에 접어들어 한층 원숙해진 것이 그 증례이다. 당대의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그는 시문학파의 일원으로 가담하며 문단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특히 김기림은 그의 시적 특성에 주목한 최초의 비평가였다. 신석정을 가리켜 목가시인이라고 부른 것이나 그것의 당대적 의미가 남다른 줄 안 이도 그였다. 그의 신석정에 대한 애정은 계속되어 첫 시집 「촛불」이 발간되자 독후감에서 '촛불'이 '횃불'인 이유를 설득력있게 해석해 주었다. 최근 들어 신석정을 목가시인의 반열에서 떼어 놓으려는 노력이 일고 있다. 그러나 목가시인이라는 별칭이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게 아니고, 더구나 김기림의 평가처럼 '건강하고 원시적인 말하자면 어린이의 세계'야말로 식민지 이전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목가시인이야말로 외세에 강점되기 이전의 세계를 지향하는 용어인 셈이다.
신석정의 시세계가 변모하게 된 계기는 러시아 작가 이반 뜨르게네프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이 식민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뚜르게네프의 소설을 통해 알았다. 그가 시에 '그 전날 밤'의 주인공 인사로프와 '아버지와 아들'의 바자로프를 등장시켜 자신의 생각들을 주제화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두 인물은 러시아의 봉건 질서에 맞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려는 '잉여인간'이다. 신석정은 역사적으로 전제 군주 밑에서 신음하던 러시아 민중들의 편에 서서 인텔리겐챠로서의 책무를 다하려고 노력한 주인공들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지식인된 자의 몸가짐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자, 그의 눈에 식민지의 '슬픈 전설'과 '슬픈 구도'가 포착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신석정은 시가 현실을 떠나서 존립할 수 없다는 사실은 뚜렷하게 깨달았다. 이 점만 보더라도 그의 시에 배어 있는 뚜르게네프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시적 특성으로 검출되는 노장사상을 위시한 동양적 사유방식은 노년기의 시를 구획하는 자질로 보아야 맞다. 무릇 한 시인의 사상이란 세월을 더하면서 깊어지기 마련이라면, 청년 시절의 방황이 끝난 무렵에 전래하는 정신사적 전통에 귀의하여야 자연스럽다. 이런 측면에서 김기림이 예언한 '어린이의 세계'는 예리한 비평가적 안목의 소산이었다. 신석정은 궁핍한 식민지시대에 찾아갔던 목가적 세계로부터 동양적인 세계에 안착하여 시작을 마감한 셈이다. 두 세계는 원시적 질서가 훼손되기 이전의 자연과 다르지 않을 터이고, 자연에 살기 적합한 사람은 어린이처럼 순결한 영혼의 소지자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를 두고 목가시인이라고 칭하기를 거부하는 축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신석정은 1920년대 초반부터 작품을 발표한 이래, 전북을 떠나지 않고 시작에 전념하였다. 해방 후에 그는 이병기, 김해강 등과 전라북도 문단의 초석을 다지는 일에 앞장섰다. 한국전쟁 후에는 호남의 대표적인 시인들끼리 모여 만든 '시와 산문'의 공동회장으로 전남의 박정온과 활동하였다. 이 회는 전남의 김현승, 이동주 등과 전북의 이병기, 김해강, 신석정, 서정주, 백양촌 등이 전후의 황폐한 시심을 추스르려고 조직한 동인회였다. 그 뒤에 신석정은 여러 중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전북대학교에 나가 시론을 강의하였다. 그가 ?자유문학?의 선고위원으로 있는 동안에 등단시킨 시인들은 나중에 전북 문단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여 문향의 지위를 고양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는 생전에 「촛불」, 「슬픈 목가」, 「빙하」, 「대바람소리」, 「산의 서곡」 등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그는 고향의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전라북도문화상, 전주시문화장, 한국문학상 등을 받았다. 그는 지금도 덕진공원에 시비로 남아 내방하는 시민들에게 생전의 시를 들려주고 있다. 그를 사숙한 시인들이 전북시의 서정성을 잇고 있고, 근래에 신석정의 시정신을 기리고자 향리에 문학관을 건립하고 있으니, 그가 남긴 시향이 내외에 그윽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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