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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2)평생을 단독자로 살아간 자유인, 이철균

세상과의 불화 속, 수준 높은 詩 세계 보여줘

(좌)후배문인들이 힘을 모아 전주 덕진공원에 설립한 故 이철균 시인의 시비, 故 이철균 시인. (desk@jjan.kr)

이철균(有人 李轍均·1927~1987)은 전주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그는 1944년 5년제 전주북중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4월 목포의 문태중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하였다. 3년 후 전주로 되돌아오기 전까지 목포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1949년 6월 고향에 온 그는 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중·고등학교의 분리 조치로 전주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이후 1958년 교사직을 그만 둘 때까지 그는 모교에서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일상을 영위하였다. 학교에서 나온 그는 잡지 '인물계'의 편집을 맡았다고 하나, 정확한 시기는 알 도리가 없다. 1953년 2월 이철균은 서정주와의 인연으로 '문예'에 시'염원'이 초회 추천되고, 6월 '한낮에'가 2회 추천되었다. 이듬해 3월 시'소리'로 천료한 뒤 그는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 무렵을 전후하여 이철균은 지역의 문단 활동에도 가담하였다. 1951년 10월에는 김효선 김범삼 등과 동인지 '남풍'을 주재하였고, 다음해 4월 전주의 카멜다방에서 열린 시화전에 시를 출품하였다. 또 1953년 출범한 전주문학회의 이사를 맡았다. 이러한 활동은 그의 성향에 맞지 않은 것이다. 그는 워낙 붙임성이 없고 홀로 사는 체질이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였다. 낯을 가리는 그의 유별난 성격은 평생 고독한 독신 생활로 견인한 제일가는 요인이었다. 그는 밤늦게 귀가하여 오전 내내 잠을 자다가 한낮에 일어나 간단한 세수를 마치면 다시 집을 나섰다. 그는 1950년대에 전주의 물왕물에서 함께 살던 이복누이를 찾지 않았고,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가더라도 친형댁조차 방문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절대고독의 세계에 유폐시키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주관에 따라 살았다. 부친의 생존시에는 서학동 토반으로 불릴 만큼 유족한 편이었으나, 그의 일생은 지독한 가난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괴벽에 가까운 성미 탓에 이철균의 주변에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소유 정신에 입각하여 쪼들리는 경제 사정을 불평하지 않았고, 잘 사는 자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누구에게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던 그였기에, 마음 맞는 친구를 두기가 쉽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사귀려다가도 일방적 지출을 떠올리며 꺼려하였지만, 그의 진솔함 마음가짐을 아는 친구들은 도리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말년에 이르러 궁벽한 처지에 내몰리자 지인들조차 그를 멀리할 당시, 서울에서 살던 시인 하희주는 눈물나는 우정을 보이며 외로운 영혼을 안아주었다. 그는 오갈 데 없는 이철균을 불러들여 자신이 소유한 건물에서 살도록 주선하였고, 한강에서 주검까지 거두며 몌별하였다.

 

이철균은 불행한 시인이었다. 그 원인이 자신의 탓이든 타인들의 잘못이든 간에, 그는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울분을 연마하여 수준 높은 시세계를 일구어냈다. 그는 철저한 자유인으로 살아간 단독자답게 이승의 세파를 초월한 시적 성취를 이루었다. 그는 등단작 '염원'에서 말한 바처럼 '물오리들이 곱게 물살을 갈라도 / 무늬 하나 남기지 않는' 파란 강물처럼 살았다. 그의 시는 전통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동양적 질서를 추구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의 시는 '항시 새로이 불어오는 바람'을 안에 품고 있어서 읽을 적마다 진애에 찌든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철균운 아호 '유인'처럼, 어느 곳에서나 있어야 할 사람이었고, 그가 있어야 할 자리면 꼭 있었던 시인이었다. 그는 출판할 목적으로 준비한 시집의 '자서'에서 "죽은 뒤에나 선을 뵈야 마땅하다고 늘 고집하던 것을 고쳐 생각하고, 지천명의 나이테가 지나니 한때의 매듭을 지어보자는 것이요, 또한 발표 후 손을 댄 것도 있고 해서 사회적 책임에 기인한 것이다"고 언급하였다. 과연 그의 바람처럼 시집은 사후에 간행되었다.

 

애초에 그의 시집 '신즉물시초'는 섣달을 맞아 한국문화사에서 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시집은 시인의 생애만큼이나 애처로운 운명을 지녔다. 정가까지 매겨진 이 시집은 1987년 시인이 지병으로 영면할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시인이 시집을 간행하겠다고 받은 출판지원금을 갖고 다니며 써버렸던 탓이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시집의 지형을 갖고 있었던 어느 시인이 동업자 정신을 발휘해서 출판을 주선하여 마무리했더라면, 시집은 한번도 제대로 웃어보지 못했던 이철균의 생에 기쁨을 선사했을 터이다. 특히 그의 자필 원고로 된 시집의 원본을 넘겨받은 시인이 지금이라도 그것을 공개해주기를 바란다.

 

이 기구한 운명의 시집은 전북문인협회에서 그가 세상은 뜬 지 5년 후에 발간되었다. 다행히 협회에서 1992년의 사업으로 작고 문인 유고시집 출판을 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살아생전에 변변한 시집 한 권조차 갖지 못한 그였지만, 타계한 뒤에라도 명계에서 환히 웃었으리라. 그 뒤에도 전주의 후배 문인들은 힘을 모아 전주 덕진공원에 시비를 세워 그의 시업을 기리었다. 그는 가고 없으나, 오늘도 그의 시는 남아 오가는 이들을 숙연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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