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고 참신한 필획…생경한분위기 느끼게 하는 명작
万樹琪花千圃葯, 一莊修竹半牀書 -書應彛齋相國方家正之. 果山 金正喜
만 그루 기이한 꽃나무에 천 이랑의 약초 밭.
한 별장 가득 두른 잘 가꾼 대나무에 책상의 반을 채운 책.
-이재 상국 전문가께서 바로 잡아 주실 것에 부응하여 쓰다. 과산 김정희
万:일만 만(=萬)/ 樹:나무 수/ 琪:아름다운 옥(玉) 기/ 圃:밭 포/ 葯:약 약(=藥)/ 莊:별장 장/ 修:닦을 수(=脩: 마른 육포 수)/ 牀:책상 상/ 應:응할 응/ 彛:떳떳할 이/ 齋:집 재/ 相:도울 상, 서로 상
이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만년에 그의 절친한 친구로서 당시 재상의 자리에 있던 권돈인(權敦仁)에게 써 준 것이다. 이것이 추사의 만년 작품이라는 점은 "이재상국 전문가께서 바로잡아 주실 것에 부응하여 쓰다. 과산 김정희(書應彛齋相國方家正之. 果山 金正喜)"라는 관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과산(果山)'은 추사가 1849년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 1851년 7월까지 경기도 과천에 거할 때와 1851년 7월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다시 과천에 거하게 되는 1852년 이후 즉 추사 생애의 가장 만년에 사용한 별호이다. 이때에 사용한 별호는 '과산'말고도 '노과(老果)', '과(果)',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과로(果老)' 등 '果'자가 많이 보인다.
관지에 나오는 '이재상국(彛齋相國)'의 '이재(彛齋)'는 권돈인의 호이다. '상국(相國)'은 '나라(임금)를 가장 가까이서 돕는(相:도울 상) 인물'이라는 뜻으로 주로 영의정 혹은 좌의정이나 우의정에 대해 사용하던 호칭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추사가 과천에 거주하였고 권돈인이 '상국(相國)'의 자리에 있었다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시기에 쓴 작품이다. 그때는 바로 1849년이나 1850년 혹은 1851년 즉 추사 나이 64세-66세 때이다. 만년의 원숙하면서도 여전히 진지하고 참신한 필획과 노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경(生硬)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장법이 돋보이는 또 하나의 명작이다. 관지에 나오는 "方家正之"라는 말은 "방가께서 바로잡아 주심"이라는 뜻이다. '方家'란 '그 방면의 대가(大家), 전문가'라는 뜻이고 '正之'의 '正'은 '바로 잡는다'는 뜻인데 '之'를 붙인 까닭은 '正'을 분명하게 동사화(動詞化)하기 위해서이다.
만년의 추사는 그의 아버지 김노경이 젊은 시절에 마련해 두었던 과천의 별장을 거처로 삼았는데 그곳은 참외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초당 이름을 '외 과(瓜)'자를 사용하여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고 하였다. 권돈인은 과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 광주의 퇴촌(退村)에 은거하였다. 그런데 퇴촌에도 참외가 많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친구인 추사가 사용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좋았기 때문일까? 권돈인도 만년에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이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추사와 이재는 별호를 함께 사용할 정도로 너와 나의 구분이 없이 친했다. 이렇게 친한 친구인 권돈인을 위해 추사는 이 작품 "万樹琪花千圃葯, 一莊修竹半牀書"를 쓴 것이다. 친구의 별장에 만 그루 기이한 꽃나무가 있고, 늘그막의 건강을 도울 각종 약초가 심어진 천 이랑의 약초밭이 있으며, 집안을 빙 둘러친 잘 가꾸어진 대나무 숲이 있고, 그런 별장 안의 서재에는 정갈하게 놓인 책상 위에 책상의 반을 덮을 만큼 책이 쌓여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써 준 것이다. 따뜻하면서도 맑은 우정이 뚝뚝 떨어지는 작품이다. 그런 우정을 표현한 작품임에도 관지는 "이재 상국 전문가께서 바로잡아 주시라(彛齋相國方家正之)"고 썼다. 극도로 겸손한 표현이다. 진정한 우정은 이처럼 끝까지 상호 존경하고 겸손한 데에서 피어나는 것일까? 이 작품을 보며 나의 별장에도 저렇게 万樹琪花와 千圃葯과 一莊修竹과 半牀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옛 사람들이 나눈 우정의 깊이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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