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감수성으로 세상의 아픔 포옹
유기수(劉基洙·1924~2007)는 전주 출신의 소설가이다. 그는 전주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나, 본향은 정읍 태인이다. 그는 태인보통학교를 마치고, 1941년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의 전신이었던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던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태평양전쟁의 말기에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 군의관으로 차출된 것이다.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1950년까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산부인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졌다. 그는 인민군으로 징발되어 낙동강전선에서 사선을 넘었다. 그런 탓에 그는 유엔군이 참전하고 서울이 수복된 후에 수인으로 지냈다. 수형기간이 끝나자 다시 소집되어 국군 군의관이 되라는 명령을 받고 중부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과정을 소재로 쓴 소설이 '인간교량'이다.
말하자면 그는 전쟁 중에 태어나 전쟁에 휩쓸려가고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전후에는 국가의 재건을 담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불행한 세대에 속한다. 이와 같은 시기에 청춘을 연소시켜야 했던 그는 전주에 낙향하여 개업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을 딴 '유기수 산부인과의원'은 소문을 타고 금세 유명해졌다. 그러던 중에도 문학을 향한 그의 열정은 사위지 않았다. 문학은 그에게 지난날의 청춘을 보상받을 수 있고, 청년기의 가슴 아픈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최선의 안식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읽었던 문학작품에서 감동을 받았다면, 이제 그는 스스로 작품을 써서 전쟁으로 인한 내상을 지우는 것이었다.
유기수는 초기에 '柳林一'이란 필명을 사용했으며, 시에도 관심을 기울여 시집 '공백의 장'을 펴내기도 하였다. 1954년 8월 이병기를 위시한 일군의 작가들이 전 해에 출범한 전주문학회 대신에 '詩園'을 발간하고자 꾸린 모임에도 그는 참가했으며, 당시 도내에서 발간되던 신문에도 필명으로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한국예총 전북지부가 출범할 당시에 이사로 선출되어 김해강을 도왔고, 표현문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 후에도 그는 도내 문단의 여러 활동에 직접 참가하거나, 업무로 바쁘면 작품을 찬조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특히 그는 민족통일문학회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1998년 북한 동포 돕기 책 한 권 사보기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의 움직임은 평생을 '통일 지향 문학'에 매진했던 문학적 신념의 실천이었다.
마침내 196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호로 박사'가 당선되면서 그는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필화 사건을 일으켰던 문제작이다. 장편으로 개작되어 이 작품이 1977년 6월 1일부터 7월 5일까지 '전북신문'에 연재되었을 당시 전라북도의사회에서는 성명을 발표해 소위 의권을 침해한 작가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문학작품은 허구의 산물이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에도 특정 집단의 행동이 더러 문제시되곤 한다.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이 사실에 동의하며 읽는다. '문학이 허구'라는 사실조차 부인한 동료들에 의해 유기수는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받는다.
유기수는 분단 문제의 극복에 소설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역사의 뒤편에서 신음하던 군상들의 애꿎은 삶을 다루고 있다. 예컨대 '지리산 사람들', '북에서 온 기러기', '벽소령 가는 길', '두만강 7백리', '지리산에 핀 꽃은 시들지 않는다' 등을 보아도, 그가 소설적 관심을 기울인 바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특히 지리산의 비극을 자주 형상화하였다. 그 이유는 '지리산의 화해 없이는 남북의 화해도 민족과 조국의 통일도 없다'는 작가의 소신에 있었다. 자신이 굴곡진 삶을 살았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야기한 역사의 뒤편을 주목했었으리라. 세상을 향해서 자유민주주의자로 자처했던 그는 지리산의 저편에서 자신과 동질의 정서를 소설화한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와 허교하며 우정을 나눴다. 두 사람은 허물없는 사이로, 상호 왕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리켜 문단에서는 '영남에 이병주, 호남에 유기수'라 칭했거니와, 작가의 길에서 만난 양인의 우정은 만인의 표본이었다.
유기수는 개업의로서 유복한 생을 살았다. 대한의학협회 부회장, 대한산부인과학회 부회장 등의 직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의료계에서도 존경받는 의사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사소한 의학 논문을 발표한의사, 의학박사보다는 책을 펴낸 작가로서 기억될 것"을 바랐다. 그만큼 문학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기수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문학을 표방하며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서 멍들고 다친 영혼을 따뜻이 감싸 안으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작품집 '사랑의 조건'에서 "사랑은 인간 존재의 아름답게 승화된 상태이자 삶의 고귀한 것"이라고 판에 박힌 말을 촌스럽게 적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여린 감수성으로 세상의 온갖 아픔을 포용하려고 글을 쓴 의사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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