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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사천왕상 조성연대와 실체 판명 의미

불교에서 사천왕(四天王)은 불국토라는 세계의네 방향인 동·서·남·북을 분담해 지키는 네 호법신이다.

 

현재 한국, 중국, 일본 불교 사찰을 보면 그 구역 전체는 불국토에 비유되며,그 한복판에 부처가 자리하는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이 있다.

 

불교의 이상적인 관념에 따르면 사천왕은 사찰 구역 네 방향에 각각 자리해야하지만 실제는 그러지 못해 거의 예외 없이 입구를 지나서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는다.

 

 사천왕을 봉안한 건물이 천왕각(天王閣)이다.

 

 이 천왕각 안 양쪽편에 불국토 사방을 관장하는 네 천왕이 적절한 방위를 차지한 채 서 있다.

 

이들 사천왕은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인상이 험악하기 짝이 없으며,  발아래에는 악귀를 짓누르는 자세를 한다.

 

 하지만 사천왕별로 차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 차별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대목이 지물(持物)이라고 해서 그들이 휴대하는 물건이 각기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요즘 한국 사찰 천왕문의 사천왕상 앞에는 대체로 이름이 걸려 있다.

 

 사찰 참배객들이 헷갈려 할까봐서다.

 

 이들 명패를 보면 비파를 타는 천왕을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칼을 든 천왕은 남방증장천왕(東方增長天王), 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을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탑을 든 천왕을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이라고한다.

 

이런 도식이 자리 잡은 데는 통일신라 때 만든 석굴암 사천왕상이 결정적이었다.하지만 이런 도식이 잘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학계에서 끊이지 않았다.

 

 특히 조선시대 사천왕상에는 이런 공식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

 

 그럼에도 이런 궁금증을속 시원하게 해결할 뾰족한 도리도 없었다.

 

 현재 남은 사천왕상 중 대부분은 극심한복장(腹藏) 도굴로 그것을 만든 내력이라든가 개별 실체를 엿볼 만한 자료가 극히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 김천 직지사 소조 사천왕상에 대한 해체 수리는 이런 궁금증을 일거에  해결했다.

 

 복장 등을 조사한 결과 이들 소조상도 도굴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첫째, 종래에는 전연 알 수 없던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을 밝혀냈으며 둘째, 개별 사천왕이각각 어느 방위를 담당했는지를 밝혀주는 자료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선 '서방천왕'(西方天王)이라는 묵글씨가 발견된 천왕상 내부에서 강희(康熙)4년(1665)에 작성한 '중창봉안기'(重創奉安記)가 나오면서 만든 시기가 밝혀졌다.

 

이 문서는 서방천왕상을 만들면서 그 내력을 적은 사천왕상 조성기(造成記)다.

 

 더구나 만든 사람들은 '전라도 전주부 동쪽 종남산 송광사의 승려 화원'(全羅道全州府東終南山松廣寺居僧人畵員)들과 '전라도 전주 송광사 화원'(全羅全州松廣寺畵員)들로드러났다.

 

물론 사천왕상 중에서도 서방천왕상만을 이 무렵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같이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사천왕상 조성 시기 확정은 불교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다른 무엇보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제작 연대가 정확히 드러난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중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제1254호 장흥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 제1255호 장흥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 제1467호 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등 3점이 있다.

 

이 중에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걸린 목판의 '보림사 천왕금강 중신  공덕기'(寶林寺天王金剛重新功德記)와 '보림사 중창 불사기록'(寶林寺重創佛事記錄)을보면 조선 중종 10년(1515)에 만들었다가 1666년과 1777년에 각각 중수됐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사천왕상을 "지금까지 조사된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조성년대가 가장 빠르다"고 해서 보물로 지정됐다.

 

 하지만 두 차례  고친 일이 기존 사천왕상을 철거하고 새로 만든 사건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다.

 

완주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은 서방천왕 왼쪽 머리끝 뒷면에 있는 기록을 통해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됐다고 하며, 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은 인조 6년(1628)에 다시 만들었다(重造)는 묵글씨가 있을 뿐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흔적이없다.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천왕상 대부분이 극심한 도굴로그 내력을 기록한 조성기가 대부분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번 직지사 사천왕상 조성기 출현은 그것을 만든 연대는 물론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정확히 알려준다.

 

나아가 직지사 사천왕상은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천왕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풀어준다.

 

이번에 이를 조사한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조선후기 사천왕상의 방위 문제를  실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이들 사천왕상은 나무 뼈대에 흙을 붙여 제작한 소조상(塑造像)이다.

 

 한데 그내부 등을 살피는 과정에서 천왕상 머리 내부에서 '北方天王'(북방천왕)이라든가  '西方天王'(서방천왕)이라고 적힌 종이를 확인했는가 하면, 다른 사천왕상 몸체 내부에서는 '東'(동)과 '東南'(동남)이라는 묵글씨를 발견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말이 적힌 소조 작품이 해당 방위의 사천왕임을 지칭한다.

 

이런 통해 이들 사천왕상이 제작된 17세기 무렵 불교계가 생각한 사천왕의 구체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종래 사천왕상은 그들의 지물로 구별했다.

 

 비파를 타면 동방천왕, 칼을  들었으면 남방천왕, 용과 여의주가 있으면 서방천왕, 탑을 들었으면 북방천왕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직지사 사천왕상에서는 지물과 묵서를 결합해 정리한 결과 비파를 타는천왕은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칼을 쥔 천왕은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은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탑을 든 천왕은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임을 밝혀냈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석굴암에서 보는  사천왕상하고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불교미술사 전공인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는 "이번 직지사 사천왕상을보면 북방천왕이니 서방천왕이라고 해서 각 방위에 해당하는 천왕만 밝혔을 뿐 그들이 곧 다문천왕인지, 지국천왕인지, 증장천왕인지, 혹은 광목천왕인지는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고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강 교수 "이번 직지사 사천왕상 조사를 통해 17세기 불교계가 생각한 사천왕의 개별 실체가 드러난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불교미술계의 획기적인 성과"라고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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