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 是非와 成敗는 무관 / 견훤 평가, 결과론적 해석은 잘못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어엿한 건국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국호와 연호를 사용했고 통치이념과 정치체제를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이상 국가를 꿈꾸었던 일국의 국왕이었다.
그러나 왕호나 시호도 전해지지 못한 채 견훤으로 불리고 있다. 더구나 폭군이나 무능한 인물로 폄하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일찍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으로부터 이어져오고 있다. 그는 후백제를 독립 왕조로 인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후백제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다만 견훤 열전에서 간략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그것도 독립 열전을 마련하지 않고 궁예왕과 한데 묶어 반역 열전에 실었다. 이와 같은 김부식의 인식은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의 역사가들에게도 이어지며, 현재의 전문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는 실정이다.
최근 들어 후백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며 이러한 현상은 역사 인식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분명 새롭고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제는 그동안 역사 무대의 뒤편에 물러서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후백제의 역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아울러 견훤왕에 대해서도 기존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견훤왕은 신라 말 경상북도 상주 가은현에서 아자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본래 가은현의 농민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사벌성(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의 장군으로 성장했다. 견훤은 20여세 때에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들어가 군인이 됐고, 그 후 서남해안을 수비하던 해군으로 파견되고 해군 장교로 출세했다. 서기 892년(진성여왕 6년)에 광주를 점령해 드디어 왕이라 칭하고 후백제를 건국했다. 그 후 900년에는 광주에서 전주로 천도하고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함과 동시에 영토를 내륙으로 확장해 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후백제 왕실의 내분으로 말미암아 약 반세기 동안 존속했던 후백제는 멸망했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즈음 후백제는 이미 전주로 천도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중국과의 외교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정권을 수립했다. 아울러 군사적으로도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양국의 전투는 최후의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후백제가 연전연승하는 형세였다. 그러나 결국 왕건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고 그에 의해 통일이 이뤄졌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왕건과 견훤을 승자와 패자로 만들었는가? 종래의 평가는 전적으로 견훤 개인의 잘못으로 초래된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해석은 중대한 결함이 있다. 견훤의 성격이나 능력 등 개인적인 요인보다는 오히려 양국의 지배층을 구성한 정치집단의 성격, 국가의 운영체제, 대외관계, 피지배층에 대한 정책, 경제적·군사적 여건 등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보다 실증적이고 다양하게 탐구 비교해야 한다. 역사상 승자와 패자의 행위가 곧 옳고 그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율곡 선생이 명쾌하게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역사적 사건의 시비(是非)와 성패(成敗)는 무관한 것이며, 오히려 성패는 행(幸)·불행(不幸)과 관련된 것이지 시비(是非)와 연결시켜서는 안되고, 성공한 자를 무조건 옳다고 해서도 안된다고 했다. 오늘날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율곡 선생의 이와 같은 엄정한 사관을 새삼 본보기로 삼아, 그동안 견훤에 대한 평가가 기왕의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선입관에 따른 결과론적인 해석이 아니었는지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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