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저수지 제방 축조방식 확인 / 볍씨·복숭아씨·물풀 마름 발견 과거 담수지 추정 /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토목기술 발전 양상 근거
김제 벽골제에서 진흙 주머니(초낭)가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면서 김제 벽골제가 대규모 노동력이 동원된 국내 최대의 인공 저수지라는 상징성과 우수한 토목 기술을 인정받게 됐다.
전북문화재연구원(이하 연구원)은 지난 2012년부터 최근까지 4차례에 걸쳐 김제 벽골제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였다. 연구원은 발굴 조사를 통해 제방 중간에 있는 수문 ‘중심거’, 제방의 축조 방식 등을 파악하는 성과를 거뒀다.
최근에 시행한 발굴 조사는 지난 1925년 일제에 의한 농수로 개설 과정에서 물길을 돌리기 위해 훼손된 제방의 상부 지점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애초 직선 형태였던 제방이 이후 곡선 형태로 변경됐기 때문에 하부 구조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제 용골마을에서 발굴 조사를 진행한 것이다.
연구원은 이 과정에서 제방의 동쪽 부분에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보축 제방(補築 堤防)을 확인했다. 특히 이 보축 제방 하단에서는 제방의 축조 방식을 알 수 있는 초낭이 발견됐다.
제방의 보강을 위해 진흙을 담아 쌓은 이 초낭은 나뭇가지나 잎사귀 등을 깔고 흙을 쌓는 부엽 공법(敷葉工法)의 일종이다. 보축 제방 하단에는 초낭이 남서·북동 방향으로 열을 맞춰 배치돼 있어 연약한 지반을 견고하게 다지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초낭에서는 흙과 함께 볍씨, 복숭아씨 등이 출토됐고, 그 하층에서는 담수 지표종인 한해살이 물풀 마름이 발견돼 벽골제가 과거 담수지였다는 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실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초낭은 7세기를 전후한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에 전주 등 7개 주(州)에서 동원된 사람들을 이용해 제방을 증·수축했다는 <삼국사기> 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결과다. 삼국사기>
당시 통일신라는 9주 5소경(九州五小京) 체제로 이 가운데 전주 등 7개 주에서 벽골제 제방 증·수축을 위해 대규모 인력을 동원했다는 것. 상당한 노동력이 투입돼 건설된 국내 최대 규모의 저수지라는 상징성이 다시 확인되는 대목이다.
또 초낭은 원제방이 아닌 보축 제방에서만 확인되고 있어 토목 기술의 발전 양상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벽골제 원제방이 건축될 당시에는 초낭이라는 시설물이 없었기 때문에, 습지 지역을 평평하게 만든 뒤 초본류 등을 깔고 흙을 쌓는 부엽 공법이 활용됐다. 이후 초낭을 사용한 토목 기술이 발달했고 이는 일본에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제방의 동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활등처럼 굽은 모양(호상)으로 보축 제방을 축조하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보축 제방의 규모는 길이 75m, 너비 34m, 높이 160cm다. 단면 토층은 140~300㎝ 간격으로 성분이 다른 토양이 ‘之’자 모양으로 맞물려 쌓인 양상을 띠고 있다.
또 제방의 가장 아랫부분인 기저부를 조사한 결과, 제방은 직선으로 연결되고 일부 경사면에서 목주열(나무기둥열)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제방 기저부의 너비는 30m 내외로 축조 방식은 기본적으로 최하단에 부엽층을 두고, 점토질과 사질토로 번갈아 쌓고 있다. 사이사이에서 토낭과 부엽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러한 축조 수법은 일본 사야마 저수지 제방 등의 원류이기도 해 우수한 토목 기술이 입증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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