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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훈민정음 재개발지구 - 한경선

강남로 집현전 부동산 내벽에는

매물로 나온 낯선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푸른 종이 속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강남로에 집현전을 차려놓고

그 안에 가득 바람을 풀어놓았다

 

이곳의 바람은

타워팰리스 하늘과 내통한 지 이미 오래다

집현전 내벽에 새롭게 나붙은 훈민정음을 보며

성층권에서 내려온 별똥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별똥들의 방언도 이곳에서는

종종 새로운 훈민정음으로 인정된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소문의 지도를 따라

북두칠성이 제 궤도를 돌 때

궤도를 벗어난 뭇별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각진 상자 한 귀퉁이에 지친 제 하루를 누인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상자 속의 상자

앰뷸런스 소리가 빈번한 이곳

곽에서 관으로 이동하는 길목에도 훈민정음이 있다

흐린 불빛을 달고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관은

언젠가는 땅속 깊이 스며들어 더 이상

길어 올릴 수 없는 검은 우물을 만질 것이다

 

노숙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이미 그 우물의 색깔을 알고 있다

종종 허름한 지하방으로 스며들던 그 우물의 예언을 사람들은 한때

언문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순식간에 곽이 관으로 변하는 것은 집현전의 소관이 아니다

ㄱ자로 꺾인 길을 돌아 ㄴ자로 통하는 길은

강남로 후미진 골목 도처에 널려 있다

 

나랏말싸미 세상인심과 달라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주위에 이상한 소문의 울타리를 친다

바람이 곽을 슬쩍 밀면 순식간에 관이 되는 이 새로운 골목에서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집현전 벽면에 새로운 훈민정음을 붙이고

네모난 상자곽 안의 잠을 사랑한 아버지는 오늘도

당신의 잠 속에 칠성판을 그려 넣고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아버지에겐 종종 잠도 또 다른 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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