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7년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서 “우리는 사적으로는 가족 관계지만 정신적으로는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동행자 간”이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스스로 주체적인 여성 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였으며, 김 전 대통령의 둘도 없는 ‘동지’이기도 했다.
1922년생으로 김 전 대통령보다 두 살 많은 이 여사는 1950년대 초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캐릿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은 당대 엘리트 여성이었다.
이 여사는 마흔 살이었던 1962년 대한 YWCA 총무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도중 김 전 대통령과 혼인했다.
두 사람은 늘 높임말을 쓰는 등 서로를 존중했다.
1963년 6대 총선에서 ‘최대 격전지’인 목포에 출마해 극적으로 당선한 것을 시작으로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과의 투쟁 선봉에 선 정치인 김 전 대통령 뒤엔 언제나 이 여사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이 1970년대 초 유신 반대 투쟁에 앞장섰을 때 ‘더 강력한 투쟁을 하시라’고 남편을 독려하는 등 강골의 운동가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첫 재판 때 검정 테이프를 입에 붙이고 침묵시위를 하던 사진은 고된 옥바라지 속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던 이 여사를 기억하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1987년과 1992년의 쓰라린 대선 패배, 김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선언과 복귀, 1997년 대선 승리 등 고비마다 이 여사의 내조가 있었다.
이 여사는 청와대에 머무는 동안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이 여사는 펄 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 전 대통령 퇴임 후 부부는 동교동 사저로 돌아왔으며, 이 여사는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로 47년 동안 함께 했던 ‘동역자(同役者)’와 작별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선임돼 동교동계의 구심점이자 재야인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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