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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전북대 총여학생회장 문희선 씨 “그때도 지금도 진실을 전해야 한다는 일념 뿐”

5·18 당시 전북대학교 총여학생회장이었던 문희선 씨
5·18 당시 전북대학교 총여학생회장이었던 문희선 씨

1980년 5월 17일 밤 11시 45분께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계단을 오르는 군화소리와 철컥철컥 총검소리가 적막을 깼다.

5·18 민주화운동의 첫 희생자인 고 이세종 열사는 숨가쁘게 계단을 오르며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는 사실을 목청껏 소리치며 주위에 알렸다. 꽃다운 청춘은 그렇게 이 땅의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했다.

당시 전북대학교 총여학생회장이었던 문희선 씨(62)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자정을 기해 계엄군이 들이닥칠 것이란 정보가 있었다. 학생회 간부였던 그는 평소에도 사복경찰의 주요 감시대상이었다. 5월 14일이 당초 총궐기 예정일이었다. 허나 계엄령 선포 분위기 탓에 쉽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사소한 빌미 하나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주요 간부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음을 기약했다. 전략적·일시적 해산이었다. 문 씨는 친구가 있던 무주행을 택했다. 그러다 5월 15일께 학교로 되돌아왔다.

3학년 선배로서 주위를 진정시키고 뜻을 모아야 했다. 낮에는 가두행진, 밤에는 철야농성이 연일 이어졌다. 독재에 맞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전경들과 대치상황이 벌어져도 폭력은 없었다. 대척점에 서 있을 뿐 시대를 살아가는 똑같은 청춘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학내식당이 없어 양은솥을 내걸고 끼니를 해결했다. 잠은 책상과 탁자를 붙여 겨우 몸을 뉘였다.

17일 밤은 유독 뒤숭숭했다. 2층 회의실에 있는데, 11시 45분께 갑자기 다급함이 느껴졌다. 혼자가 되면 몰매를 맞을 수 있기에 무리를 지어야 했다. 일부는 당시 상대 건물 쪽, 지금의 동물원 방향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함께 농성을 펼치던 6명의 여학생을 두고 혼자만 갈수는 없었다. 그렇게 2층 회의실에 남았다.

“근데 세종이는 혼자였던 것 같아요. 계단을 오르며 군인들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녔어요.”

2층 회의실의 여닫이문 한쪽이 열리면서 총칼이 들이닥쳤다. 지금 생각해봐도 죽음이나 부상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불법과 독재를, 역사의 진실을 직시하고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똑똑히 응시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그날 전북대에서 36명의 학생들이 연행됐다.

“정말로 견디지 못했던 것은 빨갱이 취급이나 욕설이 아니었어요. 화냥년 취급이었지요. 정말 모욕적이었어요. 며칠이고 밤새 철야농성을 벌이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는 군인들의 시선이었지요.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치가 떨려요. 온몸의 세포가 일어나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의 얼굴이 상기된다.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로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군인들을 또렷이 응시하는 그를 한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내려찍었다.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랬더니 ‘악’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독한 년 소리를 들었다. 머리에서 피가 철철 넘쳤다. 가방의 마른수건을 얼른 꺼내 눌러도, 이내 젖어버렸다.

그들은 포승줄로 굴비 엮듯이 학생들을 줄줄이 묶었다. 머리의 피가 멎지 않자 어느 군인 하나가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손 한쪽을 풀어줬다. 회의실에 있던 나일론 가리개 천을 찢어 머리를 동여맸다.

그리고는 창문 없는 지프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포승줄 탓에 손에 피가 통하지 않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운전석 쪽 조그만 쇠창살이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그쯤 세종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아요. 지프차 안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밖이 소란스러웠어요.”

그들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 먼동이 틀 무렵 전주경찰서 지하실로 옮겨졌다. 일주일 정도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문 씨는 간부라서 2층 대공과에서 따로 조사를 받았다. 북한의 사주나 지령이 있었냐는 식의 간첩 취급이 주를 이뤘다.

조사 후 35사단 헌병대로 끌려갔다. 돼지축사만도 못한 곳에서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앉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식사와 화장실 사용 시간에만 일어설 수 있었다. 생리현상은 정해진 시간에 다함께 일괄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는 17년 만에 온전하게 사람이 됐다고 했다. 허리 통증을 잊는데 13년, 두통이 사라지는데 15년, 온몸 사지통증이 사라지는데 17년이 걸렸다.

정말로 남에게 보이기 싫은 머리 흉터에도 불구하고 일정 시간을 걸으면 어디든 주저앉아야 했다. 허리가 아파서 더 걸을 수가 없다.

몸의 통증은 거의 사라졌지만, 약은 계속 복용하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한 아픈 경험을 직접 한 탓이다.

문희선 씨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사실을 맹목적으로 믿기 쉽지요. 하지만 진실이 무엇인지의 문제는 달라요.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아요. 알려는 하는 마음가짐,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는 또 “우리의 역사, 살아온 과정을 바로 알아야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서 “우리와 우리사회의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다. 다른 관점을 충분히 인정하되 직시해야 한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이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송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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