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고향은 통념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하는 단어다. 어린 시절의 풋풋하고 아련한 추억이 있는지 잘 모르겠고, 아름다운 동네의 풍경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이 떠나는 구도심에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해가 지면 눈에 띄게 조용하고 어딘가 으스스한 기억이 조금 더 많다. 스무 살이 되어서는 곧장 전주로 왔다. 19년쯤 산 익산에는 그렇다 할 애정이 없었고, 더 큰 도시인 전주에서 새롭고 다양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학 때, 때아닌 괴롭힘을 당한 탓에 졸업을 목전에 두고 도망치듯 전주를 떠났다. 그러면서 되도록 전주에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돌아온다 해도 대학 졸업을 하기 위해 다녀갈 뿐이라고. 고향 같은 건 없어도 괜찮고, 어딘가에 새로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서울에서 산 지 4년쯤 되었을 때, 다시 익산으로 돌아갔다. 서울은 일상이 너무 바쁜 친구였고, 익산은 연락이 너무 없는 친구 같았다. 둘 다 마음 붙이기 어려운 친구들이었다. 결국 사람 때문에 질려서 도망친 전주에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전주를 조금 미워하는 채로.
<지역의 사생활 99>는 전북 군산의 만화 전문 출판사에서 지역을 주제로 제작한 만화 시리즈다. 그중 소개할 책은 전주 편이다. 작가는 전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전주를 떠난 지는 10년이 넘었다. 가족들도 모두 전주를 떠났기 때문에 작가가 전주에 올 일은 관광뿐이라고 했다. 작가의 말이 서울에서 전주를 떠올리는 나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많은 위로가 됐다.
“요즘은 전주를 떠올리면 ‘나는 이제 거기 갈 일이 없는데…’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아쉬움인지 후련함인지 나름의 애착인지 스스로도 참 헷갈립니다. (중략) 과거에는 몰랐어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저는 전주라는 지역은 참 좋아하는데, 그곳에 남아있는 제 그림자들이 싫었던 것 같거든요. 전주에서 지냈던 날들의 풍경을 떠올리면 참 평화롭고 좋은 곳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전에는 오해하고 미워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항상 잘 지내기를 바라는 친구 같아요. (<지역의 사생활 99: 전주> 중)”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큰소리로 여러 번 웃었다. 구석구석 전주에서 생활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작가가 던지는 농담들이 무척 즐거웠고 동시에 틈틈이 섞인 전주를 향한 애정이 느껴져 반가웠다. 무엇보다 전주를 떠났을 때, 돌아올 때의 마음들을 돌이켜보며 위로받는 경험이었다. 가을이면 잎이 노랗게 무성한 향교를 좋아했고, 여름이면 시원한 독립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을 좋아했다. 또 가고 싶은 식당이 있고, 기꺼이 안부를 묻는 이웃이 있다. 요즘에야 내게 고향이 생긴 기분이 든다. 덕분에 이 책을 더 기쁘게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전주의 장소와 얼굴을 떠올리면서.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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