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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⑮ 신석정의 시 다시 알기

신석정 창 밖에서는 / 보리수 꽃향기가 진하게스리 / 퍼져오는 것이었습니다. // 그것은 / 내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끝내던 오월 / 그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군! 인젠 신심이 나는가? // 책장에 걸어놓은 염주를 볼 때마다 / 신심이 없는 나를 꾸짖으며 / 석전 스님의 그 기인 인중을 생각합니다.(자책 저음(自責 低吟) 일부) 신석정(辛錫正, 1907-1974) 시인의 호는 석정(夕汀)이다. 위 시는 부안의 석정이 서울에 올라와 1930년 3월부터 1년여 동안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석전 박한영 스님의 지도하에 공부하던 때를 떠올리며 쓴 것이다. 석전 스님의 신심이 나는가?라는 질문에 석정은 저는 불교를 학문으로 배운 것이지 종교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석정은 이때의 일을 떠올리며 오늘에 이르도록 죄스럽기 짝이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석정은 그의 첫 시집 『촛불』(1939)이 나오기 전부터 노장사상과 도연명, 타고르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하였던바, 석정의 초기 목가풍의 자연시는 대체로 노장사상을 주류로 하여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장사상은 자연스러움의 도와 무위(無爲)를 양축으로 하는 사유체계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만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인식체계이다. 그러한바 인위성을 벗어난 석정시의 먼 나라는 유토피아 내지 무릉도원에 비견된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20대 중반의 젊은 시인이 현실과 동떨어진 먼 나라를 노래하는 일을 혹자는 현실도피의 차원으로 이해하여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하나, 먼 나라를 꿈꾸는 일은 어쨌든 현실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세계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 어머니, /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석정의 시에서 노래하는 자연을 인위적인 것이 배제된 무위의 자연공간 정도로만 해석하는 일은 석정시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석정이 노래한 자연 내지 먼 나라를 『대승기신론』과 연결하게 되면 그 세계는 수동적인 유토피아 내지 무릉도원이 아닌, 매우 탄력적인 개념이 된다. 그건 비정상적인 세계를 정상적인 세계로 바꾸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내면의 지속적 활동의 한 상징이 된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여래장(如來藏) 사상이다. 여래란 이미 깨달은 인격을 뜻하며, 진리로써 이루어진 인격이란 의미로 곧 불(佛)을 말한다. 장(藏)은 태장(胎藏)을 말하는 것으로 진여불성이 번뇌에 싸여 있어 현현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즉 여래장 사상은 일체중생 역시 청정한 여래법신을 함장(含藏)하고 있어 여래와 같은 심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중생 역시 여래로 성불할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상이다. 한번 강렬하게 각인된 진리적 개념은 사라지지 않는다. 석정의 시에서 먼 나라는 식민지 상황에서 조국의 본래성 회복을 염원하는 한 상징적 언어가 된다. 석정은 1930년 만해 한용운을 자주 만났었는데,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와 관련하여 이 시에 등장하는 발자취 얼굴 입김 노래 시는 모두 대자연의 섭리인 우주의 발자취나 얼굴이나 또는 입김이나 노래나 시로 보아 무방할 것이요, 또는 부처님의 그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촛불』의 모두(冒頭) 시 임께서 부르시면은 1931년 3월 어머니 이윤옥 여사가 타계한 후 그 해 8월에 발표된 작품이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 //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 『대승기신론』의 관점에서 이 시를 해석한다면, 임은 여래장에 함유된 진여(眞如) 즉 자성청정심의 종자를 의미한다 하겠고, 시적 화자는 아직 무명(無明)의 번뇌 속에서 진여 세계를 갈망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석정이 노래한 자연은 현실도피처의 피동적 대상이 아닌, 실천적 의지를 담고 있는 능동적 개념으로 이해되며, 그의 시는 보다 풍요해지고 미적 요소 또한 깊어지게 된다. 세상이 뒤집어졌었다는 그리고 뒤집어지리라는 이야기는 모두 좁은 방에서 비롯했단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밤 / 새로운 세대가 오리라는 / 새로운 세대가 오리라는 / 그 막막한 이야기는 바다같이 터져 나올 듯한 울분을 짓씹는 젊은 인사로푸들이 껴안은 질화로 갓에서 동백꽃보다 붉게 피었다.(방 일부, 1939) 이 시에는 뚜르게네프의 소설 『그 전날 밤』에 나오는 혁명가 인사로푸가 등장하고 있다. 천년, 만년 후에라도 그 언젠가 분명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화자는 또 다른 인사로푸를 꿈꾼다. 질화로가 달구어진 좁은 방, 울분 속에서 동백꽃보다 붉어진 마음의 근원은 어디였을까. 바깥세상은 비록 참혹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여래장에 내재된 자성청정심을 각성한 자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의 고운 심장 역시 이 무렵의 시다. 하늘이 무너지고 / 지구가 정지하고 /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 그래도 서러울 리 없다는 너는 /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석정은 제2시집 『슬픈 목가』를 일제의 검열로 발간할 수 없었고, 1939년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가 『문장』지에서 검열 삭제되면서 석정은 문단활동을 중지하고 그럼으로써 민족시인으로서의 지조를 지킨다. 석정은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기에 다소 정치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혹자는 이 일련의 시에 나타나는 정치적 미숙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국의 본래성 회복을 염원하는 간절함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당대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며 쓴 그의 참여시는 전혀 모순되지 않고 순수하다. 이후 정치적 혼란을 뒤로 하고 석정은 전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가람 이병기, 김해강 등과 함께 전북의 문단을 이끌며 2세 교육에 주력한다. 1967년 발간한 석정의 시집 『산의 서곡』의 서(序)에서 조지훈 시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석정의 청수한 시심에서 석전 노사(老師)의 모습을 회상하기도 하고, 석정의 신비한 대화체의 기법에서 만해 선생의 시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 모두 다 불타와 타골에 경도했던 석전 사백의 정신의 열력(閱歷)이 살아 있는 한 징표가 아니던가. 조지훈 시인은 석정의 시세계에서 석전 스님과 만해의 『님의 침묵』을 떠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석정의 축제는 다소 이해된다. 축제도 끝났다. / 가면무도회도 끝났다. 다시금 / 가져야 할 축제를 마련하면 / 그것이 <내일>이라는 희망 속에서, / 무수한 절망과 자살과 투옥은 계산되는 것이다. // 산이여! / 너는 그러기에 오늘도 / 통곡을 생각하는 슬픔 속에 서 있는가? / 통곡하라! / 목 놓아 어서 통곡하라. / <내일!> / <내일>의 축제를 위하여!(축제 일부)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남북의 대치, 좌우익의 처절한 쟁투, 6․25전쟁의 민족상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패와 독재,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박정희의 개발독재와 유신(維新) 등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이 땅의 산들은 우리의 피맺힌 역사를 지켜보았다. 이제 내일의 진정한 축제를 위하여 통곡하라는 것이다. 통곡이라는 절차가 없이 어찌 내일의 축제가 도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무수한 절망과 자살과 투옥은 내일의 축제가 예비될 때 그 가치성이 발휘된다. 일제강점기 부터 이후 격변기 내내 석정이 일관되게 신념을 지키며 창작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래장 사상이 내재된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네 눈망울에서는 / 새벽을 알리는 / 아득한 종소리가 들린다. // 네 눈망울에서는 / 머언 먼 뒷날 /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이 보인다.(네 눈망울에서는 일부) 석정은 우리네 눈망울을 통해 민족의 밝은 미래를 확신하고 있다. 진여의 종자와 망념의 종자가 혼합된, 대한민국 사회라고 하는 여래장 속에서 시인은 진여의 종자를 발견하고, 여기에서 새벽 종소리도 듣고, 미래에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까지 읽어내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우리는 이산가족의 뜨거운 만남도, 남북의 평화통일도 읽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 문학·출판
  • 기고
  • 2019.12.18 17:1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⑭ 전주 출생 소설가 이익상, 한국근대문학 견인·전북문학 선구자

섣부른 양심을 버려라! 미숙한 생활욕을 끊어버려라! 그리하여 그 양심과 생활욕을 뒷동산 양지 끝에 꽝꽝 단단히 파묻어라. 그리고 한번 놀아보자. 그러나 도둑질하는 데에도 그 수단 방법이 교묘할수록 이러한 향락, 이러한 사치를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일세! 나는 수단이 자미스럽지 못하였네! 방법이 틀렸었네! 그러니까 요만한 향락과 사치를 하로밤밖에는 못 누리게 될 것이로세! 알었나? 위의 두 대사는 성해(星海) 이익상(李益相 1895-1935)의 소설 광란(1925)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앞엣것은 청계천을 걸어가며 중얼거리는 주인공의 독백이고, 뒤엣것은 요리집에서 좌중의 동료 및 기생들을 향하여 내뱉는 대화다. 성실하게 회사를 다니던 주인공은 종로 네거리에 돈뭉치를 뿌리는 환상을 떠올리고는 발작적인 심리 상태로 이를 직접 결행하게 되는데, 직장의 금고에서 몰래 지폐뭉치를 꺼내와 동료들과 술자리를 벌이게 된다. 전주 출생의 이익상(본명 윤상)은 부안보통학교에서 교사로 3년 재직하다 1918년 일본의 니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니혼대학은 사회주의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던 곳이었고, 이익상은 자연스럽게 아나키즘을 위시하여 사회주의, 상징주의, 딜레탕트 등 당대의 흐름에 접촉할 수 있었고, 아나키즘에 매료된다. 흠모하던 일본의 아나키즘 작가 니카니시 이노스케의 장편소설 여등의 배후에서 열풍을 번역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위 작품 광란에는 아나키즘에 기울어진 그의 면모가 잘 나타난다. 물론 비정상적 심리상태로 벌이는 행각이고, 절도를 통해 한바탕 벌이는 사건이지만, 주인공의 내면이 지향하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추론할 수 있기에 독자는 그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식민지 시기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 내지 물질 지향의 혼탁한 세태 속에서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자의 비애심리를 그려낸 것이다. 논또랑 사이로 밭언덕 밑으로 고기새끼를 놀리며 흘러가던 청계천! 아! 어떻게 아름다웠던 청계천이냐? 청계천변을 걸으며 중얼거리는 이런 말 속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주인공의 내면과 일제강점기의 혼란상을 고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진다. 이익상은 일본 유학 중 1921년 일본 사회주의 단체 흑도회에 가입하였고,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투쟁하는 예술을 표방하며 파스큘라를 조직하였다. 국제적 연대를 지향하는 흑도회는 후에 민족해방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1925년에는 좌익문학단체 염군사와 통합하여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결성에 참여한다. 이런 활동 등을 근거로 이익상은 신경향파 작가로 자리매김되었으나, 오창은, 최명표 등의 최근 논문에서는 조선인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리얼리즘 작가로 재평가되고 있다. 아무리 고상한 예술일지라도 우리의 인생을 떠나고 사회를 떠나서는 그 광휘를 발한다는 것이 의문이외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내재한 독특한 광휘를 발휘하여야 할 것이오. 인간의 내부 생명에는 공통의 고민이라든지 시대고(時代苦)가 있어서 자연히 어떠한 주의나 류(流)를 이루고, 또는 부합하게 되는 것이외다. 위 글은 『개벽』(1921.5)에서 밝힌 이익상의 평론 예술적 양심이 결여한 우리 문단의 일부인바, 카프가 결성되기 4년 전에 밝힌 내용이다. 이익상의 이런 뜻으로 미루어 볼 때, 카프의 결성에 명단을 올리고도 당시 카프의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자진탈퇴를 하게 되는 추이를 짐작하게 한다. 생경한 정치투쟁적 구호 속에 매몰될 경우 예술로서의 창작뿐만 아니라 시대고를 안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 모두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문사(文士)들이라면 글의 예술성 이외에 시대의 아픔에 대한 고뇌도 있어야 할 것이며,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익상은 생전에 중단편소설 28편, 장편소설 3편, 평론 및 기타의 글 64편을 남겼다. 조선인의 궁핍한 삶에 대한 사실적 재현이라는 이익상의 창작 의도와는 달리 이익상의 평가가 신경향파 문학이라는 평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카프 담론이 오랫동안 작용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나키스트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될 수 없는 분단된 한국사회의 학문적 현실에 기초한다. 1910년대 아나키즘이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으로 수용된 탓에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이었던 아나키즘은 해방 이후에도 금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익상은 조선일보(1924), 동아일보(1927), 매일신보(1930)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글을 쓰게 된다. 하지만 당시는 식민지의 현실이기에 탄압의 대상인 아나키즘 사상을 표방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일제 당국의 검열이 강력하게 작동되는 관리문학의 시기였기에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거나 일본인을 비방해서는 안 되는 때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세 편의 장편소설 키 잃은 범선 짓밟힌 진주 그들은 어대로에는 일본인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삼각관계에 있는 남녀의 애정과 갈등을 통해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를 직간접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신문사에 재직한 덕분에 다른 조선인 작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류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기생들도 없지 않아요. 세상 형편이 어떻게 되는 줄을 모를 때에 부모의 강제로 기생이 되었다가 차차 제 철이 들고 보니까 자기의 정조를 팔아서 일신의 호화로운 생활을 탐하는 것이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하여 단순히 마음을 돌이키어 순진한 생활을 시작하려는 결심으로 어린아이들과 함께 앉아서 부끄러운 생각을 참아가며 산술이니 습자니 하는 것인 듯해요. 장편소설 그들은 어대로의 일부이다. 교사가 된 혜영이 식민지 현실에 눈을 뜨면서 진술하는 내용이다. 소박맞은 여인, 기생, 여직공, 사생아, 장애인 등 제일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는 여성들의 참상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여성은 교육제도의 불평등과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일제에 의해, 남성에 의해, 빈부격차와 신분에 의해 중층적으로 억압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과거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는 내용이다. 이익상의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에서 연애는 등장인물 서로를 통해 식민지 현실을 응시할 수 있는 통로가 되고 있다. 이에 독자들은 조선인 남성 지식인들의 생활적 모순과 식민지적 속성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 남성과 연애 관계에 있던 여성들이 처한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식민지 현실에서 이익상은 예술지상주의에 빠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선명한 정치적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는 프로문학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그가 소설을 통해 천착한 것은 식민지 현실 속에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이었다. 그 민초들을 형상화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일제하의 구조적 모순과 민초들이 어떤 이유로 궁핍하게 살아가게 되는지를 스스로 직시하게 한다. 버림받은 듯이 살아가는 이 땅의 약자들에게 문학을 통해 희망의 빛을 주고자 했던 이익상은 우리 문단에서 그 존재감이 희미한 상태이나, 다행히 『이익상문학전집』(2011, 최명표 편)이 나와 있으니 후속 연구들이 이어지고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우리 문학은 더욱 풍성해져야 할 것이다. 이익상은 분명 한국근대문학의 구축에 일조를 했고, 전북문학의 선구자로서 큰 자취를 남겼다. 이익상은 민중의 삶을 천착한 작가였다. 그만큼 그는 인간주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작가였다. 일제하의 비참한 현실을 객관적 시각으로 그려내어 독자로 하여금 더욱 심금을 울리게 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단편 위협의 채찍(1926)을 들 수 있다. 일본인 농장주에 기한 내 소작료를 내지 않으면 소작권을 상실하게 되는데, 이는 농민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여섯 살 난 아들이 한 시간 뒤에 죽을지 모르는 위중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성삼은 갈등 끝에 벼 한 짐을 매고 농장을 향한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들은 죽어 있었다. 지금 성삼의 마음 같으면 그 주은 돌로 농장 사무실 안에 가만히 앉아 있던 자들을 모조리 때려죽여도 분이 오히려 아니 풀릴 듯하였다. 그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 그날 저녁에 홑이불로 둘둘 싼 어린 시체가 성삼의 품에 안기어 앞 동리 공동묘지로 갔다. /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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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4 17:18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⑬ 가람 이병기의 문학 다시 알기

가람 이병기. 그대로 괴로운 숨 지고 이어 가랴 하니 /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금 불어온다 / 실낱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든다 / 찬 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하노라 위 작품은 가람 이병기(李秉岐, 1891-1968)의 연시조 시름이다. 전주시 다가공원의 가람시비에 새겨 있는 작품으로 일제강점기를 견디며 살아온 시인의 뼈저린 내면 풍경을 다소나마 헤아릴 수 있게 한다. 시대적 절망감 속, 시조 관련 작업은 그에게 한 줄기 희망으로 다가왔으리라. 시 창작을 주제로 하는 다음 시에서 이를 엿보게 한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 / 이생의 영과 육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 오로지 그 하나만은 어이 할 수 없고나(시마(詩魔) 일부) 가람은 1891년 조선 말기에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서당에서 8세부터 18세까지 한문을 공부하였는데, 이는 차후 수천 권의 고서 수집과 한문학 연구의 기초가 된다. 중국의 사상가인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읽고 신학문에 눈을 뜬 가람은 전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 만에 마치고(1910년), 그해 서울의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1912년에는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수강하며 국문법과 신문명에 몰두하게 된다. 1926년 카프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국민문학파가 형성되었고, 육당과 춘원을 중심으로 한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육당을 중심으로 한 시조운동은 계몽적 성격을 띠어 이전 시대의 시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바, 진정한 의미의 시조부흥운동은 이병기, 이은상, 정인보, 조운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시조문학사에서 도구적 언어가 아닌 존재론적 언어의 시 창작을 지향했다. 그중에서도 가람 이병기는 사물 탐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존재론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어떤 이념이나 관념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미학적 자유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별 일부) 가람은 시조에 대한 근대적인 미의식을 체계화된 논리로 제시하였다. 그의 시조 근대화 노력은 1920~1930년대에 《동아일보》, 《신생》 등에 20여 편의 시조론을 발표하며 구체화된다. 이론뿐 아니라 시조의 창작에서도 현대시의 기본적인 속성 중의 하나인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매우 중시했다. 그가 이루고자 한 시조의 근대화 노력은 민족이나 이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닌, 시조 자체의 내용과 형식이 지니고 있는 미적 차원의 문학운동이었다. 우리 민족 유일의 정형시 시조를 통한 가람의 실천은 그 자체가 민족적 가치를 띤 작업이었고, 전통의 계승이었으며, 아울러 혁신을 내세워 변화를 시도하는 창조적 수행이었다. 그때는 1930년대 서구의 이미지즘이 도입되는 시기였는데, 이미지즘의 유입은 가람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여겨진다. 시조는 혁신하자라는 가람의 여섯 가지 주장과 당시 이미지즘의 주장은 그 일치하는 바가 크다. 가람은 시조 혁신의 여섯 가지 구체적인 방법으로 ① 실감실정(實感實情), ② 취재 범위의 확장, ③ 용어의 변화, ④ 격조의 변화, ⑤ 연작 쓰기, ⑥ 쓰는 법, 읽는 법을 제시하였다. 이를 두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도락성(道樂性)의 탈피와 리얼리티의 확립, 둘째 자율적인 감정의 구조와 정형(整形)으로 요약된다. 이는 사물에 본질적으로 접근하여 얻어지는 내밀하면서도 실감 있는 정서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작가 자신의 자율적인 감정 구조에 맞는 가락을 찾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람의 다음 시조들은 내용의 정밀감과 우리말 고유의 섬세한 가락을 조화시켜 생명의 순수성과 고결함, 인간 내면의 애틋한 정서를 실감실정의 차원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 하겠다. 가람 문학관. 익산시 여산면 소재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 한두 개 소리 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 가려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오동꽃 전문),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 본대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난초4 전문) 가람은 주시경 선생을 만난 이후 언어를 통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다. 31세 때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고, 40대 이후에는 수년 간 전국을 순회하며 우리말 강연을 하였다. 1942년(52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그의 강직한 성품은 둘째 아들의 회고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정직한 분으로 불의를 보곤 참지 못하는 성품으로 관료사상과 권력, 재물에는 무관하셨으며, 조선어학회 홍원형무소 피검자 30여 명 중에서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않으신 어른이었다. 『가람문선』에 수록된 165편의 시조는 조선어학회사건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전기 시조(72편)는 선비의식의 서정 미학으로, 민족의 격동기 시인의 목소리가 거칠어지는 후기 시조(93편)는 민족적 휴머니즘의 구현으로 요약된다. 특히 후기 시조에는 암담한 시대 상황 속 인갑답게 살고자 하는 생존의식과 귀거래의 고향의식을 담고 있는바, 다음 국제시장은 625전쟁으로 인한 삶의 비참한 현실과 그런 속에서도 느껴지는 훈훈한 인정미를 그려냈다. 간밤 오던 눈이 두어 자나 쌓였다 / 급행열차가 연착 이십여 시간 / 그 좁은 곳간 속에서 모두 징역을 하였다 // 다시 와서 보니 부산은 국제시장 / 눈 녹은 거리거리 사뭇 수렁이다 / 그려도 어깨를 마구 비벼대며 사람들이 밀어온다 해방 후 가람은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관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1946년 이후 4년 동안 서울대에서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6․25전쟁 이후에는 전북전시연합대학에 취임하고(1951년), 전북대 문리대 학장에 피임되기도 하였다.(1952년) 1957년 67세 때 가람은 한글날 기념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중 뇌일혈로 눕게 된다. 시조부흥운동을 하면서 국어와 신문, 잡지 등의 매체를 기본으로 하여 장르 변화를 이끌어낸 가람은 새로운 대중문화를 선도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후기에 부상한 서민문학을 처음으로 주목하였고, 그 문학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가람은 『국문학전서』(1957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실사구시의 학풍은 서민층을 발판으로 줄기찬 힘을 뻗기 시작하였다. 그러하매 문학도 자연히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기 시작하였으니, 저 허균의 『홍길동전』은 실로 그런 문학의 효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서민문학의 백미로 극가(劇歌) 즉 판소리문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극가는 그때 천대를 받던 광대‧기생의 작이요 창이었다. 광대‧기생에는 의협 호방한 천재적인 예술가가 많았다. 가람은 서민정신의 발흥이 근대정신의 시작이며, 근대적인 변화는 곧 서민문학임을 『국문학전서』에서 선도적으로 보여주었다. 가람이 제시한 서민정신과 서민문학 이론은 근대의 기점을 18세기 영․정조대로 끌어올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즉 우리나라의 근대의식은 서구의 것이 아닌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내재적, 자생적 근대화론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서민문학에 대한 가람의 연구는 서지학자로서 방대한 양의 고문헌 자료를 수집한 그의 내력과 무관치 않다. 그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한 신재효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고, 20여 년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 신재효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는 국문학사에서 신재효의 위상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김삼불을 비롯한 후대의 판소리 연구자들에게 판소리 연구의 초석을 놓아주었다. 가람은 학문 연구에서 천재성보다 공정(工程)을 중시하였다. 이는 평생 시조의 현대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서지학자로서 큰 활약을 남긴 그의 면모와도 맥이 통한다. 1909년(19세)에 쓴 한시에서 그의 그러한 특성과 포부를 엿볼 수 있다. 만국이 각기 동서로 벌여 있는데 / 큰 학자들은 뜻이 같지 않네. /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해 천지에 나아간다면 / 육대주 가운데 영원히 홀로 설 수 있으리.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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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0 17:48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⑫ 유재 송기면의 한시…유연(悠然)한 도(道)의 세계, 깨어 있는 민족의식의 시편들

유재 송기면 초상화. 홀로 근심 안고 새벽까지 앉아서(獨抱幽憂坐達晨) / 하늘과 땅에 빌고 신에게 또 빌었네.(拜天禱地又祈神) / 어느 누가 부드럽게 덕을 품고 베풀 수 있어(何人能施柔懷德) / 온 세계를 녹이고 따뜻한 봄 오게 할 수 있을까.(四海融融各得春) -丙申元朝 전문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이 1956년 75세 설날 아침에 쓴 시이다. 평생 도를 구하고 학문을 하는 본뜻이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그 해답은 위의 시에서 찾아지리라. 잠도 이루지 못하고 새벽까지 홀로 앉아 천지신명께 세계평화의 봄을 간구하는 마음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본바탕인 성(性)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실천하는 도학자의 본보기를 만나게 된다. 송기면의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자는 군장(君章), 호는 유재이다. 그는 김제군 백산면 요교리에서 부친 송응섭과 모친 전주 최씨 사이의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응섭공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수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여러 차례 천거되었다. 유재가 5세일 때 부친이 타계하여 모친이 그 뜻을 이어 가르치게 된다. 모친은 1894년 전주에서 거처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대문호 석정 이정직(1841-1910)을 집으로 모셔와 유재를 가르치게 하였다. 유재는 석정을 통하여 시문과 서화, 예술 이론, 천문과 지리, 역산(曆算)과 의학 등 실용적 지식을 포함한 박학적 학풍의 진수를 전수받으며 20세 무렵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다. 1910년 스승 석정이 타계하자 그의 학문을 계승한 유재는 요교정사(蓼橋精舍)에서 석정을 대신하여 수많은 후학을 가르치게 된다. 1920년, 30대 후반의 유재는 세상의 혼란을 피하여 계화도에 머물고 있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를 찾아가 예를 갖추고 사제의 연을 맺는다. 이후 유재는 도의(道義)에 뜻을 두고 이치를 궁구하는 데 전념하여 성리학의 체계를 확고히 세우게 된다. 아울러 옛것을 중시하면서도 수구론에 빠지지 않고 유신론을 강조하여 구체신용설(舊體新用說)을 정립하였고, 의(義)와 이(利)의 조화를 통한 효용을 중시하였다. 박완식의 역(譯)으로 발간된 『유재집』(2000년)에는 276제 368수의 시가 실려 있고, 이 중 180여 수가 교유시(交遊詩)다. 교유시가 많은 것은 두 스승 문하에서 수학하고 많은 제자를 둔 그의 이력과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유재의 성품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또한 그의 시에는 경륜, 지조, 절의 내용이 뚜렷한바 그의 문학은 경세적(經世的), 실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개화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남북분단의 격변기를 살면서 부당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삶을 관철시킨 힘은 바로 선비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근대문학이 정립되면서 문학의 주도권이 한문에서 국문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한문학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한문학이 소멸되는 끝자락에서 유재는 수준 높은 한시를 창작한바, 유재는 그의 글씨와 유학에 못지않은 한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크게 사회시와 서정시로 나눌 수 있는데, 사회시는 우국, 상시(傷時), 절의, 저항, 애민, 교유, 교육 등 다양하게 분류된다. 견훤의 묘를 지나며와 노량진, 사육신의 묘에서 두 편을 감상한다. 저무는 산마루에 올리는 술 쓸쓸하고(一杯寂寂暮山頭) / 서풍에 만고 시름으로 지팡이가 머무네.(住杖西風萬古愁) / 싸움터 묵은 벌판에 가을풀이 이울고(百戰荒原秋草沒) / 들녘의 무심한 노인 누렁소를 풀어 놓네.(無心野老放黃牛) 사육신의 죽음을 한탄하지 말라(莫恨六臣死) / 죽었어도 길이길이 아름다워라(死惟百世休) / 영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靈應懸日月) / 백골은 산악처럼 무겁다네(骨亦重山岳) / 저녁 새 빈 골짜기에 울고(夕鳥號空谷) / 봄꽃은 강물에 떨어지네(春花落上流) / 내 일생 통한의 눈물(平生一?淚) / 노량나루터에 흩뿌리네(灑向鷺梁頭)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 화자는 나그네가 되어 후백제의 왕 견훤의 묘를 마주하게 된다. 해 저무는 가을 쓸쓸한 날, 옛 영웅 앞에 술 한잔 올리며 옛 시절을 떠올린다. 과거 싸움터였던 들녘, 시들어가는 가을풀과 누렁소를 풀어놓는 노인의 무심한 풍경에서 화자는 무상감을 느끼고 있다. 우국의 정서를 자아내면서 동시에 달관한 인생의 한 경지를 엿보게 한다. 아울러 화자는 1920년대에 한강변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를 찾았다. 망국민의 비애가 사육신의 높은 절의와 만나니 그 감회는 걷잡을 수 없다. 도의를 지키고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사육신의 높은 뜻 앞에서 새도 울고, 꽃도 울고, 슬프게 흘러가는 강물 위에 망국민으로서 화자 역시 솟구치는 눈물을 흩뿌린다. 유재는 일찍부터 세속의 명리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다. 1906년 25세 때, 조정에서 박사과 과거를 실시하여 이에 응시하고자 했으나, 시험이 문란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을 알고 응시를 포기하였다. 다음의 시 만조(晩眺)는 관직을 포기하고 자연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의연한 태도를 새의 비상을 통해 잘 보여준다. 곱게 물든 저녁노을에 하늘의 반이 물들었고 / 물 위의 맑은 안개는 희미하게 사라지려 하네. / 저녁노을 비치는 산 위로 새 한 마리 날고 있나니 / 내 몸은 아직 긴 강물 그림 속에 머물고 있네. 유재는 평생 인격수양에 노력하고 명상을 하며 도인으로 살았는데, 사람을 대할 때는 진정한 마음으로 대하였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은 어떤 압력에도 굽히지 않았다. 일제도 유재의 성품을 알고 있었기에 창씨개명 같은 신민화정책을 강요하지 못했다. 다음 시는 왜경(倭警)이 칼을 들고 삭발을 강요할 때 단호하게 호통을 치고 돌아와 쓴 시다. 의를 품고 살아가는 유재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음산하게 비가 내려 앞산이 어두운데 / 무수리의 요망함이 도둑떼처럼 나타나네. / 아무리 칼로 위협한다 해도 / 내 가슴속 의리를 어찌 자르리오. 유재는 마음보다 성(性)을 더욱 존중하는 간재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을 계승하였으며, 방법론으로는 구체신용설(舊體新用說)을 강조하였다. 새롭게 한다는 것은 옛것으로써 본체를 삼고, 옛것은 새로운 것으로써 작용을 삼는 것이다. 본체가 보존되어 있음으로써 그 작용이 무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롭게 한다는 것은 옛것을 계승함이니, 유신(維新)이란 옛것을 계승하여 새롭게 함을 말한다. 유재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시 제요교정사의 원래 우리 도는 일정한 형체가 없고 / 순리를 따르면 어디서나 넉넉하리.라는 표현과 맥이 통한다. 그러나 자신의 본래 심성을 잃지 않으면서 상황에 맞게 처신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음 두 작품은 유재가 추구하는 도의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한다. 못난 듯 사노라니 마음에 누(累)가 없고 / 번거로운 일 줄이니 꿈자리도 편하구나. / 한가하게 때로 홀로 걸으니 / 산수가 옷자락에 비쳐오네.(偶題), 하나도 가슴속에 누된바 없어 / 사람과 하늘 이치 본래 하나임을 알겠네. / 항상 맑은 기운 이 몸에 머무르니 / 내 마음 절로 담담하여 허공과 같네.(詠歸亭 일부) 『유재집』에는 시 외에도 편지와 각종 문집의 서문, 묘비명과 행장(行狀) 등 많은 글이 실려 있고, 『유재집』에 수록되지 않은 유고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당대 호남의 지성사(知性史)를 복원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유재는 천하와 더불어 그 예(禮)를 같이 할 수 있다면 이것은 천하의 지공(至公)이다.라고 하며 예의 실천에 지극하였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자의 대의(大義)를 항일로 주를 삼고, 시에서 망국민의 아픔을 다수 형상화한 것도 예의 실천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유재는 유신론에서 주장한 것처럼 삶의 본체인 성리(性理)를 떠나지 않으면서 현실 상황을 끌어안는 시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한시는 유연(悠然)한 도(道)의 시학을 담고 있으며, 어느 국문 시가보다 민족의식의 각성을 보여주었다. 일제 말기, 그는 시 온양온천을 통해 성(性)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넓은 품을 보여준다. 온양온천은 우리나라의 으뜸이라. / 질병을 치료하는 데 큰 공이 있네. / 어떻게 하면 본성 잃은 자까지 치유해 / 한 세상 태평성대로 편하게 할까. 당대 본성을 잃은 자는 일제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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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06 17:13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 문학의 메카, 전북] ⑪ 석정 이정직,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능했던 최고 수준의 대문호

벼루 열어 구슬이슬 기울이니(開硯傾珠露) / 푸른 연이 곧 그림스승일세.(靑蓮卽畵師) / 치장을 없앤 천연함 있어야(天然去雕飾) / 진실로 잘 그려진 시라네.(正是寫眞詩), 사람들은 실제 매화가 좋다 말하지만(人道眞梅好) / 나는 매화그림을 더욱 좋아한다네.(吾憐畵更好) / 세속 높이 초월함 이미 조촐하여(高標看已潔) / 용모 감쇠하는 때가 없어라.(未有減容時)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은 구한말의 인물로서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예술가요, 실학자였다. 시서화뿐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수학 등에 두루두루 통달한 유학자, 통유(通儒)라 부를 수 있는 선비였다. 위 두 수의 시는 제화시(題畵詩)로서 연(蓮)과 매화의 그림에 어울려 쓴 시이다. 석정은 시론시(詩論詩), 교유시(交遊詩), 사경시(寫景詩) 등 여러 종류의 시를 많이 남겼는데, 시서화에 능통한 석정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제화시라 할 수 있다. 연(蓮)을 읊은 첫 수에서 그림의 대상 연과 그림을 그리는 자신이 주객일여의 세계로 하나가 되고, 그림이 시가 되고 시가 그림이 되는 시화일체의 경지를 보여준다. 자연 그대로의 청련 자체가 내 그림의 스승이요, 내 마음세계를 담아낸 진경의 시가 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아울러 석정은 실제 매화보다 매화그림이 더욱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문인화 속에는 작가의 고매한 정신이 깃들어 있고, 또 그래야 함을 말한 것이다. 시서화 삼절의 높은 경지를 이룬 석정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석정 이정직은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근대계몽기에 활동한 문인으로서, 매천 황현(1855-1910), 해학 이기(1848-1909)와 더불어 호남삼걸로 불리었다. 석정은 칸트와 베이컨 철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하였는데, 1973년 철학자 박종홍이 석정을 서양철학 연구의 선구자라 평가하기까지 그는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에 대한 활발한 연구는 2002년 김제문화원에서 『석정이정직유고』 국역본을 펴냄으로써 이루어진다. 단행본으로 구사회의 『근대계몽기 석정 이정직의 문예이론 연구』(2013)가 발행되는 등 현재 석정을 연구 대상으로 한 단일 논문만 해도 100여 편에 이르고 있으니, 석정은 이제 조선말기의 대문호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구사회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학문과 예술 두 영역을 두루 겸비한 인물은 거의 없다 하면서, 두루 겸비한 인물로 추사 김정희와 석정 이정직을 들고 있다. 석정의 학문과 예술의 경지는 오랜 세월에 걸친 부단한 학습과 끊임없는 연마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선천적 재능보다 후천적 학습을 중시하였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부친 이계환이다. 가난한 살림에도 석정의 교육에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부친은 단계적인 교육을 실행하였으며, 한 스승에게만 맡기지 않고 여러 스승을 통해 공부하도록 주선하였다. 석정의 서화(書畵) 역시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나, 여러 자료를 놓고 보면 그의 예술적 성과는 결국 부단한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석정은 글씨와 그림에 대해 특정 스승을 사숙하지 않고 서첩이나 화본을 통해 스스로 학습하여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1868년 28세의 석정은 중국의 연경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이는 그로 하여금 외래 문물을 익히고 자신만의 학문과 예술을 정립케 하는 데 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정은 전주 남문에서 한약방을 수년간 운영하기도 하였는데, 1894년 4월에는 동학농민전쟁으로 전주성이 함락되면서 화재로 모든 재산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틈틈이 지어두었던 10여 질의 시문집도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다. 이후 그는 고향인 김제로 돌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 연구와 예술 창작에 심혈을 쏟는다. 그의 모든 원고들이 사라졌을 때 그는 대단히 낙담하였으나, 절망하지 않고 다시 분발하여 세상을 떠난 1910년 11월까지 1300여 수의 시와 300여 편의 문장을 남겼다. 오늘날의 문집 초고본인 『연석산방미정고(燕石山房未定藁)』를 비롯하여 『시경일과(詩經日課)』, 『시학증해(詩學證解)』, 『간오정선(刊誤精選)』 등 10여 종 이상의 저서가 전해오고 있다. 이정직의 글은 문(文), 사(史), 철(哲) 및 경세(經世) 전반에 관련되어 있지만, 특히 문학담론적 글의 비중이 크다. 시문이 밥이라면 글씨는 떡과 같다.라고 스스로 밝혔듯이, 그는 서화보다 시문에 더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석정의 시작(詩作)은 많은 시회(詩會)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친목을 다지고 후진을 양성하는 시회는 그의 삶의 일상이었다. 지인과 정을 나누는 교유시와 지인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쓴 사경시 한 편씩 들어본다. 지난날 내 만나지 못해서는 / 그리움에 부질없이 넋을 잃었지. / 나아가 산 누각에 이른 후에는 / 마주 앉아 도리어 말이 없네.(舟村書室), 주촌은 구례에 있는 지명이다. 당시 매천 황현은 구례에 거주하였는데, 석정은 1895년과 1897년 사이 몇 차례 구례를 방문하여 황현과 이기 등 지인들을 만난 바 있다. 그리움에 넋을 잃을 정도라고 표현해놓고는 막상 만나서는 서로 말을 잃고 있으니, 상봉의 감격과 그 이심전심의 기쁨이 절로 전해온다. 빈 강에 수많은 겹겹의 바위 / 치고 부딪혀 절로 요란하네. / 바위는 모두 거울처럼 평평하여 / 한 올 머리카락 흔적도 자세히 아네.(過龍江村) 용강촌을 지나다 바라본 강가의 바위를 읊은 시다. 빈 강에 겹겹이 놓여 있는 바위들이 물살에 부대끼고 부딪혀 소리가 요란하나, 그 덕분에 바위는 거울처럼 평평해졌고,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 보일 정도로 맑아졌다는 것이다. 수많은 단련의 과정을 거쳐 평담(平淡)의 경지에 도달한 시적 자아의 내면세계가 강물 속의 바위를 통해 전해온다. 석정 시의 특징은 회화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시(詩)와 화(畵) 모두에 뛰어난 그였기에 시경(詩境)과 화경(畵境)의 혼융은 당연한 결과로 여겨진다. 석정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시를 좋아하였다. 하지만 시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면 천성이라는 타고난 품성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선천적 능력보다 끊임없이 갈고 닦는 후천적 학습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 역사적 사례를 당나라 두보(712-770)에서 찾았다. 천성이 우수한 자는 그 천성만을 믿고서 학식에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백이 이런 경우입니다. 학식이 우수한 자로 이치에 통달하고 마침내 천성을 따라잡은 것은 두보입니다. 석정은 조화롭고 이상적인 문장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견식(見識)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견식이 지극하면 문장의 법을 지키면서도 재능을 활용하지 않음이 없고, 고문(古文)을 추구하면서도 솜씨를 맘껏 펼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극한 견식이란 옛 성현의 정신이 담긴 경전을 익히고 배워서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안목을 갖춘 높은 견식을 말한다. 공자께서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은 식(識)을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식을 이루고 싶은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길러야 한다. 또한 석정은 다수의 시론시(詩論詩)를 남겼는데, 시란 무엇인가라는 본질론,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라는 창작론, 시인과 작품에 대한 비평론, 자신의 시적 취향과 시벽(詩癖) 등 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다음은 희위이십사절구의 22수이다. 풍아(風雅)의 충만함이 바로 시경(詩境)이거니 / 오랜 세월 오르내린 명가(名家)는 몇몇인가. / 벌꿀이 그처럼 달콤한지 알려면 / 많은 꽃들을 열심히 채취해봐야 하리. 석정은 시의 이론화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후학들이나 제자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학자로서의 현실적인 필요성이 작용하여 찬술한 저서가 『간오정선』이다. 이 책은 원나라 방회와 청나라 기윤의 비평 저서에서 490여 수를 선별하고, 방회와 기윤의 비평과 견해를 달리하는 110여 곳에 자신의 비평을 덧붙인 시학이론서요, 비평의 비평서다. 무릇 시를 지음에 있어 화려함은 장년기에 이루어지고 정밀함은 노년에 이루어지니, 화려함은 기가 충만한 데서 생기고 정밀함은 법이 완숙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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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3 16:49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 문학의 메카, 전북] ⑩ 흥부전, 판소리적 골계 통해 빈익빈부익부 사회 모순 풍자

내 가난 들어 보오. 내 가난 남과 달라 이 대째 내려오는 광주산 사발 하나 선반에 얹은 지가 팔 년이로되, 여러 날 내려오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 눈물만 뚝뚝 짓고, 부엌의 노랑 쥐가 밥알을 주우려고 다니다가 다리에 가래톳이 서서 종기 터뜨리고 드러누운 지가 석 달 되었소. 흥부가 식솔들을 부양하기 힘들어 다소 의기 좋게 병영(兵營)에 죄인 대신 매를 맞기 위해 매품 팔러 갔는데, 매품 팔러 온 사람들이 하도 많아 흥부의 제안으로 서로 가난한 사정을 이야기하며 가난경쟁을 하게 된다. 위와 같은 내용 등을 듣고는 흥부는 매품팔이도 포기하고 낙담하여 돌아오게 된다. <흥부전>은 환상과 기괴가 넘치고, 과장과 해학, 풍자 등으로 어떤 고전소설보다 활기가 넘치는 작품이지만, 분명한 것은 당대 하층민의 실상을 기초로 하여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흥부전 역시 판소리계 소설로 판소리 흥보가가 소설 흥부전으로 정착되었다. 먼저 주인공의 이름을 거론하면, 사실 거의 모든 판소리에서 흥보, 놀보로 불렸으나, 1860년대 대량으로 발간된 경판본에서 흥부, 놀부로 이름을 붙이고, 광복 이후 교과서에 흥부, 놀부로 나오면서 이후 이름이 흥부, 놀부로 거의 고정되었다. 흥부의 성(姓)은 신재효의 박타령 이후 판소리창본들에서 박(朴)씨로 나오고 있으나, 임(林)씨 설, 연(延)씨 설도 있고, 확실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다. 흥부전의 근원 설화로 박 타는 처녀와 방이설화를 들 수 있고, 동물보은담, 선악형제담, 무한재보담 등이 흥부전의 화소로 등장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반면에 김창진은 꼭 이들 설화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 흥부전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에 주목한다. 그는 이 작품이 실제적인 사건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추정하고 제반 상황을 검토하고 고증하였다. 흥부전은 37종의 모든 이본에서 지리적 배경을 거의 한 곳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 비추어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어떤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것은 남원 광한루와 같은 어떤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는 춘향전이나, 지역성과 무관하게 전해오는 설화 등과는 경우가 다른 사례라 할 것이다. 흥부마을에는 흥부전의 모태가 되는 박첨지 전설과 춘보 전설이 내려온다. 박첨지 전설에 의하면, 운봉과 함양 쪽에 땅을 가진 지주 박첨지가 살았는데, 민란이 일어나 박첨지와 그의 식구들이 몰살을 당했고, 한 나그네가 찾아와서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한다. 이 이야기를 분석한 결과 박첨지와 나그네는 놀부와 흥부의 원형적 인물임이 밝혀졌다. 그 민란이 어떤 민란인지 밝혀내지는 못했으나 흥부전은 이 박첨지 전설을 소재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1940년까지 흥부의 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가 식량 부족을 이유로 금지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여러 정황을 연구한 결과 흥부와 놀부는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재효의 박타령에 나오는 복덕촌(지금의 복성리)을 여러 문헌 등을 통해 고증하고, 이런 사실 등을 종합한 결과 흥부의 출생지는 남원시 인월면 성산리이며, 흥부가 유랑하다 돌아온 곳이 복덕촌이고, 이후 이웃 마을로 이사하여 정착한 곳 즉 발복지(發福地)는 아영면 성리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박춘보라는 이름으로 묘소도 남아 있으며, 1992년 이후 해마다 제사도 지내오고 있다. 그러나 실존인물로서의 흥부와 놀부가 형제였다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문헌상 흥보가를 가장 앞서 부른 명창은 권삼득(1771-1841)이다. 권삼득은 남원군 주천면에 와서 소리를 완성하고 명창이 되었는데, 주천면은 흥부의 고향과 발복 마을에 인접한 곳이다. 권삼득은 이곳에서 박첨지 전설과 춘보 전설을 분명 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흥보가의 발생 시기가 18세기로 추정되고 있는바, 권삼득이 두 전설을 바탕으로 흥보가를 짰을 가능성도 있으며, 흥보가가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면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더욱 실감나게 다듬고 고쳐서 오늘과 같은 흥보가의 형태로 완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흥보가는 실제의 사건을 기초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였다. 그러나 지주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민중이 지주를 파멸시킨 사건을 18세기 당대에 현실적인 구성으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지고, 그래서 놀부박이라는 상징적인 형태의 골계와 풍자, 또는 기괴한 이야기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추론된다. 흥부전의 주제는 권선징악과 형제간의 우애 등으로 말해질 수 있으나, 판소리 흥보가와 소설 흥부전 모두 그 이면에는 민중의 입장에서 조선 후기의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사회상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강하게 담겨 있다. 흥부전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하층민의 처참한 상황을 담아내고 있고, 민중의 입장에서 당대의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제가 무리 없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판소리라는 예술장르로서의 오락적 기능과 제비박이라는 상상적 서사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의 꿈을 대변하는 서술자의 상상과 환상 그리고 현실성을 뛰어넘는 기괴를 통하여 흥부전은 당대의 피폐한 민중의 현실을 신랄하게 드러내면서 설움을 달랠 수 있었고, 동시에 익살과 풍자를 통해 작품의 흥미와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등 대중적으로 많이 읽혀지는 판소리계 소설들에서 찾아지는 공통점은 당대 민중들의 한을 담고 있다는 사실과 익살과 해학으로 빚어지는 골계미로써 작품의 긴장과 이완을 조절하면서 이끌어나간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 소설에서는 한결같이 비현실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데, 이러한 비현실성은 판소리계 소설 특유의 골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었고, 동시에 지쳐 있는 민중들에게 오뚝이처럼 일어서게 하는 희망을 심어준다. 여기에서 원한과 탄식의 부정적 세계가 삭임의 과정을 거쳐 원(願)과 정한(情恨)의 긍정적 세계로 승화되는 한국적 한(恨)의 양상을 만나게 된다. 놀부가 없는 흥부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흥부전이 개연성 있게 느껴지는 것은 놀부박이라는 장치 속에는 빈익빈 부익부 현실의 부조리를 타파하고자 하는 당대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흥부전은 착한 사람이 가난하게 살고, 악한 사람이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제비박이라는 은유적 장치로 통렬하게 풍자함으로써 민중의 아픔을 달래고 위로하고 다시 내일을 꿈꾸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아울러 흥부전은 인간의 내면에 담긴 욕망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윤리 의식과 공동체 의식이 없이 이기적 욕심 끝에 패망해가는 놀부를 바라보며 독자는 환상적 통쾌감을 누리게 된다. 반면 착하게 살아온 흥부 가족이지만, 분에 넘치는 물질적 부유함에 정신없이 좋아라 하는 모습과 흥부에게 찾아온 양귀비의 등장 등 흥부박 이후 벌어지는 흥부 가족의 욕망 양상은 흥부 가족 역시 희화적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흥부전의 서술자는 단일한 시선과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으며, 인간의 욕망이라는 본질적 요소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다. 욕망의 흐름에 따라 장면은 완성되고 이어지며, 독자들은 끊임없이 이야기 속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견주어보게 된다. 그 결과 독자의 내면에 잠재된 욕망들은 격식과 억압을 넘어서서 허구를 매개로 분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동성과 미완결성이 곧 흥부전 서술의 큰 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런 힘은 고정된 작품 구조가 아닌, 민중과 더불어 호흡을 함께하는 판소리계 소설이기에 얻어지는 결과라 할 수 있다. 후기 판소리 흥보가 또는 소설 흥부전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환상과 기괴는 축소되고, 현실 논리와 윤리적 측면이 강화된다. 패망한 놀부도 버려두지 않고 흥부를 내세워 포용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민중의식은 특정 상태에 머물지 않으며, 제반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모습을 바꾸는 비정형의 동적 존재를 지향한다. 결국 흥부전은 삭임을 지향하는 우리 민족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물질에 지배되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대동세계를 지향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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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02 16:55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 문학의 메카, 전북] ⑨ 춘향전, 최고의 고전소설 비결…한국적 한(恨)의 ‘삭임’ 미학

금 술잔의 아름다운 술은 만백성의 피요(金樽美酒千人血) / 옥쟁반의 맛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玉盤佳肴萬姓膏) /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燭淚落時民淚落) /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드높도다(歌聲高處怨聲高) 변학도 생일잔치에 암행어사인 이몽룡이 걸인 행색으로 들어와 슬며시 내보인 시다. 이 시는 <춘향전>이 우리나라 최고의 고전소설로 일컬어지는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통쾌한 작품이다. 춘향전은 우리 한국문학의 상징이요, 보물이다. 한 개인의 창작품이 아닌, 누대에 걸쳐 여러 설화들이 꿰어져 이루어진 구비문학이요, 민중들 사이에 판소리로 불리다가 정착된 적층문학이다. 그러기에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을 잘 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고, 이본(異本)만 해도 120여 종이니 이야기가 처음 만들어진 이후 살아 있는 문학으로서 민중의 사랑을 함뿍 받으며 정착된 작품이라 하겠다. 춘향전을 포함한 흥부전, 심청전, 별주부전 등의 판소리계 소설은 소설로 정착되기 이전에 판소리로 불리던 작품들이다. 춘향전을 살필 수 있는 가장 오랜 문헌이 1754년의 만화본 춘향가인데, 이는 한역(漢譯)으로 전해오고 있어 그 이전의 원(原) 춘향전은 현재 알 길이 없다. 수많은 이본 중 대표적인 것이 <남원고사>와 <열녀춘향수절가>이다. 남원고사는 1860년대 서울에서 필사된 것으로 경판본의 원류격이 되며, 가장 많이 읽히는 완판본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는 19세기 후반 전주에서 간행된 <별춘향전>의 계열로 나온 것이다. 남원고사의 춘향과 열녀춘향수절가의 춘향은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남원고사에서 춘향은 기생으로 나오고, 성격도 교만하며, 이중적이고 기회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반면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에서는 성참판의 서녀로서 여염집 처자로 나오고, 정숙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두 춘향의 신분과 성격이 이렇게 대조적으로 그려진 것은 당대 민중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 할 것이다. 서울 지역 양반층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남원고사에선 춘향이 비속하게 그려진 것이라 하겠고, 신분상승의 염원이 담긴 평민층 중심의 완판본에서는 춘향을 다소 미화하여 민중의 꿈을 담아낸 것이라 하겠다. 판소리 춘향가가 여러 이본의 소설 춘향전으로 거듭나면서 활발하게 읽히던 시기는 19세기로 추정되는데, 정조 이후의 19세기는 그야말로 세도정치, 삼정문란, 농민수탈 등으로 중세 통치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시기이다. 열녀춘향수절가는 그 표제부터 유교의 윤리적 가치를 중시한 작품으로 개작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1장에서 숙종대왕 즉위 초에 성덕이 넓으시사 성자성손은 계계승승하사로 시작되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한 조선 말기에 국태민안을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이 후대의 춘향전으로 갈수록 짙어진다. 춘향이 변학도에 저항하는 것도 결국은 국가적 질서가 바로 잡히길 원하는 백성들의 소망이 담긴 것이다. 판소리 열두 마당 중 다섯 마당만 전해오는데, 이 역시 당대의 민중들의 염원과 연결된다. 골계 위주의 판소리는 생명력을 잃게 되었고, 골계와 더불어 비장미가 조화를 이룬 판소리들이 당대 민중들에게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민중의 진정한 현실을 담는 리얼리티는 비장미와 더불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비장미는 근대적 자아의 소유자라 할 수 있는 춘향의 패배에서 비롯된다. 이몽룡과의 이별, 변학도에 의해 당하는 태형과 하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패배를 통해 춘향으로 대변되는 백성들의 한(恨)은 응집되며, 이는 비장미를 극대화하는 장치로서 작용한다. 오페라 춘향전 장면(2015년 오스트리아 빈) 춘향전은 판소리에서 나왔으되 판소리는 아니며, 정착이 이루어진 한 편의 소설이다. 춘향전의 원전에 가까운 것이 남원고사 계열의 경판본이냐, 별춘향전 계열의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냐를 떠나, 변형 가능한 춘향전으로서 평등사회를 꿈꾸는 민중의 뜻이 잘 담긴 것은 뒤에 간행된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에서 찾아진다고 할 수 있다. 춘향전은 이제 우리나라만의 고전이 아니라, 세계의 고전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세계의 화려한 무대 위에 춘향은 오페라의 한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 존재감을 당당하게 발휘하기도 한다. 춘향전이 이렇듯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과연 어떤 힘을 바탕으로 한 것일까. 대체로 소설은 결핍과 결핍 해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에는 강자와 약자의 대결 양상이 나타난다. 퇴기 월매와 성참판의 서녀로 태어난 춘향의 결핍 요소는 기생의 딸이라는 점이다. 미천한 신분이 양반 자제 이몽룡과 사랑을 이루고 마침내 정렬부인에까지 오르기에는 결핍 해소를 위한 춘향의 노력, 즉 근대적 자아 개념에 눈을 뜬 한 인간의 진실적 저항이 필요했다. 여기서 발견되는 게 한국적 한(恨)의 궤적이다. 젊음의 춘정과 신분상승 의지로 출발한 이몽룡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암행어사 이몽룡과의 재회까지의 사랑 이야기에는 한국적 한의 승화 과정이 놓여 있다. 평론가 천이두는 한국적 한은 다층적이며, 부정적 한이 긍정적 한으로 승화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한국적 한의 구조>에서 밝힌 바 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요소에는 다른 민족과는 다르게 우리 민족의 정체성으로서 복합적인 한(恨)의 양상이 나타난다. 부정적 한으로서의 원(怨)과 탄(嘆)이 삭임의 과정을 거쳐 원(願)과 정(情)으로 승화된다. 춘향의 첫 좌절은 이몽룡과의 이별에서 찾아진다, 이몽룡으로부터 이별의 말을 들었을 때 춘향은 왈칵 뛰어 달려들며 치맛자락도 와드득 좌르륵 찢어버리며, 머리도 와드득 쥐어뜯어 싹싹 비벼 도령님 앞에 던지면서 저항한다. 춘향의 공격적 한, 원(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약자의 한은 이내 퇴영적 탄식으로 바뀐다. 옥중 춘향의 탄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춘향 이야기의 극적 전개는 옥중의 꿈을 통해 시작된다. 황릉묘(黃陵廟)의 꿈이 그것이다. 옥중 꿈속에 춘향은 역대의 열녀들을 모신 사당 즉 황릉묘에 올라 그들의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듣고 용기를 얻는다. 이는 옥중에 갇혀 처참해진 춘향이의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신분상승 의지보다는 이몽룡을 향한 수절(또는 사랑)로 반전하는 극적 장치가 된다. 대체로 힘은 밖에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이루어진다. 그 내면 변화의 힘은 옥중에 걸인 행색으로 나타난 이몽룡과의 만남에서 표출된다. 출세한 이몽룡을 기다려왔는데 이몽룡은 초라한 걸인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때 춘향은 어머니 월매에게 유언으로 부탁한다. 금명간 죽을 년이 세간 두어 무엇 할까. 용장, 봉장, 빼닫이는 되는 대로 팔아다가 별찬 진지 대접하오. 나 죽은 후에라도 나 없다 마시고 날 본 듯이 섬기소서. 모든 기대가 일시에 무너졌음에도 춘향은 오히려 이몽룡을 염려하며 돌봐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한의 독소인 공격성[怨]과 퇴영성[嘆]을 초극하여 윤리적, 미학적 가치로 삭이고 발효시킨 것이다. 승화되어 다시 태어나는 옥중 춘향의 주체성은 천이두의 한국적 한의 내재적 지향성으로서의 이 삭임의 기능이야말로 이른바 한국적 한의 진정한 고유성이라 할 것이다.라는 말에서 그 해답이 찾아진다. 임방울 춘향가나 <옥중화>에서 춘향은 이몽룡에게 본관사또[변학도]마저 괄시하지 말라는 부탁까지 한다. 본관사또 아니고 보면 열녀 춘향이 어디서 나왔겠느냐고까지 말한다. 여기서 춘항의 한은 변학도를 용서하고 오히려 감사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게 곧 우리 민족 고유의 한의 세계요, 자타를 초월한 지고한 경지라 할 것이다. 춘향의 한은 우리 민중의 한을 대변한다. 여기에 춘향전이 민중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존재한다. 이 점이 곧 춘향전의 진정한 생명력이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역사적 산물로 이루어진 한(恨) 말고 우리 한민족 고유의 한사상이 존재한다. 한은 너와 나를 넘어선 것이며, 세계와 우주를 하나로 보는 단군 이래의 철학이다. 한은 하나이면서 전체이다. 그래서 반만 년 이상의 훨씬 전에 홍익인간이라는 통치이념이 나온 것이다. 밝음을 추구하는 근원적 저력이 내재하기에 우리 민족은 원망[怨]과 탄식[嘆]을 승화하여 소망[願]과 정한[情]의 세계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춘향전이 민족적 고전성을 인정받고 아울러 세계의 고전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삭임이라는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에서 나왔던 것이다.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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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18 17:51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 문학의 메카, 전북] ⑧ 고창의 아전 ‘동리 신재효’, 전북을 판소리 본향으로 만들어

신재효 초상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이며, 유네스코 지정 인류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와 카네기 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이제 낯설지 않다. 음악인들의 꿈의 무대인 카네기 홀에서 우리 판소리가 신명나게 울려 퍼지고, 모든 청중들로부터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기사도 익숙하게 다가온다. 가장 한국적인 판소리가 세계 음악의 정점에 올라서고 각광을 받게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현실로 이뤄졌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다. 신재효는 어떤 이유로 판소리에 빠져들고,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창작하게 되었을까. 판소리에 대한 최초의 문헌이 1754년의 만화본 『춘향전』인데, 이는 한역본이므로 판소리의 발생 시기는 아마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 단군 이래 우리 한민족에게는 고유의 신앙이 내려온다. 무속신앙이다. 무속의 한 형태로 무당굿은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굿할 때 무당이 하는 소리가 무가(巫歌)다. 그런데 이 무가는 신(神)을 향한 기원의 소리이다. 수천 년 이상의 긴 세월 불리던 무가가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초 소리에 능한 창조적인 소리꾼에 의해 판소리가 탄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미난 이야기들이 이제 신이 아닌 민중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거듭난 것이다. 신재효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시조시인 조운(1900-1948?)이 1929년 『신생』 1,2호에 신재효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이후 초기 국문학자들의 거론이 있었고, 신재효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의 가사를 수집한 학자가 가람 이병기(1891-1968) 시조시인이다. 가람은 오랜 기간 신재효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서지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국문학사에서 신재효의 위상을 확실하게 부여하였다. 가람은 신재효 연구의 초석을 다진 분이라 할 수 있다. 본(本)이 평산인 신재효의 조상들은 경기도 고양에 살았다. 그의 부친은 신광흡으로 서울에서 직장(直長)을 지내다 전라도 고창현의 경주인(京主人)이 되었다. 경주인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향리 등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 비용을 지방관아에 청구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인연으로 하여 그는 고창으로 내려와 관약방을 운영하였으니 어느 정도 재산을 가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재효가 천석의 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부친의 기본 재산에 영향을 받은 바 있겠으나, 동리 자신의 몸에 밴 근검절약의 습관과 재산을 늘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중인 출신인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기에 관직으로 나가는 일을 하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데 힘썼다. 신재효가 창작한 사설 치산가에는 부를 축적하는 데 그가 어떻게 실천하였고, 합리적 경영을 하였는가를 알게 한다. 재산 형성에 성공한 동리는 1876년의 큰 흉년에 가산을 풀어 백성들을 구했고, 1877년에는 경복궁 재건에 큰돈을 희사하였다. 이런 일 등으로 하여 그는 가선대부, 통정대부, 절충장군, 호조참판,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그러나 이런 관직은 명목상일 뿐 실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직(實職)은 아니었다. 그는 첫째, 둘째 부인을 일찍 사별하였고, 나이 차가 큰 셋째 부인도 동리의 나이 57세에 사별하여 말년 15년을 외롭게 보냈다. 행복보다는 오히려 불행이 한 인간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중인으로서의 한계에다 가정적 불행이 겹쳐 동리는 더욱 판소리에 힘을 쏟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재효의 이속(吏屬) 생활은 3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까지 20년 동안인데, 동리가 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방을 맡은 1852년(41세) 무렵으로 보고 있다. 이방이 된 이 무렵에 각종 연회를 주선하고, 판소리 창자 및 가객과 기녀, 예능인들과 자주 접촉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후 그가 호장(戶長)도 그만두고 판소리에 몰두한 것은 경제적 안정 이외에 소리예술을 통해 자신이 뜻하는 바를 실현하겠다는 나름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여겨진다. 그가 향리의 소임을 수행하는 과정에 판소리를 감상할 기회가 많았다는 점, 판소리를 즐길 요호부민(饒戶富民) 층이 형성된 시대적 배경 등이 판소리 전문가 신재효를 탄생시킨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왕족과 양반 사대부들이 판소리의 주요 향유층을 형성하게 된 18세기의 흐름 속에서, 고창의 토착 세력도 아닌 아전 출신의 신재효로 하여금 사대부 이상의 우월적 자부심을 가능하게 한 것이 판소리였다는 점도 그의 시도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1865년 53세가 되기 이전에 자신의 거처에 부용헌을 짓고 이곳에서 시 모임을 가졌다. 판소리 감상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이고, 부용헌은 속(俗)을 포섭하는 동시에 속을 초월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판소리에 몰입한 그가 한 일은 당시 불리던 판소리 열두 마당 중 여섯 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가루지기타령)을 정리, 개작한 일과 호남가, 광대가 등 15수 이상의 새로운 사설을 다수 창작한 일, 많은 판소리 제자들을 길러낸 일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판소리 역사에서 신재효가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앞뒤 맥락이 일관되지 않았던 판소리 사설을 합리적 내용으로 정리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사대부 층으로 확대된 판소리 향유자의 취향을 고려한 결과다. 그의 개작 판소리가 판소리 창자들에게 많이 불리진 않았으나, 구전되던 판소리 사설의 정리는 판소리계 소설의 출판을 활발하게 하고, 판소리 향유층의 확대에 기여했다. 신재효가 정리한 여섯 마당의 공통점은 소외된 민중들의 욕구 충족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전으로 진입할 무렵에는 신분상승의 의지도 있었을 것이고, 명목상 양반층에 진입했다 해도, 그는 엄연한 중인 출신이다. 18세기 흔들리는 신분제도 속에서 그가 진정 표출하고자 한 것은 해학과 골계를 통해 양반층을 풍자하고 민중의 한을 대변하는 일이었다. 신재효의 판소리 개작은 치밀하고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가창 능력 및 성별에 따라 춘향가를 동창춘향가, 남창춘향가, 여창춘향가로 분리하여 개작하였다. 발흥기를 지나 판소리가 고제,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 등으로 분화하는 판소리의 역동적 확장기에 신재효는 판소리의 역사적 소임을 실행한 것이다. 판소리에 대한 신재효의 안목이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최초로 여성 창자를 발굴하여 교육시킨 일이다. 당대에 이는 판소리계의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지방 관기를 주로 하여 많은 여성 제자를 키워냈고, 이후 판소리의 문화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신재효가 키워낸 판소리 최초의 여창은 진채선(陳彩仙)이다. 기량이 탁월한 그를 발굴, 양성하여 1867년 경복궁 낙성연에 보냈고, 판소리를 좋아하던 흥선대원군은 진채선의 기예에 반하여 그를 애첩으로 삼았다. 한양 땅에 올라가 돌아오지 않는 제자 진채선을 그리워한 동리는 짧은 판소리 사설 도리화가(桃李花歌)를 불러 그리움을 달랬다. 소설가 문순태는 이를 토대로 2015년에 장편소설 『도리화가』를 냈고, 같은 해에 이들 삼각관계를 극적으로 재구성하여 영화 도리화가(이종필 감독)가 상영되었다. 아쉽게도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이론은 전해오지 않으나, 다행히 그가 지은 판소리 단가 광대가를 통해 판소리 전문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다소 알게 한다. 창을 하는 광대가 갖춰야 할 네 가지 요소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말하였다. 너름새를 통해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예술적 역할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판소리 교육생들을 숙식시키며 집단교육을 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런 정도면 한량 중에 멋 알기는 고창 신호장(申戶長)이 날개라.라는 당대의 평이 충분히 이해된다. 제자 진채선을 그리며 지은 동리의 사설 도리화가의 일부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진채선이 노래한 추풍감별곡 일부를 감상한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구경 가세 구경 가세 도리화 구경 가세 채색으로 옷을 하고 신선되어 우화(羽化)하니 아름다운 이름 뜻이 생각하니 더욱 좋다.(도리화가), 은하작교(銀河鵲僑) 끊겼으니 건너갈 길 아득하다. 인정이 끊겼거든 차라리 잊히거나. 아름다운 자태 거동 이목에 매양 있어 못 보아 병이 되고 못 잊어 한이로다. 천수만한(千愁萬恨) 가득한데 끝끝이 느끼워라.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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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8 17:07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 문학의 메카, 전북] ⑦ 김삼의당의 시 다시 알기 : 남원 출생, 진안으로 이주한 김삼의당 … 조선후기 여류문학의 꽃 피우다

김삼의당(金三宜堂, 1769-1823)은 10월 13일 남원의 서봉방(교룡산 서남 기슭)에서 연산군 때 학자 김해김씨 탁영 김일손의 후손 김인혁의 딸로 태어났다. 쇠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김삼의당은 『삼의당 김부인 유고』 「자서(自序)」에서 일찍이 언문으로 소학을 배웠으며, 미루어 문자를 통하고 제가(諸家)를 간략하게 섭렵하였다.고 밝혔으니, 중국의 시문집을 비롯하여 경서와 사기를 두루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에 삼의당은 태어난 연월일이 동일한 같은 마을의 담락당(湛樂堂) 하립(河)(1769-1830)과 결혼했다. 하립은 세종조 영의정을 지낸 진양하씨 경재 하연의 12대손이다. 기이한 인연에 두 집안 모두 쇠락한 사대부 집안이었으니, 둘은 누가 봐도 천생배필이었다. 혼례를 치른 밤 담락당이 한시 두 수를 읊었고, 삼의당 역시 두 수를 지어 화답하였다. 그들의 신혼 시 한 수씩만 들어본다. 우리 모두 광한전 신선으로 만나(相逢俱足廣寒仙) / 오늘 밤 분명 전생 인연 잇는구나.(今夜分明續舊緣) / 우리 만남 원래 하늘이 정해준 것이니(配合元來天所定) / 속세의 중매는 그저 꾸며진 일이라오.(世間媒妁摠粉然)(담락당) 열여덟 선랑과 열여덟 선녀(十八仙郞十八仙) / 신방에 화촉 밝히니 우리 인연 좋아라.(洞房華燭好因緣) / 같은 해 같은 달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았으니(生同年月居同閈) / 오늘 밤 우리 만남 어찌 우연이겠습니까.(此夜相逢豈偶然)(삼의당) 김삼의당은 가난의 시련 속에서도 담락당을 향한 다수의 연정시를 남겼고, 유학을 바탕으로 한 생활시, 초연한 자연친화의 시를 통해 조선후기 여류문학의 꽃을 피워 올렸다. 삼의당은 250여 수의 시 외에도 20여 편의 산문을 남겼다. 그의 시는 필사본과 간행본으로 전해오는데, 간행본은 나중 것으로 자의적 편집이 많이 이루어져 훼손이 심해졌다. 필사본 역시 정본 자체를 필사한 게 아니고 간행본보다는 훼손이 덜 되었다. 담락당은 부인에게 삼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주었다. 삼의당이 거처하는 집 정원에 군자를 상징하는 대나무, 소나무 등을 심어 평생 충효의 뜻 속에 살아갈 여인임을 시로 읊었고, 삼의당도 담락당 형제들의 효제와 충의가 가득하다고 응수하여 신의에 찬 부부임을 과시하였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였으나, 담락당 오형제들은 모두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한시 창작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혼례 후 삼의당이 이루고자 한 가장 큰 일은 남편의 과거급제였다. 당시 담락당은 누가 봐도 준수한 인물이었고, 몰락한 양반가를 다시 일으킬 인물로 여겼다. 20세에 남편의 등과를 위해 서울로 보낸다. 그 결과 삼의당 부부는 떨어져 지내는 기간이 길었고, 삼의당은 남편의 영달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칼을 자르고 비녀를 팔아 남편의 생활 자금을 마련하는 등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독수공방의 긴 세월 삼의당은 시를 읊으며 삶을 추스린다. 인적 없는 사창에 날은 저물고 / 꽃은 떨어져 가득한데 문은 닫혀 있네. / 하룻밤 상사의 고통 알고 싶다면 / 비단이불 걷어놓고 눈물 자욱 살펴보오. 감정이 고조된 시 외에도 정밀감이 높으면서 규방의 한을 형상화한 작품도 보여준다. 맑은 밤에 물을 길러 갔더니 / 밝은 달이 우물 속에서 떠오르네. / 말없이 난간에 서 있으니 / 바람에 흔들리는 오동잎 그림자 물을 길러 갔다가 우물 속의 달이 임의 얼굴로 보이고, 흔들리는 오동잎 그림자를 또 다시 임인 양 착각하는 상사의 마음이 깊은 울림으로 전해온다. 십여 년의 공부에도 등과를 못하자 1801년 담락당은 삼의당에게 진안 마령 방화리로 거처를 옮겨 농사짓자는 제안을 하게 되고, 삼의당은 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그는 남편과 더불어 농사짓는 평범한 아낙의 삶을 영위한다. 입신양명의 꿈을 내려놓으니 그들 부부의 진면목은 오히려 평범함 속에서 꽃을 피운다. 삼의당은 농사에 부지런하면서도 전원생활을 무척 즐겼다. 나란히 선 초가집들 마을을 이루었는데 / 뽕밭 삼밭엔 가랑비 내리고 문은 닫혔네. / 마을 앞 복사꽃 흐르는 물에 떠가니 / 이 몸이 마치 무릉도원에 있는 것 같네. 마이산이 멀리 보이는 땅에 삶의 터를 잡은 담락당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다. 한양에서 공부하면서 8년 동안 일만여 권의 장서가이면서 순조 때 영의정,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두실심상규의 집에서 유숙했기에 학문적으로 박학다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진안으로 옮겨온 뒤에도 그는 시험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42세가 되어서야 향시(鄕試)에 붙었고 다시 회시(會試)를 보러 한양으로 가지만, 결국 낙방했다. 그의 『담락당집』에는 다수의 시문이 실려 있고, 시의 대부분은 낙향해서 달관한 태도로 자연을 즐기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그들 부부가 주고받은 시를 통해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확인된다. 초당의 사면 풍연(風煙)이 좋으니 / 인생 말년에 시서(詩書) 읽으며 천성을 즐기노라. / 어찌 구구하게 하고 싶은 것 구하리오. / 이 한 몸 편하게 거처하니 신선이 따로 없네.(담락당) 노을빛은 비단을 이루고 버들은 연기 같으니 / 이곳은 인간세상이 아니고 별천지라네. / 서울에서 십 년 동안 분주했던 나그네 / 오늘은 초당에서 신선처럼 앉아 있네.(삼의당) 담락당 시의 각운 煙, 天, 仙에 차운하여 삼의당이 화답하였다. 자그마한 땅을 일구며 마음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자의 일상적 안분지족이 바로 별천지 삶이라는 것을 주고받고 있으니, 자고로 우리 땅에서 인고의 세월을 시로 달래며 극복하고 나아가 달관의 경지에 도달한 부부 시인이 어디 있었던가. 정우봉은 삼의당의 한문 산문을 삼엄(森嚴), 비측(悲惻), 한아(閑雅)의 세 풍격으로 구분했다. 세 가지 예를 간단히 살펴본다. 삼의당이 쓴 예성야기화(禮成夜記話)에는 혼례를 올린 날 밤 담락당과 나눈 대화가 전해온다. 삼의당이 화답시로 종신토록 낭군의 뜻 어기지 않으리. 하고 읊은 뒤의 대화다. 담락당이 종신토록 낭군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남편에게 과오가 있더라도 따라야 합니까.라고 하였을 때 삼의당은 말한다. 부부의 도는 오륜을 겸합니다. 아버지에게는 간언하는 아들이 있고 제가 남편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남편의 과오를 따르는 것이라는 말이겠습니까. 삼의당은 상호 존중과 대화, 논쟁과 비판을 통해 상대의 과오를 지적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도덕규범을 주장하였다. 여성으로서의 주체의식이 분명하였고, 그 근본에는 남녀평등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페미니즘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진양하씨오효자전에서 삼의당을 평하기를 허난설헌과 이옥봉이라도 이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의리처에 있어서는 글의 기운이 삼엄하였으니 실로 사내라도 미치기 어려운 바가 있었다.고 하였다. 돌도 되기 전 셋째 딸이 죽었을 때 27세 삼의당은 오래 살면서 착하지 못한 것보다는 일찍 죽는 것이 더 낫다. 나는 네가 죽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슬픔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반어법을 사용한 이 표현은 글 전체를 관통하면서 화자의 슬픔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또한 진안으로 거처를 옮긴 후 담락당이 남원의 옛집을 방문할 때는 교룡산 아래는 우리 옛집입니다. 아아, 이제는 다시 얻을 수 없으니, 당신이 저를 대신해 이러한 풍경들을 묘사하여 하나하나 내 책상 위에다 불어오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부탁한다. 이렇듯 삼의당은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까지 풍부한 성과를 남겼다. 시로써 마음을 수양하며 살아온 삼의당은 군자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비애감을 유교의 성리를 바탕으로 한 실존적 자각과 시 창작을 통해 극복하였고, 마침내 달관적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평범한 시골 아낙 김삼의당은 일상 속에서 유가(儒家)의 진정한 세계를 시화(詩化)한 탁월한 여류시인이었다. 진안군 백운면 원덕마을에 고이 누워 있는 삼의당 부부를 위하여 시 한 편 읊는다. 많은 비 내린 삼월이라 / 앞 시내에 비로소 물이 흐르네. / 언덕의 꽃들은 나비를 불러오고 / 물가의 버들은 꾀꼬리를 품었어라.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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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13 15:57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⑥ 신경준의 시 다시 알기

누가 장자 앞에서 곤새와 붕새를 말하는가. / 떠벌리기 좋아하는 기이한 글은 말세의 것이라네. / 우리가 어찌 곤충 같은 사소한 것들을 읊는가. / 한번 읊고 한번 웃어 봄잠을 깨려고 한 것일세. 신경준이 69세(1780) 때 아홉 종의 곤충을 소재로 하여 지은 시 소충십장의 마지막 작품 총음이다. 연작시를 쓴 뒤 총괄하여 정리한 작품이다. 미물에도 삶의 이치와 깨달음이 담겨 있음을 은근하면서도 통쾌하게 표현하였다. 전북 순창 출신의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박학지재의 실학사상가로서 국사, 국어, 국토지리와 관련된 수많은 저술활동을 한 발군의 학자였으며, 이교구류(二敎九流)의 회통사상에도 능통했다. 그는 상월선사시집 서문에서 북이나 비파 등이 오음을 내는 것은 그 중심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30세 이전에 지은 『소사문답(素沙問答)』에 대하여 평생지기 홍양호는 사물을 관찰한 후에 깨달은 이치를 적은 글, 남희채는 우주 간에 드문 문자라 하였고, 민태훈은 장자(莊子)와 양주(楊朱)를 다시 살려낸다 해도 반드시 자신들보다 여암이 낫다고 할 것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신경준은 신숙주의 동생 귀래(歸來) 신말주의 10대손이다. 신말주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형 신숙주와 달리 이에 협조하지 않고 충절을 지켜 설씨(薛氏) 부인의 고향 순창으로 내려와 귀래정을 짓고 거주하였다. 친조부의 영향으로 8세 때 공부하러 상경했다가 9세 때 스승을 따라 강화도에서 3년간 수학했다. 당시 강화도는 양명학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12세 때 순창에 돌아온 이후 15년 동안 고향에 거주하였고, 18세 무렵까지 주로 고체시와 당시(唐詩)를 배우고 즐겨 지었다. 20세 이후에도 거주지는 순창이었으나 집안의 상(喪) 등의 일로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게 된다. 23세 때 온양에 머물다가 시에 대한 한 소년의 질문을 받고 『시칙(詩則)』을 저술하였다. 33세 때 순창으로 돌아온 그는 10년 동안 고향에 머물다가, 늦은 나이인 43세(1754년) 때 호남좌도 증광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 서울에서 치러진 증광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서게 된다. 병자, 정묘 양란 이후 조선은 국가의 총체적 후유증을 극복해야 하는 혼란상이 계속되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과 요청 속에서 나타난 것이 실학이다. 실학은 성리학의 병폐를 극복하고 유학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실용주의 학문이다. 신경준이 평생 일군 업적을 요약한다면 백성을 위한 돌봄의 학문이었다. 그는 개방적 태도를 유지하였고, 평생 위민철학의 실천가로서 면모를 보여 주었다. 10대 초반의 어린 시절 접한 양명학은 그를 인간 중심의 인물로 키워내는 데 기여를 했으리라 여겨진다. 위민철학을 익히고 18세기의 실학적 흐름을 견지한 신경준, 그는 주변의 사소한 일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일상 속에서 사리연구하기를 좋아하였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고 머물면서 현장의 식물과 곤충에까지 많은 연구를 하였다. 지역 왕래가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도로, 지리 등으로 연구 대상이 확대되었고, 그의 실학적 경향은 국어, 국사뿐 아니라 수레, 의술, 병법, 천문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까지 확장되었고 많은 업적을 남긴다. 근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시의 성음, 구성, 본질, 창작 기법 등을 밝힌 본격적인 문학 이론서는 거의 전해온 바 없었다. 그것은 우리말이 아닌 한자로 짓는 한시이기에 중국의 이론서에 의지할 뿐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3세의 신경준이 짧은 기간에 시의 이론서 『시칙』을 저술한 것도 실학자적 태도에서 나오게 된 것이라 하겠다. 시에 대하여 묻는 학동에게 한시의 원리와 작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의도 자체가 실학적 실천의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칙』은 중국 원나라 양재가 지은 『시법원류』와 윤춘년의 『시법원류체의성삼자주해』를 저본으로 하였으나, 여기에 자신의 의도를 추가 반영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 이론서를 내놓은 신경준의 실천은 다소 늦었으나 우리 문학사에 새 이정표를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시칙』의 가장 큰 특징은 구성이 체계적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의 강령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의 소재와 방법을 제시하였고, 시중필례(詩中筆例)와 시작법총(詩作法總), 풍격론, 시의 요체인 대요(大要), 시의 형체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중필례 14가지 기법 중 공원지례(攻原之例) 일부를 인용한다. 이를 테면 남이 주는 옷이나 음식을 받을 적에 먼저 추워서 떠는 모습과 굶주리는 괴로움을 충분히 말한 뒤에 그 받은 것을 말하면 굳이 감사하다는 글자를 쓰지 않아도 감사하다는 뜻이 절로 다 나타나게 된다. 이는 감사하다는 뜻을 전달함에 감사하다는 말을 쓰지 않고 우회적으로 제시해야 문학적 감동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시의 은유와 상징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시작법총 여섯 가지 중 여섯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얽어맨 흔적이 없어야 한다. 상하사방이 쾌활하고 알맞게 되어 조금도 하자가 없어서 마치 도끼나 칼을 대지 않고 만들어진 것처럼 된 뒤에야 시라고 할 만하다. 다음은 시의 대요(大要)인 사무사(思無邪)의 끝부분이다. 지금 시를 하는 자는 기습(氣習)이 오만하고 위의가 방탕하여 스스로 시인은 정말 이러하다고 생각한다. 아, 시는 성정을 기르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성정을 방탕하게 하는가. 다른 시 이론서를 참고로 하여 저술한 것이나, 신경준의 『시칙』은 독창성을 지닌다. 『시칙』의 가장 큰 특징으로 구성의 체계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다섯 개의 도해가 나오는데, 시의 설명에 앞서 도해를 제시함으로써 설명을 합리적으로 전달한다. 둘째, 창작론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독자성과 서정성이었으며, 옛 사람의 시를 통해 방법을 터득하고 자연스러움의 경지에 들어서야 함을 강조한다. 셋째, 그는 과거 사람의 태도를 답습하지 않고 실질을 추구하는 실용성을 보여준다. 그의 『여암집』과 『여암유고』에는 66제 154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고체시(古體詩) 창작을 선호하였고, 당시(唐詩)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송시(宋詩) 풍의 시를 많이 남겼다. 고체시는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그의 개방적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겠고, 취향과 다르게 송시(宋詩) 풍으로 다수 창작한 경향성 역시 감흥보다 사물의 이치를 중시하는 실학적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라 하겠다. 백성들의 삶과 지방의 풍속을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 그는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목민관이었고 학자였음을 보여준다. 상대주의적, 평등주의적 시각으로 채소와 곤충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형상화하는 데서 실학자 문인으로서의 면모를 그는 여실히 보여주었다. 신경준이 1765년 황해도 장연현의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영조 임금에게 민은시(民隱詩) 10수를 지어 올렸고, 영조로부터 잘 지었다[善作]는 평가를 받았다. 다음은 민은시의 한 편인 습상(拾橡)의 일부이다. 아아, 근래 몇 년간 / 비와 볕이 고르지 않아 / 기장 밭이 황폐해졌는데 / 율무 밭에서는 / 무엇을 수확하랴. / 나는 처자식과 함께 / 산골짜기에서 / 도토리를 주워 모아 / 큰 그릇에 가득 채웠다네. / / 숲속 깊이 들어가려해도 못하는 것은 / 호랑이 표범 흔적 있어서라네. / 어찌 지금 같은 일이 계속 되랴. / 내년에는 풍년 들겠지. / 눈이 한 자 높이로 쌓였으니 / 납일 전에 눈이 세 번 내렸다네. 고달프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도토리를 소재로 하여 사실적으로 구체화하였고,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기를 바라는 목민관의 낙관적 기대가 눈을 통해 잘 형상화되어 있다. 다음은 첨학정십경 중 두 번째 작품 능실빙수(凌室氷水)이다. 쪽빛처럼 푸르던 색이 백옥같이 변하니 / 조화옹이 갑자기 바꿔놓은 것이라네. / 겨울에 저장했다 봄에 내보내니 / 성인이 절도(節度)를 생각한 것이라네. 얼음을 저장하는 능실을 소재로 한 시다. 사물의 현상을 관찰하고 궁구한 결과물로 이용후생 외 삶의 이치까지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평생 업적은 지금도 많은 분야에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지행합일의 이론가요, 실학사상 실천가였으며,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손을 내미는 덕이 높은 시인이 되었다.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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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31 17:03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⑤ 이매창의 시 다시 알기

매창공원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은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의 딸로 계유년에 태어나서 계생이라고 불렸고, 기생이 된 뒤에는 계랑으로 불렸다. 본명은 향금(香今), 자호는 매창(梅窓), 자는 천향(天香)이다. 조선조의 3대 여류시인을 꼽는다면 허난설헌(1563-1589), 황진이, 이매창을 든다. 서경덕(1489-1546),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컬어 송도삼절이라 하는 데 견주어, 신석정 시인은 촌은 유희경(1545-1636), 이매창, 직소폭포를 부안삼절이라 칭한 바 있다. 이매창은 현실 비애의 감성적 시인이었다. 그녀는 기생의 딸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으나, 결코 기생의 삶을 살지 않았다. 매창이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한 문사로는 유희경, 허균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 매창의 수백 편 작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으나, 후에 아전들이 외우던 50여 편의 시를 개암사에서 간행하였으니, 다행이다. 어떤 선비가 구애시를 지어 허튼 수작을 보이자 매창은 다음 시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 선비는 무안해 하며 가버렸다. 평생 떠돌며 밥 얻어먹는 것 부끄럽게 여겨 / 달빛 어리는 매화만 사랑했어라. / 사람들은 내 그윽한 뜻 알지 못하고 / 손가락질하며 오가는 사람들 잘못 알고 있어라.(愁思) 사대부 중심의 권위적 사회에서 기생의 수절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창은 한 남자를 그리며 수절하였다. 수절의 대상은 촌은 유희경(1545-1636)이었다. 유희경은 천민이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소문이 났고, 그 결과 서경덕의 제자인 남언경에 발탁되어 예학을 배우게 된다. 상례(喪禮)의 전문가가 된 그는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많은 상(喪)에 초빙되었다. 예학에 밝은 유희경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발발 일 년 전인 1591년, 촌은은 부안으로 놀러갔다가 이매창을 만나 비로소 파계한다. 매창 역시 문장가로 소문난 촌은의 아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매창은 18세, 유희경은 46세, 28세 연상이다. 신분상 더욱 친근감을 느꼈을까. 그들에게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찍이 남국의 계랑 이름 소문나(曾聞南國癸娘名) / 글 솜씨 한양까지 울리더라.(詩韻歌詞動洛城) / 오늘에야 참모습 마주하고 보니(今日相看眞面目) / 마치 선녀가 선계에서 내려온 듯하구나.(却疑神女下三淸)[贈癸娘] 촌은이 매창을 처음 만나고 감탄하며 지은 시다. 깊은 정을 나누고 헤어진 후 둘은 다수의 연정시를 창작한다. 그대 집은 낭주에 있고 / 나는 서울에 살고 있으니 /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 오동나무 비 뿌릴 제 창자 끊기네.(懷癸娘) 여기서 오동나무는 이매창의 상징으로서 거문고를 의미한다. 어디에서든 거문고 소리만 들으면 매창이 생각나고 창자가 끊어질 듯 그리움이 사무친다는 내용이다. 다음은 유희경을 그리는 매창의 시다. 나에겐 옛 진나라 거문고가 있어 / 한번 타면 백 가지 감흥이 일어납니다. / 세상에 이 곡조 아는 이 없고 / 멀리 구산(緱山)의 젓대소리에 맞춰 봅니다.(贈別) 여기서 구산의 젓대소리는 유희경을 상징한다. 둘이 재회하기까지는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간다. 서울로 올라간 유희경은 상례의 전문가로 나라의 중요한 상(喪)들을 처리하였을 것이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아 유성룡을 도왔다. 그런 공로로 유희경은 전쟁이 끝난 뒤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이매창의 묘(전라북도기념물 제65호) 유희경 외에 매창의 시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허균(1569-1618)이다. 처음 만난 1601년, 당시 허균은 32세, 이매창은 28세였다. 허균은 적서의 차별 등 사회제도의 모순을 타파하려 한 혁신적 정치가요 문장가였다. 평소 자유분방하여 많은 기생과 어울려온 그였지만, 매창과는 매창의 타계 시까지 10년 동안 정신적 관계로만 교류했다. 허균이 매창을 만날 당시, 매창은 김제군수 이귀(1557-1633)의 정인(情人)으로 알려져 그랬는지 슬기롭게 육체관계는 피했다. 허균은 조관기행에 매창과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축년 7월에 부안에 이르러 비가 쏟아졌다. 매창이 거문고를 끼고 시를 읊는데, 인물은 비록 뛰어나지 않았으나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하루 종일 술을 마시며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조카를 침실로 들여보냈는데 혐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32세 허균과 28세 매창은 첫 만남에 호감을 가졌으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걸림 없이 행동하던 허균이었지만 매창을 시 벗으로 여기며 교류한 것이다. 그건 매창의 높은 절의와 뛰어난 재능 때문이었을 것이고, 불우하게 요절한 천재 시인이요 자기 누이였던 허난설헌을 떠올리며 매창을 각별한 존재로 여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균의 다음 편지에는 상사의 고통 속에 피폐하게 살아가는 매창을 염려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날 당시에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십년 동안이나 이어질 수가 있었겠소.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또한 다음 시에는 오로지 유희경만을 그리워하다 조롱 속의 학이 된, 이미 병을 얻어 쇠약해가는 매창의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짝도 없이 야윈 몸으로 시름겹게 서 있으니 / 황혼녘 갈가마귀는 숲 가득 지저귀네. / 긴 털 병든 날개 죽음을 재촉하니 / 슬피 울며 해마다 깊은 못을 그리워하네.(籠鶴) 고단한 삶의 끝에 이미 죽음을 내다보고 있다. 다음 시 역시 그 애절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병들어 빈 방에서 본분 지키며 / 가난과 추위 속에 사십 년일세. /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 가슴속에 시름 맺혀 옷 적시지 않은 날 없네.(病中愁思) 이후 매창과 유희경의 극적 해후가 이루어지나, 35세의 매창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얻은 때였다. 1607년, 63세의 노인이 된 유희경은 당상관이 되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 열흘 머물며 다음 시를 쓴다. 내가 꽃향기를 찾아옴만 아니라 / 열흘간 만나 시 읊자던 말 따르는 것이라오.(重逢癸娘 일부) 여기에는 옛날의 운우지정을 되살리려는 만남만이 아니라 오직 시를 논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딴전을 피우는 촌은의 속내도 엿보인다. 이후 기약 없는 이별을 하였고, 3년 후 38세의 매창은 생을 마감한다. 선조의 승하로 국상(國喪) 준비 등으로 바빠 병문안도 하지 못했던 촌은은 매창이 이승을 떠나고 3년이 지난 뒤에야 부안으로 내려와 그녀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였다. 향기로운 넋 홀연 흰 구름 타고 가니 /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 배나무 정원에 노래 한 곡 남아 있으니 /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悼玉眞) 여기서 옥진은 양귀비를 말하는바, 양귀비에 빗대어 매창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매창 시는 오로지 한 남자를 애타게 그리는 연정의 시에서 그치지 않는다. 말년의 시에서 그는 임의 부재에서 오는 현실세계의 아픔을 내세 또는 이상세계로 확장하여 사랑의 완성 단계로 승화시킨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현실을 매창은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허균의 평소 충고대로 불가(佛家)의 세계 또는 선계(仙界)를 찾아 나선다. 다음은 장시(長詩) 선유(仙遊)와 등월명암(登月明庵)의 끝부분이다. 술잔을 들고 연달아 주고받지만(臨盃還脈脈) / 날 밝으면 각기 하늘 끝에 가 있으리.(明日各天涯),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客心怳若登兜率) / 황정경을 읽고 나서 적송자[신선]를 뵈오리라.(讀破黃庭禮赤松) 매창은 이미 현실을 초월하여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지고지순한 매창의 연가. 여든이 넘은 촌은의 다음 시가 있기에 매창은 더욱 편안히 잠들 수 있으리라. 매화를 마주하며 읊조리는 것으로 만족하나니(獨對寒梅吟詠足) / 이 늙은이 머물 곳으로 이곳이 마땅하리.(老夫棲息此中宜)[雪中賞梅 일부] 긴 세월 수절하며 자존감을 지킨 매창의 시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길이 빛을 발할 것이다. 매창의 창작으로 확실하게 고증된 시조로는 아쉽게도 한 편만 전해오고 있으나 심금을 울리는 절창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괘라.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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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17 17:25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④ 만복사저포기 다시 알기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자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는 불우한 시대를 만난 천재적 작가 김시습의 내면이 함뿍 담겨 있다.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이 일제의 아픔 속에서 태어났듯이, 『금오신화』 역시 세조의 정변이라는 시대의 아픔 속에서 태어났다. 만해가 설악산 오세암에서 김시습의 『십현담요해』를 읽고 큰 감회를 느껴 1925년 『십현담주해』를 저술하였고, 저술 이후 바로 이어 자신의 『십현담주해』를 기초로 하여 『님의 침묵』을 창작한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참 비상한 일이요, 축복이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신동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많은 일화를 남긴다. 당시 정승 허조까지 누추한 김시습의 집에 찾아와 재주를 시험하였다. 김시습이 5세 때, 허조가 나는 이미 늙었으니 老를 가지고 시를 지어보라. 하니, 시습은 곧 老木開花心不老(노목에도 꽃이 피어나고 마음은 늙지 않는다)라 하였다. 허 정승은 참으로 신동이라 하며 경탄하였다. 이런 사실들이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어린 김시습은 승정원에 들어가 그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세종은 이를 인정하고 장차 크게 쓰리라 하며 비단 오십 필을 하사하였다. 문화부흥을 크게 일군 임금답게 세종은 시정에 묻힌 김시습을 발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뜻을 새기고 붕정만리의 꿈을 키우며 살아가던 매월당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온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다. 김시습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전국을 유랑하게 된다. 인간은 어떤 형태의 삶이든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반영하게 된다. 극복할 수 없는 외부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힘은 내면에서 나온다. 직설적으로 표출될 수 없는 내면의식이 은유와 상징의 옷을 입고 나타나면 문학이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는 그렇게 탄생하였다.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 다섯 편의 소설로 이루어졌다. 이는 고금의 괴담과 기문을 엮은 명나라 구우의 단편소설집 『전등신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괴담, 기문의 소설을 전기(傳奇)소설이라 칭한다. 금오신화는 매우 체계적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시대적 혼란 속에 겪는 남녀애정 이야기이고, 취유부벽정기는 역사의 전통성이 단절된 시대의 절망과 울분을 담고 있어 다음 두 작품으로 이어지는 교량역할을 한다. 남염부주지는 우의적인 다른 작품에 비해 덕망이 없는 사람이 권력으로 왕위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와 같은 직설적 대화 내용으로 전개된다. 즉 나라를 다스리는 바른 이치를 회복해야 함을 역설한 작품이다. 용궁부연록은 용왕의 초대를 받은 한생이 용궁 잔치에 참여하여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하고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이는 대단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 뜻을 펼칠 수 없었던 김시습이 소설에서나마 마음껏 경륜을 떨치고 꿈을 실현하는 원망충족의 작품이다. 이처럼 금오신화의 다섯 편은 기승전결의 체계적 순서로 짜여 있으며, 당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울분과 삭임, 포부, 나아가 후세에 전하고 싶은 매월당의 깨달음의 세계 등이 우의적으로 담겨 있다. 김시습이 왜 금오신화를 창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실증적 자료는 없으나, 같은 시기에 살았던 김안로(1481-1537)는 용천담적기에서 김시습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신화를 써서 석실(石室)에 간직하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권력의 폭력 앞에 지식인의 고뇌가 얼마나 크게 일어나는가를 시대를 초월하여 뚜렷이 전달된다. 『금오신화』의 첫 작품이 만복사저포기인데, 작품의 배경을 남원의 만복사(萬福寺)로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 때 지어졌다고 전해오며,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에 타 소실되었다.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있었고,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는 몇 가지 유물만 남아 있어 만복사지(萬福寺址)로 불린다. 만복사저포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원의 노총각 양생(梁生)은 만복사의 불당에서 부처님께 저포(윷과 같은 기구)놀이를 청한다. 저포놀이에서 이긴 양생은 배필이 될 여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문득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나 부처님 앞에 자신의 외로운 신세를 하소연하며 배필을 점지해 달라고 기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정이 통하고 하룻밤을 함께 지낸다. 이 여인은 왜구가 침범한 난리통에 죽은 처녀의 환신이었다. 이튿날 여인의 동네로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얼마 후 여인이 돌아갈 때 여인이 양생에게 은주발을 선사하는데 그것은 여인의 무덤에 매장한 부장품이었다. 다음날 그들은 보련사에서 다시 만난다. 여인의 부모가 치르는 재(齋)가 끝난 뒤 여인은 저승으로 떠난다. 양생은 끝내 그 여인을 잊지 못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평생을 마친다. 절 이름 만복(萬福)은 만복사저포기 전개의 출발점이 된다. 양생과 여인은 모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처님께 복을 비는 내용이다. 죽은 여인의 혼령과 만나는 내용이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인간으로 태어나 과거 이루지 못한 사랑의 꿈을 이루게 된다. 비록 허구적인 이야기이고 혼령과 이루어지는 사랑이지만, 인간의 진정한 성취는 정신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 리얼리티는 확보된다. 은거와 유랑을 반복하며 살아간 매월당이 한시도 잊을 수 없이 그리워한 대상은 누구였을까. 다섯 살의 나이에 세종의 총애를 받고 비단까지 하사받은 그에게 도무지 잊을 수 없는 님은 물론 세종이었으리라. 김시습은 만복사저포기와 그 외 4편의 소설을 통해 현실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한(恨)을 삭이고 승화시키는 과정을 밟은 것이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여귀(女鬼)는 현실인 김시습을 상징한다. 왜구가 침입한 난리통에 절개를 지키려다 죽은 여귀는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기구한 운명의 절절한 사연을 부처님께 올리며 배필을 점지해 달라며 기도했다. 이는 김시습의 당대 내면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다. 작중인물 양생은 한을 풀지 못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여귀로 하여금 한을 풀게 하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양생이 밭과 집을 모두 팔아 정성스레 재를 올린 뒤 여귀는 하직 인사를 남긴다. 저는 당신의 은혜를 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승과 저승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신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도 이제 정업(淨業)을 닦아 저와 함께 윤회를 벗어나십시오. 양생은 그 뒤에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었는데, 언제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여귀는 이승에서의 한을 풀기는 하였으나 그에게 주어진 숙제가 다 풀린 것은 아니다. 당신도 이제 정업(淨業)을 닦아 저와 함께 윤회를 벗어나십시오. 윤회를 벗어난 세계가 공(空)의 세계이며, 그런 경지에서 맞이하게 되는 세계가 참다운 복(福)의 세계이다. 그래서 만복사이며, 김시습은 그런 화두를 만복사저포기를 통해 후세에 던진 것이다. 김시습은 남염부주지에서 원한을 품은 귀신은 처량하게 울기도 하고 여러 형태로 원망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만다고 하였으며, 귀신설에서는 지극히 잘 다스려지는 세상과 지극한 사람의 분수에는 이런 일이 없다.고 하였다. 결국 여귀의 기구한 운명을 담고 있는 만복사저포기는 당대의 폭력적 현실을 역설적으로 비판한 소설이요,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암시한 것이라 하겠다. 용궁부연록은 세상과 합일하는 원망충족의 내용이다. 마치 평생 그리워한 세종과의 만남과 풍류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것도 한갓 꿈일 뿐, 잠에서 깨어난 한생은 명산에 들어가 생을 마친다. 금오신화를 석실에 감추고 후세를 기다린다는 말은 온갖 번뇌망상을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체현하는 여여한 세계, 공(空)의 세계를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니었을까. 남원시 왕정동 만복사지의 텅 빈 마당 위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다. 망초꽃대를 흔들고 사라지는 바람결에 속세의 한을 삭이며 끝없이 도를 구하던 매월당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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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03 16:48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③ 상춘곡(賞春曲) 다시 알기

가사(歌辭)는 4음보격 연속체 율문 양식의 전술(傳述) 장르로 최초의 작품은 고려 말 나옹화상 혜근의 서왕가(1370년)로 알려져 있다. 우리말 구조에 맞는 4음보 율문이 불교 가르침을 대중에게 널리 전하고자 하는 포교의 기능으로 적합했던 것이다. 15세기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유가 사대부들이 4음보 율문 양식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고, 사대부의 강호가사, 정격가사의 첫 작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상춘곡이다. 불우헌 정극인(1401-1481)의 출생지는 경기도 광주이며, 태인은 그의 처향(妻鄕)이다. 그의 묘소와 유적이 현재 정읍시 칠보면에 소재하고 있으나, 당대의 지명은 태산(泰山)과 인의(仁義)가 합쳐진(1409년) 태인현이었다. 사대부 가사의 효시로서 정극인의 상춘곡은 우리 전북의 자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체로 아는 것은 이런 정도에 그치고 있다. 상춘곡의 문학적 가치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이런 큰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상춘곡의 참 가치가 드러난다 하겠다. 상춘곡 등장의 가장 큰 배경은 무엇보다 정극인의 삶 그 자체이다. 그는 17세에 소과에서 장원을 차지하였고, 29세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36세 때는 기근에도 불구하고 흥천사 중건 등 대규모 불사를 자주 일으키자 태학생들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의하다 함경도에 귀양을 갔다 풀려난다. 이후 부인의 고향 태인에 정착하여 새 인생을 시작한다. 1436년 태인에 정착한 이후 문인으로서뿐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고, 이는 1451년 성균관의 천거를 받아 광흥창(廣興倉) 부승(副丞)에 임명되기까지 15년 동안 이어졌다. 이후 전시(殿試)에 급제하기도 하고, 1469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불교를 배척한 일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70세 되던 1470년에는 벼슬을 완전히 그만두고 다시 태인으로 돌아왔다. 10년 정도의 관원 생활 중 사간원 정언 외에는 크게 내세울 게 없는 관직 생활을 하였다 하겠으나,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지낸 관직의 대부분은 전주부(全州府) 교수를 비롯하여 태인현 훈도까지 교관직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의 성품은 강직하였고 충언을 마다하지 않은 탓으로 여러 위기를 겪었으나, 반면 교육자로서의 뚜렷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실천한 곳이 태인이었다. 그의 교육자로서의 삶은 고을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에 힘쓴 공으로 임금으로부터 1472년(성종 3) 3품 산관(散官)을 하사받으며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다. 태인 고현동향약(보물 1181호) 그는 불우헌(不憂軒)이라는 집을 짓고 가숙(家塾)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고, 향약과 향음주례를 정해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규정을 세웠다. 정극인이 향인들과 제정하여 시행한 태인고현동향약(1475, 보물 1181호)은 조선조 최초의 향약이었으니, 이는 강호가사의 효시 상춘곡과 마찬가지로 전북문화의 또 다른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정극인이 문을 연 가숙이 이후 손제자 송세림에 의해 향학당으로 발전하고, 태인 현감 신잠의 부임 이후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동서남북중의 오학당 체제로 확대된다. 1696년(숙종 22)에는 임금이 무성(武城)이라는 이름을 내려 무성서원이라는 사액서원이 탄생된다. 2019년 5월 현재 정읍 칠보의 무성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9개 서원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등재 권고로 최종 보고되었다니, 이 또한 큰 경사라 아니할 수 없다. 한 개인의 교육적 신념이 무성서원을 탄생하게 하고, 국가 지방교육의 체제 수립으로 진전되게 하였으니, 그 업적 지대하다 할 것이다. 사대부의 첫 강호가사 상춘곡은 정극인의 그러한 삶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된 것이다. 그가 정치적 영달에 치우치는 삶을 살았다면, 아무리 문학적 재능이 출중하다 해도 조선조 최초의 강호가사 작자로서 출현할 수 없었으리라. 개인적 큰 고비 때마다 부인의 고향 태인에 내려와 자연 속에 묻히고 교육자로서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지냈기에 4음보 율문체 상춘곡을 창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춘곡은 시점의 이동에 따른 경물의 변화, 시상의 흐름을 기준으로 다섯 단락으로 나눠진다. 각 단락의 일부만 인용해 본다. ① 紅塵(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 엇더고. 송죽 鬱鬱裏(울울리)예 風月主人(풍월주인) 되어셔라. ② 수풀에 우 새 春氣(춘기) 내 계워 소마다 교태로다. 물아일체어니, 興(흥)이 다소냐. ③  괴여 닉은 술을 葛巾(갈건)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노코 먹으리라. 淸香(청향)은 잔에 지고, 落紅(낙홍)은 옷새 진다. ④ 明沙(명사) 조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淸流(청류) 굽어보니, 오니 도화ㅣ로다. 武陵(무릉)이 갓갑도다. 져 이 긘 거인고. ⑤ 공명도 날 우고, 부귀도 날 우니, 청풍명월 外(외)예 엇던 벗이 잇올고. 아모타, 百年行樂(백년행락)이 이만 엇지리. 위의 인용문들은 각 단락 중 자연과 하나가 된 감정을 잘 담고 있는 부분들이다. 풍월주인, 물아일체, 무릉(도원), 백년행락 등의 단어들은 그 감정이 직접 드러난 시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단어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그 풍류의 흥취를 한껏 고양하고 있는 부분이 셋째 단락이다. 이제 막 익은 술을 칡베로 걸러두고 꽃나무 가지로 먹은 술 헤아리며 맘껏 즐기겠다는 것이다. 마침 불어오는 봄바람에 꽃향기는 술잔에 스미고, 꽃은 내 옷에 떨어진다 하니, 이게 곧 물아일체의 경지요, 무릉도원의 한 풍경이다. 성인의 도는 벼슬자리에 나아가서는 백성을 구하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서는 그 마음을 닦는 세계이다. 상춘곡의 화자는 이미 벼슬을 그만두고 자연 속에서 머물며 교육자로서 살기에 여념이 없는 세월을 살아왔다. 5단락의 공명도 날 우고, 부귀도 날 우니는 그런 삶을 드러내는 탁월한 표현이다. 자신이 부귀공명을 꺼린다는 말보다 차원 높은 공감으로 이어진다. 부귀공명 자체가 처음부터 자신을 멀리하는 인생으로 타고 났음을 인정하며, 이를 수용하는 심리를 담고 있다. 맹사성(1360-1438)의 연시조 강호사시가와 황희(1363-1452)의 연시조 사시가와 더불어 상춘곡의 강호가도 정신은 송순(1493-1582)의 면앙정가, 정철(1536-1593)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져 자연친화적 호남가단의 흐름을 형성한다. 문학 연구의 궁극적 가치는 문학 작품의 가치를 발굴하여 그 효용성을 확산하는 일로 귀결된다고 할 때, 상춘곡을 비롯한 일련의 고전문학은 오늘의 입장에서 새롭게 재조명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강호시가의 풍월주인에는 인간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와 연결되는 인식론적 태도와 가치지향 의식이 담겨 있다. 자연과 인간의 생태학적 관계 설정은 오늘날 시대를 초월하여 제기되는 긴요한 사안이다. 그런 점에서 풍월주인을 노래하고 있는 상춘곡 등에 내재된 생태적 상상력은 생태적 위기 속에 놓여 있는 현대인들에게 녹색담론이라는 시대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자연과 어떤 관계 속에서 지속가능한 새 지평의 세계를 노래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숙제를 던져준다. 우리 전북은 조선조 최초 강호가사의 발상지이다. 정읍시 칠보에는 정극인의 묘도 잘 보존되어 있고, 2009년 정극인 동상도 세워져 정극인의 교육자적 정신과 상춘곡의 면목을 유지하고 있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전남 담양에는 2000년에 이미 한국가사문학관이 건립되어 교육, 문화, 관광의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점에 비하여 다소 초라하다.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의 위상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상춘곡에 걸맞은 생태적 관점의 창의력이 발휘되고, 무성서원 일대가 전북의 새 명소로 조성되기를 기대한다.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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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2 16:39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② 서동요(薯童謠) 다시 알기

2019년 4월 30일, 해체되었던 미륵사석탑이 20년 만에 복원되었다. 석탑이 해체될 때 나온 사리봉안구에 의하면 미륵사 창건 인물은 백제 무왕의 왕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며, 사찰 건립 시기가 639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삼국유사의 무왕조 서동설화에 나오는 무왕의 왕비 선화공주와 사택적덕의 딸은 물론 같은 인물이 아니다. 설화 속의 서동과 역사 속의 무왕이 같은 인물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설화 속에 역사적 인물이 등장한다고 해서 설화 전체를 역사적 일치 여부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려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설화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변형되기 때문이다. 선화공주님은 남 그윽히 얼어두고 맛둥방을 밤에 몰래 안고가다. 이 내용은 대체로 알려진 양주동의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서동요는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14수의 향가 중 가장 앞선 시대의 작품이며, 주지하다시피 익산 금마의 미륵사를 배경으로 한다. 향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형시인바 4구체, 8구체, 10구체 향가 중에서도 서동요는 4구체의 짧은 노래이다.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다른 향가와 마찬가지로 서동요 역시 그 해석이 분분하다. 이는 한글이 없던 시대의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표기한 향찰로 전해오기 때문이다. 당대와 현재의 언어 사이에 변화도 많았을 것이고, 먼 선대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후대 연구자들의 상상은 그래서 더욱 열려 있다 할 것이다. 엘리아데의 역사적 인물의 신화화라는 이론에 의하면, 탁월한 능력을 지닌 영웅은 여러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신화적 인물로 전승되며, 실재의 역사적 인물이라 해도 실제 사건들과 무관하게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서 달리 활약하면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재탄생된다. 서동요는 비록 짧은 내용의 노래이지만, 역사적 인물의 신화화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때 그 가치성이 재평가되고, 아울러 설화에 내재하는 진실이 현 시대의 역사적, 문학적 울림으로 전해올 수 있을 것이다.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의 14수 향가는 모두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포교적 성격과도 연결된다 할 것이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 법흥왕 15년(528)이었고, 서동요는 600년경에 지어졌다고 전하니, 서동요는 불교가 한창 성할 무렵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는 다른 향가와 달리 민요이자, 동요이며, 시대적 상황, 정치적 징후 등을 암시한 참요(讖謠)이기도 한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의 미모를 흠모한 서동이 계략을 내어 아이들에게 마를 주어 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 마침내 쫓겨나는 선화공주를 만나게 되는 이 혼인담은 그 자체가 극적이며, 이를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포괄적으로 해석하면 이는 훨씬 풍요로운 의미망을 지닌 참요로 이해된다.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쫒겨나 신분이 천한 서동을 만나 살게 된다는 내용은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평강공주 이야기와 동일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 두 설화는 내 복에 산다 설화 계열과 불교 예화로 전해오는 선광공주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내 복에 산다 설화는 누구 복으로 먹고 사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아버지 복으로 먹고 산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셋째 딸은 내 복으로 산다.고 대답하여 쫓겨나게 되고 미천한 사람과 살게 되었으나, 결국 남편을 통해 우연히 금을 얻어 잘 살게 되고 거지가 된 아버지에게 효도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바사닉왕의 딸 선광공주 이야기는 대강 다음과 같다. 위의 셋째 딸처럼 선광공주 역시 아버지에게 저에게 업의 힘이 있기 때문이요, 아버지의 힘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여, 부왕은 거지에게 시집보내 딸의 말을 확인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거지 남편의 옛집 터에서 보물이 나와 부왕과 같은 정도로 부자가 되고, 결국 부왕은 자기가 업을 짓고 스스로 그 갚음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내 복에 산다 계열의 설화는 불경에 전해오는 선광공주 이야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는 석가모니불을 중시하고 사찰의 불상을 중시하며 전래되어 왔으나, 사실 불교의 본래 정신은 우주 만유의 주체성과 평등성을 기본으로 한다. 남녀귀천이 있을 수 없고, 삼라만상이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장엄한 꽃으로 이해된다. 위의 내 복에 산다 설화와 선광공주 이야기는 각 사람의 주체성과 평등성을 강조한 내용이란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앞서 말한바,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문학의 어떤 작품이든 시대성을 담고 있지 않을 수 없다. 서동요도 여기서 예외일 수가 없다. 삼국유사의 무왕조에 담겨 있는 서동요 설화는 탄생 신화, 혼인 민담, 미륵사 창건 전설로 구분된다. 탄생 신화는 서동 즉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였으며,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서동을 낳았다는 것이다. 혼인 민담은 서동이 신라 서울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유포시켜 선화공주가 쫓겨나게 하고, 이후 결혼에 성공한 뒤 서동과 선화공주가 신라의 진평왕에게 구릉처럼 쌓인 금을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진평왕이 서동을 존경하며 편지를 보내게 되고, 이로부터 서동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미륵사 창건 전설은 부인의 소원을 듣고 무왕이 미륵사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며, 진평왕이 백 명의 기술자를 보냈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의 서동요 설화에는 진평왕과 무왕 등 역사적 인물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런 역사적 인물이 설화 속에 등장하기까지에는 분명 이에 합당한 시대적 배경이 있을 터이다. 이장웅은 「신라 진평왕 시기 백제 관계와 서동설화」(2018)라는 논문을 통하여 서동설화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는 백제 서동(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의 혼인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중국의 후한서에 의하면 마한은 진한, 변한을 거느린 이 땅의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이장웅에 의하면 현재 전해오는 서동설화는 마한 무강왕 신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막강했던 무강왕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시대를 초월하여 무왕의 설화로 변형되었고, 그렇게 해서 금마 땅에 전해오던 백제의 서동설화가 정치적 안정을 꾀하는 통일신라 시기에 다시 변형되어 삼국유사에 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동설화의 혼인담에 의하면, 무왕은 진평왕의 인정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고, 무왕이 미륵사를 건립할 때 많은 기술자를 파견한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 속에서는 진평왕과 무왕은 긴 세월 동안 사활을 건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관계다. 서동설화가 실제의 역사와 정반대로 화해의 이야기로 엮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고조선의 멸망 이후 남하한 우리 한민족의 맹주국 마한의 무강왕은 백제시기에 서동이 되어 신화적 인물로 내려왔고, 그렇게 전해온 백제의 서동설화는 통일신라기에 무왕의 설화로 변형되어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으리라는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앞에서 말한 역사적 인물의 신화화에 의하면, 역사적 충돌은 아이러니하게 설화적 화해로 얼마든지 재탄생된다. 서동설화를 실제 역사에 대입하여 해석할 때 앞뒤 맥락이 맞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었던 것이다. 서동설화는 삼국이 통일된 이후 민족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는 과거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골 깊은 지역감정을 안고 있다. 삼국의 치열했던 전쟁과 마찬가지로 남과 북은 6.25의 비극을 치렀고 극심한 반목과 대립 속에 살아왔다. 이런 점에서 구애의 한 방책으로 불려진 서동요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동요에 내재된 정신은 화해의 정신이다. 마한의 터, 전북 익산의 노래가 지역감정도 극복하고, 우리 민족의 통일정신으로 승화되기를 기대한다.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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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2 17:45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① ‘정읍사’(井邑詞) 다시 알기

오래 전부터 전라북도를 예향이라 일컫고 있다. 그런데 다른 지방 사람들이 전북이 왜 예향이며, 한국문학의 메카라 하느냐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삼국시대 이후 한국문학의 발자취를 살펴 그 답을 찾아보는 의미에서 전라북도문학관(관장 류희옥)의 지상강좌를 마련했다. 전라북도는 대한민국 문학의 메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큰 기초가 되는 작품이 바로 정읍사(井邑詞)이다. 정읍사는 백제 때의 민간 가요로서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고, 한글로 전해오는 유일한 작품이요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 정읍사는 노래로 불리던 것으로 본 내용에 여음구가 붙여지게 되었다. 본 내용만 추리면 3장 6구의 시조 형식을 띠는데, 이를 근거로 정읍사를 시조의 원형으로 삼기도 한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 全져재 녀러신고요. 즌 데를 드데욜셰라. / 어느이다 노코시라. 내 가논 데 졈그를셰라. 석 줄의 짧은 가사에 지나지 않으나, 이 노래가 이토록 오랜 세월 불리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첫째,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평이하고 소박한 내용이다. 행상 나간 지아비를 걱정하는 지어미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쉽게 헤아릴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다. 둘째, 이 작품에서 달은 작품의 배경이 되면서 이 시의 가장 강력한 상징성을 띤다. 달을 통해 지어미의 간절한 기원은 온 누리로 확장된다. 또한 전져재 녀러신고요(전주시장을 다니시는가요)라는 구체적인 상상은 지역 명칭과 더불어 실감을 주면서 시적 형상화를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셋째, 즌 데(진 곳)와 졈그를셰라(저물세라)가 가지는 은유는 이 시를 최고의 시로 끌어올린다. 사실 땅이 진 곳 그 자체를 걱정할 여인은 없을 것이다. 이 진 곳은 여염집 여인들이 가장 염려하는 곳, 즉 여자들의 유혹이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을 말할 것이다. 술집이나 유곽쯤으로 생각하면 딱 맞을 그런 은유다. 그러니 이 노래에 담긴 여인의 마음은 사실 보이지 않게 애가 닳는다. 그러한 실정이니 이 지어미에게는 지아비가 벌어올 돈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랑하는 낭군님이 염려될 뿐이다. 그래서 어느이다 노코시라는 지극히 자연스레 다가온다. 어느 것이든 다 놓고 오십시오. 이 말 한마디는 얼마나 통쾌한 표현인가. 내 가논 데 졈그를셰라 역시 깊은 은유를 담고 있다. 어조의 흐름으로 볼 때 내는 남편을 가리킨다. 날이 저물어 남편이 진 곳을 밟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편이 해를 입어 어둠 속에 빠지면 지어미 자신의 삶도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결국 내는 지아비와 지어미 자신을 동시에 함축하는 표현이 된다. 이는 부부일심동체라는 우리 민족의 사상 체계와도 맥을 함께한다. 이렇듯 평이하면서도 여염집 여인의 염원이 지극한 사랑으로 형상화된 작품은 찾기가 쉽지 않다. 한글로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노래가 이러할진대, 이 정읍사는 우리 전라북도의 문학적 자긍심을 갖게 하는 출발점이라 하겠고, 우리 도민은 이 정읍사를 더욱 소중히 아낄 수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이 정읍사는 여러 가지로 풀어야 할 게 있다. 이 노래는 백제 노래인가 신라 후기 노래인가, 제목이 정읍인가 정읍사인가. 노래 속 가사가 全져재인가 져재인가. 망부석의 위치는 어디인가 등이 그것이다. 원광대 국문과에 재직하였던 이상비 교수는 『새 자료에 의한 한국문학사의 재평가』(1997)라는 저서의 「백제가요 정읍 신고」라는 논문을 통해 정읍사와 관련한 내용을 자세히 밝혀 놓은 바 있다. 그 중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명이 정촌현(井村縣)에서 정읍현으로 바뀌게 된 것이 경덕왕 16년(757)이니, 정읍사는 백제의 노래가 아니고 신라 후기의 노래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상비는, 일단 지명이 개정되면 그 지명으로 된 모든 명칭은 일제히 고쳐져서 통용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향가 처용가에서 서라벌이 동경으로 고쳐졌듯이 정촌(井村) 역시 정읍으로 고쳐져서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즉 정읍사는 신라 후기 경덕왕 16년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 백제 때부터 불려왔다는 것이다. 이상비는 본래 노래의 명칭이 정읍인데 김태준이 『고려가사』에서 정읍사로 명명하면서 명칭이 정읍사로 굳어진 게 아닌가 보고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의 향가 관련 진술 또는 『고려사』의 속악 관련 진술을 통해 사(詞)는 가(歌)의 개념이 아닌 가사(歌詞) 곧 노랫말의 개념임을 밝히고 있다. 唱海歌詞曰(해가를 불렀는데 노랫말은 가로되)처럼 歌井邑詞(정읍을 불렀는데 그 가사는), 唱動動詞(동동을 창하였는데 그 가사는)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정읍사의 본래 명칭은 예로부터 정읍이지 정읍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악학궤범』에 나오는 後腔全져재녀러신고요의 후강전을 악곡상의 명칭으로 보고 져재 녀러신고요로 여겨 왔으나, 이상비는 후강전이라는 악곡 명칭은 없고 전져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완산지(完山誌)(1958년 간)를 입수하였는데, 원본이 조선 정조 때인 이 책을 통해 전주를 전으로 표기한 사례를 두 곳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전주를 전으로 쓰게 된 연유로 한문의 약칭성향을 들었고, 또한 노래의 가사이기에 전주져재보다는 전져재가 훨씬 노래 호흡에 맞다는 김형규의 주장(『고가요주석』, 1968)을 소개하며 이에 힘을 싣는다. 망부석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읍현의 望夫石在縣北十里其曲曰井邑(망부석은 관아에서 북으로 십리에 있다. 그 곡의 이름은 정읍이다)라는 표현에서 그 근거를 삼게 된다. 그런데 망부석의 위치로 잡은 현재의 정읍사공원은 백제 당시의 현을 추론하여 정한 것으로 현을 지금의 정해(井海, 샘바다)로 잡은 것이다. 이상비는 현북십리는 당연히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할 당시의 현청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의 표기에서도 정읍사가 아닌 정읍으로 표기된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상비는 당시의 현청 자리를 자료를 근거로 하여 찾았는데, 호남고등하교와 동초등학교의 중간 지점에서 동초등학교 쪽으로 2분의 1쯤 다가선 지점으로 보았다. 그렇게 찾아낸 현청을 중심으로 내장산, 오봉산, 반등산 등의 거리를 역산하여 망부석의 위치를 제시하였다. 그곳은 정읍시 북면 승부리 너머의 오르막의 면소재지가 보이는 곳이 꼽힐 뿐이다. 따라서 이곳의 오르막의 산석을 골라 망부석을 삼을 것이고, 적당한 돌이 없다면 조형물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악학궤범에 나오는 백제 당시의 망부석은 긴 세월 동안 얼마든지 망실될 수도 있고,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망부석을 가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읍이라는 악곡은 엄연히 불렸었고, 그 가사 또한 엄연히 전해오고 있다. 정읍사를 정읍으로 바로잡기도 힘들고, 이미 세워진 정읍사공원을 옮기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가려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이다. 최소한 망부석이라도 제 위치에 세우고 그 진실이라도 알리는 작업을 해나간다면 그 노력 또한 찬사로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전라북도를 한국문학의 메카라고 하며 자부한다면, 전라북도 차원의 협조와 지원 또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진실을 밝혀 주시라.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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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0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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