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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전북인] 남원출신 김종춘 (사)한국고미술협회장

국내 유일 고미술품 감정기관 회장 5회 연속 당선…'짝퉁' 유통 막기위해 DB도록 발간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열 여덟살때 단돈 170원을 들고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그때 남원에서 서울까지 기차요금이 80~90원 정도였으니 지금 돈으로 따지면 손에 4~5만원 정도 쥐고 집을 나선 것이지요."

 

10대 후반의 소년은 그래도 걱정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술(목공)을 믿었기 때문이다. 형제는 물론 친인척 하나없는 낯선 서울에서 소년은 이를 악물고 일했고, 직업을 두 번 바꾸는 모험을 통해 전국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다.

 

김종춘 (사)한국고미술협회 회장(63)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때때로 견디기 힘든 시련이 닥치기도 했지만 '할 수 있다'는 그의 자신감을 꺾진 못했다. 김 회장은 지난해 다섯 번째 회장직을 맡은 한국고미술협회 역대 최다선 회장이다. 5회 연속 회장에 당선됐지만 선거를 치른 적이 없다. 다섯 번 모두 회원들의 추대로 회장 자리에 올랐다.

 

'한국고미술협회'는 지난 1972년 2월 문화공보부의 승인으로 설립된 사단법인체로 동양화·도자기·조각 등 골동품 감정 및 경매정보 제공 업무를 수행하는 국내 유일의 고미술품 전문감정기관이다. 고미술계를 대표하는 단체로 현재 전국 13개 지회에 70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지난 3일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수운회관 1층에 자리잡고 있는 고미술전시관 '다보성 고미술' 사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다보성 고미술은 김 회장이 지난 1988년 개관해 직접 운영하고 있는 전시관이다.

 

1965년 어느 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으니 김 회장이 고향을 떠난지도 벌써 45년이 됐다.

 

학업보다는 기술이 중시됐던 가난했던 어린 시절 김 회장은 남원시내 한 가구점에서 목수일을 배웠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탁월해 재능을 인정받던 유능한 예비 기술자였다.

 

그러나 남원은 김 회장에게는 좁은 무대였다. 자신의 기술을 믿고 무작정 상경한 그는 서울 청량리 주변 한 가구공장에 취직했고 첫 월급으로 2000원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적지않은 보수였다. 허름한 공장 건물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이를 악물고 일한 그는 4개월 만에 공장장이 됐다.

 

책임자가 됐으니 만족하며 살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발전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공장을 나왔다.

 

김 회장은 우연히 서울 용산구 원효로 부근의 집달사업체(경매업체)에 취업했고 고미술품에 눈뜨기 시작했다. 당시 압류품에 대한 법원의 경매는 지금과는 달리 현장에서 이뤄졌는데 압류물건으로 나온 고미술품들에 마음이 끌렸다는 것.

 

22세에 직접 집달사업에 뛰어들어 독립한 김 회장은 25세때 38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 사장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성공 뒤에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인에게 써준 180만원짜리 보증서가 1800만원짜리로 둔갑돼 부도를 맞았다.

 

"압류 물건이라는게 남의 가슴에 한 맺힌 것들이어서 '이 일(압류 물건을 경매받아 되파는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부도가 나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빈 손'이 됐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전국을 돌면서 평소 관심이 있었던 고미술품을 모았고 수집가들에게 판매했다. 당시에는 고미술품 감정에 대한 전문교육기관이 없어 김 회장은 독학으로 고미술품에 대해 파고들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인맥이 생겼고 당시에는 고미술품을 사려는 사람이 많아 재기할 수 있었단다. 1988년 다보성 고미술 전시관을 개관한 김 회장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국내 고미술계를 거의 석권했다.

 

김 회장은 1997년 2월 한국고미술협회 회장직에 처음 도전해 지난해 2월 제22대 회장에 다시 선출되기까지 5회 연속 회장에 추대됐다.

 

김 회장은 그동안 한국고미술협회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왔다.

 

지난 2004년 미술품 양도세 부과법안 폐지 서명운동, 2007년 헌법소원을 통한 문화재 공소시효 법안 위헌 판정 등 고미술계에 기여하면서 회원들의 신뢰를 얻어왔다. 지난해에는 가짜 고미술품 유통을 막기 위한 '고미술품 거래 및 유통 정화위원회'를 협회내에 신설했고, 진품과 위품으로 판정된 작품들을 수록한 '한국 고미술품 감정 DB 도록'(전 3권)을 발간했다.

 

김 회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 호황을 누리던 고미술 시장이 IMF이후 침체일로에 있다"며 "고미술이 돈이 된다고 하니까 위조작들이 늘어났고, 위조품이 늘어나면서 시장이 신뢰를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협회가 지난 2006년부터 3년간 감정을 의뢰받은 작품 1885점중 진품은 52.7%에 불과했다"고 고미술 위조작 유통의 심각성을 설명했다.

 

지난해말 문화재청의 후원을 받아 '2009 한국고미술문화대전, 진짜와 가짜의 세계'전시회를 연 것도 '짝퉁'추방을 통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 회장의 별명은 '포청천'이다. 옳다고 판단해 원칙을 세우면 흔들리지 않는 심지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그의 고미술계 개혁 노력은 대부분의 회원들로 부터 호평받고 있지만 '적'도 생겼다. 모함과 음해로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김 회장은 "5000m 상공에서 외줄타기 하는 심정으로 협회를 이끌고 있다"며 "돌다리도 12번 두드려보고 간다"고 말했다. 투명하지 않았으면 벌써 회장직에서 쫓겨났을 것이라고 했다.

 

김 회장은 요즘 고미술감정 전문가 양성에 관심이 많다. 고미술품의 진위구별이나 가치판단 능력을 길러주는 16주 과정의 고미술문화대학 감정아카데미는 벌써 8기째를 맞았다.

 

"감정아카데미를 개설했더니 전직 장관은 물론 은행 및 증권사 임원, 교수, 변호사 등 각계 각층의 호응이 매우 뜨거워 매 학기마다 수강자 선발에 진땀을 빼고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내후년 회장직에서 물러나면 고미술분야 특수대학원을 설립해 운영해보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고미술에 대한 그의 애정은 끝이 없어 보였다.

 

▲김종춘 회장은

 

남원시 보절면이 고향인 김 회장은 18세때 상경해 갖은 고생 끝에 전문가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고향 사랑도 깊어 지난 2006년에는 모교인 보절초등학교에 학급문고를 보내달라며 10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2년전 노모(96세)를 서울로 모시기 전까지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고향에 내려갔지만 지금은 마음만큼 고향에 자주 가지 못한단다.

 

김 회장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문화위 상임위원, 경기대 경영대학원 총동창회 이사를 맡고 있는 등 사회활동도 활발하다.

 

강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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