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 전주형무소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6·25 민간인 학살조사연구회’는 20일 전주 한국전통문화전당 교육실에서 김승수 전주시장과 전북지역 보훈단체 회원·전문가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6·25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포럼을 열었다.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은 전쟁 당시 전주를 점령했던 북한군이 1950년 9월 26일부터 이틀간 수감자 500여명(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추정)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다.
이 중 300여명의 시신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175구의 시신은 유족으로부터 수습되지 못해 현재 전주 효자공원묘지에 합동 안장돼 있다.
이 때 숨진 수감자 중에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 지도자급 인사인 손주탁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과 오기열·류준상 초대 제헌국회의원, 이석규 씨(이철승 전 국회 부의장 부친) 등이 포함됐다.
이날 ‘6·25 전주형무소 민간인 희생 규명을 위한 제언’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홍성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6·25 민간인 희생자 관련 구술 기록화 사업 △학살 현장 발굴 조사 및 미연고자 유전자 분석 △조사·연구단체 조직 등을 제안했다.
홍 교수는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에 대한 조사 연구는 6·25전쟁 당시 지역 연구를 기본으로 출발해야 한다”며 “기존 자료의 체계적인 수집 및 분석을 통해 다시 한 번 사건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함한희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와 이성호 전북대 산학협력단 교수가 패널로 나서 ‘6·25 당시 전주형무소 민간인 희생 사건의 기록 찾기와 유해 발굴 등에 무게 중심을 두고 진상규명 사업을 벌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관련, 시는 6·25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을 널리 알리고 억울하게 희생된 수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상 건립을 추진할 계획이다.
시는 오는 9월 전주 효자공원묘지에서 추모제와 추모상 제막식을 열 계획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도시는 그 공간에서 일어났던 모든 기억들의 집합체”라며 “잘못된 역사라도 성찰을 통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주를 기억의 도시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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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과거기사>관련>
■ <전주교도소 양민 학살 사건> 전쟁의 慘狀 여실히 보여줘 전주교도소>
- 50년9월말 5백여 인사 무참히 살해
- 1999년 6월 28일 14면 기사
1950년9말.인공 치하 3개월 여를 끝내고 북한 인민군이 퇴각하던 무렵 시민 모두가 자유와 해방감에 젖어 있던 전주시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시내 진북동 전주교도소에서는 5백여명의 인사들이 채 자유의 맛을 보기 직전에 비명 속에 사라져가야 했다.
민족 비극의 현장이 된 이곳의 비극은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 일어 나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가르친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른 사건이었다. 전북애향운동본부 발간 '광복50년 전북발전사'와 전주교도소 등의 기록, 생존자의 증언 등을 참고 하면 전주형무소 사건은 이렇게 전해오고있다.
국군 및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의 후퇴가 명백해질 무렵인1950년9월20일께, 인공치하 전주형무소 수감자들은 형무소 뒷뜰에폭3m,길이5m 가량의 구덩이 수십개를 팠다.
그무렵 전주형무소 미결수 감방34개와 기결수 감방60여개에는 대한민국의 공무원 경찰관 형무관과 그 가족들,우익인사등 1천5백여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50년9월24일 밤부터 수감자들을 한명씩 불러내어 구덩이 앞에 세워놓고 괭이, 삽등 농기구와 몽둥이, 망치 등으로 타살하기 시작, 26일까지 계속했다. 살육이 며칠째 이어진 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27일에는 북한군 형무소 책임자가 남은 수감자들을 모두 마당으로 집합시킨 뒤 작전상 후퇴한다는 요지의 설명을 하고나서 정문을 열고 막 석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석방도중 오토바이 3대로 들이 닥친 북한 정치보위부 소속 인민군에 의해 제지되었고 다시 타살이 계속됐다.
한석방된 인사는 두고온 옷가지를 다시 챙기려 형무소에 들렸다가 운없이 죽음을 당했는가 하면 한부인은 남편을 살리기 위해 밤새도록 교도소 벽을 곡괭이로 허물어 많은 수감자들을 구출해 냈으나 정작 자신의 남편은 이미 살해를 당해 통곡 했다는 슬픈사연도 있다.
시체들이 너무 부패된채 즐비해 유족들은 자신의 가족을 찾지 못해 두번 울어야 했다며 인근에 살았던 한노인은 증언하고 있다.
28일 UN군이 전주시가지에 진입,전주형무소를 탈환함으로써그때까지 살아남은 수감자들이 구출되었는데 지상군을 엄호하던 UN공군기가 무전연락 착오로 형무소를 폭격하는 바람에 미처 감방을 빠져나오지 못한 수감자들이 폭사했다.
경찰관 49명, 형무관 9명, 우익인사 4백 40여명 등 모두 5백여명이 희생되었으며 유가족이 없는 희생자 1백 75명은 주변 야산에 집단 매장되었다가 전주형무소가 노송동에서 평화동으로 이전되고 야산이 주택지로 개발되면서 전주시 외곽으로 이장됐다.
전주형무소는 61년 전주교도소로 개칭됐고 72년 전주시 평화동3가 99번지로 이전했다.
72년 이전후에 교도소 자리는 연립주택 및 단독주택 등이 들어서 지금은 참상의 흔적을 전혀 찾을수 없다.
하지만 이유없는 학살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그날의 기억을 몸서리치며 떠올리면서 하리빨리 평화통일이 이뤄지길바라고있다. /백기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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