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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의 '미술 인문학'] '돌'의 의지, 이정직의 괴석도

이정직의 괴석도(31x141cm), 화면을 꽉 채운 구도로 각진 외모를 꼿꼿히 세운 모습이다. 구한말과 개화기의 격변기에 지역의 선비로서 살아가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이정직의 괴석도(31x141cm), 화면을 꽉 채운 구도로 각진 외모를 꼿꼿히 세운 모습이다. 구한말과 개화기의 격변기에 지역의 선비로서 살아가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그려진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형태인 기암괴석의 산수가 압권이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봤던 정경을 듣고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그 너머에 욕심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이 있을까?

옛 사람들이 괴석을 즐겨 그렸던 것은 기이한 돌의 형태 속에서 ‘천지의 뼈’라고 부를 만한 자연의 정수를 읽고 그 불멸성, 신비함을 느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말, 전주권의 유학자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은 문인화가로도 이름을 남겼는데, 특히 그의 괴석도는 주목을 끌고 있다. ‘돌을 소산수(小山水)로 보고, 흉중에 산수를 갖추고 크게 구상한 뒤 돌을 그리면 모양과 기세를 얻어 구속되지 않으며, 고문에 엶과 닫음, 조응과 문단속이 있듯이 바위를 그림에도 이 묘를 추구하여 누습이 없는 진석(眞石)을 그릴 것’을 주장했다는 그는 스스로의 아호에도 돌 석자를 넣으며 왜 그리 돌을 사랑했던 것일까?

이정직은 구한말 개화기의 격변기를 살았고, 정통 유학과 양명학, 신학문, 천문, 지리, 의학, 수학, 기계, 어학, 시문, 서화 등에 두루 뛰어난 지식인이며 전북 문인화를 개창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놀랍게도 그러한 성취가 특별한 스승 없이 홀로 학문과 서화에 매진하여 얻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서화는 당대를 대표하는 세련미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지역의 선비가 깨어나 격을 갖추고 뜻을 펴는 모습을 그에게서 볼 수 있다. 그와 교유하면서 동시대를 겪었던 선비 매천(梅泉) 황현(黃玹), 해학(海鶴) 이기(李沂) 역시 치열한 삶을 살았다. 매천은 한일합방 직후 자결하였다.

사실 석정이 그린 괴석은 단순히 ‘돌’ 자체가 아니다. 그것이 갖고 있는 영원성, 불변, 의연함, 신묘함을 상징하며, 나라가 망해가던 시점의 소용돌이에서 정신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으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스스로 소치 허련의 남화나 오원 장승업의 그림을 임모하며 뜻을 키우던 그는 괴석도를 통하여 이 세상의 현실이 아닌, 불변의 세계, 선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열었다. 지역성은 한계가 있지만,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지역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자기 세계를 열어 나간 석정의 길이 더 빛나 보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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