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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장모님은 손맛이 끝내준다고?] 누군가의 친정은 누군가에겐 시집, 그맛이 그맛

결혼한 딸은 자신을 낳아 길러준 어머니를 ‘친정어머니’라고 한다. 물론 3인칭으로 가리켜 부를 때다. 대면하거나 통화할 때는 당연히 ‘엄마’다. 예외가 없다. 그 딸과 결혼한 남자에게 아내의 친정어머니는 장모(丈母)다. 아버지는 장인(丈人)이다. 장모를 빙모(聘母)라고도 한다. 장인의 다른 이름도 빙부(聘父)다. 빙장(聘丈)은 그 높임말이다. 빙장의 ‘장(丈)’은 ‘어른’이다. ‘빙장 어른’이라고 깍듯이 높여 부르는 건 말의 중복이다. ‘빙(聘)’은 ‘찾아가다’, ‘예를 갖추어 안부를 묻다’라는 뜻을 가진 한자말이다. 뜻풀이를 하자면 장모(빙모)와 장인(빙장)은 사위가 찾아가서 예를 갖추어 안부를 묻는 어른들이다. 사위를 ‘백년손님’ 혹은 ‘백년지객(百年之客)’이라고 했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을 것이다. 그 말에는 영원하고 귀한 손님이므로 사위하고는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뜻도 담겨 있는 것이리라. 과거 이 땅의 장모들 대부분은 ‘부족한 여식’을 기꺼이 거두어 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해서 사위를 어렵고 귀하게 여겼다. ‘사위가 찾아오면 씨암탉을 잡는다’는 속담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어느 집을 막론하고 장모는 딸 내외가 친정 나들이를 오면 사위에게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대접했다. ‘친정 나들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이다. 아니 쓸 필요가 없어졌다. 그건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정설로 여겨지던 시절 얘기다. 시집 간 딸이 어쩌다 한 번씩 친정집에 다녀가는 걸 일컫는 말이 ‘친정 나들이’였던 것이다. 요즘 여자들은 친정집을 뻔질나게 드나든다. 친정엄마하고 김장도 함께 담는다. 무시로 드나들면서 친정집 냉장고에서 반찬을 가져다 먹는 출가외인들이 흔하다. 하긴 친정엄마가 대주는 반찬이 없으면 밥상조차 제대로 차릴 줄 모르는 새댁들도 부지기수니 말 다했다.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삼시끼니를 제대로 챙겨먹는 집이 별로 많지 않다. 아침은 과일이나 빵조각으로 대충 때운다. 점심은 식당에서 해결한다. 집에서 차려먹는 반찬도 어지간한 건 조금씩 사다 먹는다. 아파트 상가마다 반찬가게 하나쯤은 다 있다. 마트나 백화점의 반찬 코너에도 없는 반찬이 없다. 맛도 좋다. 번창일로다. 동네 반찬가게 이름 중에는 ‘장모’나 ‘처가’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것들이 많다. ‘장모님 손맛’, ‘장모님 반찬가게’, ‘친정엄마 손맛’, ‘처갓집 반찬’, ‘친정어머니의 정성’ 같은 것들이다. 하다못해 출입문에라도 ‘장모님’을 적어 붙인다. 식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모님 곰탕’, ‘장모님 김치찌개’, ‘장모님 밥상’, ‘처갓집 된장맛’ 같이 적힌 간판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처갓집 양념치킨’이나 ‘장모님 치킨’이라는 프렌차이즈 상표까지 있다. 그 옛날 어느 장모가 씨암탉을 잡아서 기름에 튀겨준 적 있었는지 모르겠다. 음식점 상호가 거두절미하고 ‘처갓집’인 곳도 여럿이다.그 간판에 ‘장모’나 ‘처가’를 들이대는 것은 딸과 사위들의 보편적 정서를 자극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딸 내외에 대한 친정엄마나 장모의 정성이 담긴 음식이고 반찬이니 믿고 잡수시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이들한테는 그게 외할머니의 손맛일 터이다. 요즘 젊은이들, 식당에 가면 주인아주머니한테 ‘이모’라고는 잘도 부르면서 ‘고모’를 찾는 이는 없다. 어느 식당이나 반찬가게를 가도 ‘시어머니’나 ‘시댁’을 갖다 쓴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형 식품 제조업체 상표가 붙은 반찬 포장지에서도 ‘시어머니 손맛’이니 ‘시집 전통의 맛’이니 하는 말을 발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까닭이야 불문가지다. 판매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자. 누군가의 친정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집 아닌가. 결혼한 딸과 아들이 있는 어머니는 장모이면서 동시에 시어머니다. 그런데 어째서 ‘시어머니’나 ‘시댁’이라는 이름은 맛있는 음식과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 사위한테 음식을 해먹일 때는 온갖 정성을 다하니까 없던 음식 솜씨까지 저절로 생기고, 며느리한테는 대충 해서 먹이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정말 그런가? 시어머니는 며느리한테 음식 장만을 시켰으면 시켰지 손수 상을 차려서 대접하지는 않았으니까? 그것도 연탄 실은 삼륜차가 골목길을 누비던 시절까지로 효력이 만료되었다.세상이 달라졌다. 직장에서 야근까지 하고 퇴근한 젊은 가장들은 온종일 집에서 애기 돌보느라 고단한 아내를 위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기저귀 갈고 젖병 물린다. 명절 때 친정 부모 선물이 시댁 것보다 가격이 적어도 두 배 차이가 난다는 건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시골 병원에 진료 받으러 오는 노인들 보호자는 열에 아홉은 딸이고, 며느리는 하나 꼴이란다. 아들만 넷을 낳아 번듯하게 길러낸 어느 시어머니는 딸 하나 없는 게 이토록 아쉬울 줄은 미처 몰랐다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몰아쉰다. 줄줄이 딸을 낳으면 금메달, 섞어 낳으면 은·동메달, 아들만 낳으면 목메달이다.이 땅의 사위들은 이제 더 이상 백년손님이 아니다. 아들과 함께 시댁을 찾아와 준 고마운 며느리들이 오히려 백년지객이고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는다. 21세기 시어머니들, 며느리 눈치 보고 비위 맞추기 바쁘다. 모처럼 찾아와서 선심 쓰듯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주면 그게 고마워서 새벽부터 일어나 밥상 차리는 게 요즘 시어머니들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쨌든 그림의 ‘장모님 설렁탕’이 ‘시어머니 설렁탕’으로 바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끝〉·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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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04 23:02

[⑬ 사업에 성공하는 몇가지 방법] 눈앞의 작은 이익보다 더 멀리 보세요

#1 절친한 친구인 철수와 만수는 밤늦도록 술을 기분 좋게 마셨다. 딱 한 잔만 더 하기로 하고 거리를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개업 축하 화분이 즐비한 술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거기 들어가 맥주 두 병을 주문했더니 그 집 주인아주머니, 안주도 시키시라고 하는 것이었다. 벽에 붙은 ‘삼치숯불구이’가 눈에 띄었다. 2인분 두 마리 값이 ‘1만80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1인분 한 마리만 달라고 했다. 대신 한 마리 값으로 1만원을 드리겠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 모두 2차에서 치킨하고 맥주를 배부르게 먹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대번에 정색을 하고 나왔다. “우리 가게에서는 그렇게 못 팔아요. 여기에 적힌 대로 2인분을 시키셔야 돼요.” 배가 불러서 그런다고, 이번 한 번만 봐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기분이 상한 철수와 만수는 하는 수 없이 술집을 도로 나오고 말았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철수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까 그 주인아주머니 같았으면 말이다, 손님들 사정이 그러시면 제가 한 마리 값만 받을 테니까 염려 마시고 맛있게나 드세요, 그러겠다. 저 술집, 저런 식으로 장사했다가는 돈을 벌기는커녕 아무래도 오래 버티는 것조차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그로부터 채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우연히 지나다 보니 그 술집이 있던 자리에 예쁜 커피숍이 들어앉아 있는 게 아닌가. #2 “삼촌은 어떻게 그렇게 돈을 많이 버셨습니까?” 대학 졸업을 앞두고 소자본 창업을 준비하는 조카가 그렇게 물었다. 그 삼촌, 빙긋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돈? 나는 돈 같은 거 벌려고 할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예? 돈을 벌려고 한 적이 없었다구요?”“내가 돈을 번 게 아니라 직원들하고 손님들이 나한테 돈을 벌어준 거란 뜻이지. 어떻게 하면 내 직원들하고 손님들을 기분 좋게 해줄 수 있을까, 나는 오로지 그 생각만 하면서 장사를 해왔거든….”#3 당시 박 사장은 변두리에 작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장이래야 생산직 근로자 다섯 명에 경리아가씨 하나, 거래처에 납품하는 영업사원이 전부인 가내수공업 수준이었다. 그런데 제품을 주문받고 납품하는 과정에서 그 영업사원의 업무 착오로 당시 공장 한 달 매출액에 버금가는 손해를 보고 말았다. “제가 책임을 지고 전셋돈이라도 빼서 일부라도 갚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사장님.” 백일이 갓 지난 딸아이 하나를 둔 그 영업사원,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밀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사장은 일단 사직서를 받은 다음 퇴근 후에 그 사원을 삼겹살집으로 데려갔다. 그 자리에서 사직서를 그 사원의 작업복 주머니에 도로 찔러주고 소주를 따라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나한테 과분할 만큼 좋은 직원이네. 그동안 자네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해왔는지도 사장인 내가 잘 알지. 그런 자네가 본의 아니게 실수 한 번 했다고 내가 이런 걸 덥석 받아서야 말이 되겠나? 자네가 실수를 했으면 그 책임은 일을 시킨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네. 딸아이와 안식구를 생각해서라도 기운을 내게.” 그 말을 듣고 그 영업사원은 고개를 떨군 채 소주잔에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는 미리 준비해 간 봉투를 건네주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걸로 식구들하고 함께 며칠간 어디 가서 시원한 바닷바람이나 쐬고 오게. 자네 안식구도 이번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테니, 위로도 좀 해줄 겸해서….” 바람을 쐬러 가기는커녕 다음날 새벽에 출근한 그 영업사원, 눈에 불을 켜고 일을 하는 것이었다. 여섯 달쯤 지나서 사장은 그가 별도로 일한 성과를 정리해 보았다. 웬걸, 그때 손해 봤던 걸 이미 채우고도 남는 것이었다.그런 일이 있고 5년이 지난 지금, 그의 공장은 생산직 근로자만 15명을 둔 어엿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예로부터 사업(장사)의 금과옥조는 박리다매(薄利多賣)다. 퍼줄 줄 알아야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는 곤란하다. 그야말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그림을 보면 ‘고객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적혀 있다. 고객이 왕이다. 첫째도 고객만족, 둘째도 고객만족이다. 당연하다. 그걸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이는 사업에 성공한다.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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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28 23:02

[⑫ 정이란 무엇일까] 내 가슴에 남 모르게 뜨는 무지개?

정이란 무엇일까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조용필이 오래 전에 부른 〈정〉이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받는 것이 정인지, 아니면 주는 것인지 묻고 있다. 받을 때는 꿈속 같은데 줄 때는 안타깝단다. 아주 흔히 쓰는 말인데, ‘정’이란 무엇일까. 예를 들어 정의를 내리면 이런 식이 되겠다. 택시비가 4,700원이면 5,000원짜리를 내고 잔돈은 사양하는 것, 반대로 4,200원쯤 나왔을 때 손님이 5,000원짜리를 주면 천 원짜리를 거스름돈으로 주는 것, 그런 게 정이 아닐까 싶다. 주는 건지 받는 건지 묻거나 따질 필요가 없다. 서로 즐거운 마음으로 주고, 기쁘게 받으면 그만인 게 ‘정’이기 때문이다.‘정’은 생기기도 하고, 붙기도 한다. 쏟기도 하고, 흐르기도 하며, 깊어지기도 하는 게 ‘정’이다. 떨어질 때도 있다. 남녀가 헤어질 때는 일부러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 ‘정을 떼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런 일을 반복하면 결국 ‘눈꼽’이나 ‘병아리 눈물’ 만큼 남아 있던 ‘정나미’마저 떨어지게 된다. 물론 더욱 심해지면 ‘오만정’이 다 떨어진다. 우리네 복잡한 속내처럼 ‘정’은 종류도 다양하다. ‘덧정’이라는 게 있다. ‘덧니’처럼 ‘더해지거나 덧붙은 정’이다. 한 곳에 정이 붙으면 그 주변 것까지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정을 말한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고 했다. 바로 ‘덧정’을 이르는 말이다. 이웃과 나누는 ‘따뜻한 정’이 ‘온정’이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게 만드는 힘은 ‘열정’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게 오래 가지 못하고 식어 버리면 ‘냉정’해진다. 서로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다 보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게 되어 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이 있다. 분노가 극심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정’도 마찬가지다. ‘고운 정’은 몰라도 ‘미운 정’은 지나치면 정이 거꾸로 솟아서 크게 화를 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속 좁은 어른들이 끼고 사는 ‘역정’이다. ‘초코파이’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情’이다. 이 ‘정’은 ‘떼려는’ 정이 아니다. ‘냉정’도 아니고 ‘역정’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열정’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훈훈하게 나누는 ‘온정’일 것이다. 서로 상대에게 먼저 주고 나중에 받으면서 유대감을 높이는 바로 그런 마음이다. 이 초코파이가 한때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근로자들에게 요즘말로 ‘인기 캡’이었단다. 북한에는 초콜릿 수입이 안돼서 그런 걸 먹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뿐인가. 달콤한 간식류는 자본주의 산물이라고 못 만들게 했기 때문에 세상에 처음 보는 초코파이 맛에 다들 홀딱 반했던 모양이다. 최근에는 그게 북한 근로자들 평균 임금의 거의 1/10에 달하는 10달러에 암거래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리에게는 흔해빠진 초코파이가 그렇게들 인기라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 자리에 남쪽 형제가 꼭 챙겨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초콜릿이란다. 이 또한 남북통일이 시급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그 분이 연초에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신년기자회견 자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단다. 엥? 남북통일이 ‘대박’이라고? ‘대박’은 흥행에 성공해서 큰돈을 벌어들인 일을 가리키는 말 아닌가? 부동산 투기로 한 몫 크게 잡았거나, 카지노 같은 도박판에서 잭팟을 터트렸을 때 주로 쓰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전 세계 외신기자들까지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것도 신년 벽두부터 어찌 그런 천박한 언사를, 그것도 ‘남북통일’이라는 온 겨레의 염원을 가리켜…. 하마터면 정나미가 떨어지다 못해 오만정까지 다 달아날 뻔하지 않았는가. 아, 알겠다. 이해하고도 남겠다. 속 다르고 겉 다른 것이다. 말만 번지르르했지 진정으로 통일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는 것이다. 그런 천박한 말로 상대편을 노골적으로 자극해서 냉전시대의 남북 대결구도를 은근슬쩍 고착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빨갱이’와 ‘종북’ 프레임으로 집권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앞서 봤던 조용필의 〈정〉은 이렇게 끝난다.정을 쏟고 정에 울며살아온 내 가슴에 오늘도 남 모르게 무지개 뜨네…누군가에게 쏟든, 아니면 그 누군가 때문에 울든, 주든 받든, 결국은 ‘내 가슴에 오늘도 남 모르게 무지개 뜨’는 게 바로 ‘정’이다. 통일은 그림 속의 ‘情’처럼, 또한 지난 민주정부 시절에 그랬듯이, 북에 대한 적대감부터 버려야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주판알이나 퉁기는 사사로운 욕심도 버리는 게 좋다. 서로 ‘온정’에 ‘덧정’을 더해가면서 추진하는 게 지름길일 것이다.우리네 보통사람들 생각에 남북통일이란 동포끼리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만나서 정이 듬뿍 담긴 초코파이를 마음껏 나눠먹게 되는 걸 뜻하는 말 아닐까. 그게 남북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고, 진정한 ‘대박’이겠다 싶어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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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21 23:02

[⑪ '남' 아닌 '가족'도 아닌…] '용모' 따져 '가족' 구하나…

김유정이 쓴 단편소설 중에 〈봄봄〉이라는 작품이 있다. 작중의 주인공인 나는 점순이하고 혼인을 시켜준다는 약속만 믿고 3년 넘게 돈 한 푼 받지 않고 머슴살이를 하지만 점순이가 키가 자라지 않았다는 걸 구실로 그 아비인 봉필이 혼인을 시켜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소설에서 나는 비록 한 집에 살고 있지만 봉필과 점순이 부녀에게 남으로 취급 받는다. 사전을 찾아보면 나 아닌 사람은 모두 남이다. 이따금 자신과 특별한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범위를 조금 넓혀서 쓰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구나 연인은 남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도로남〉이라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그걸 증명한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있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아~ 인생〈봄봄〉의 주인공 나 또한 점 하나 차이에 해당되는 점순이의 작은 키 때문에 남과 님을 넘나들고 있다. 그런 장난 같은 인생사에 애간장을 태운다. 나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다. 점순이와 혼인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남이 아닌 명실상부한 식구로 대접받는 가족이 되는 것이다. 나가 봉필을 꼬박꼬박 빙장어른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생겨난 아들, 딸, 손녀, 손자 등 가까운 혈육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슷한 뜻을 가진 말이 식구(食口)다. 식구는 한자말 그대로 먹는 입이다. 함께 모여서 밥을 먹는 이들의 공동체다. 가족의 다른 이름으로 쓰일 만하다. 가족은 또 사회의 기초 단위이기도 하다. 그게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3년의 경우 하루 평균 840쌍이 결혼했다. 그 절반에 가까운 398쌍이 이혼했다. 이혼율이 세계 3위라고 한다. 1위 고지가 눈앞에 보인다. 그뿐 아니다. 갈라서면서도 자식 양육은 상대방에게 떠넘기려고 하는 추세다. 아예 왕래조차 끊고 사는 부모형제도 적지 않다. 노부모를 서로 모시지 않으려는 다툼도 끊이질 않고 있다. 상속 재산의 분할을 놓고 형제들이 법정 소송을 벌이는 일쯤은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얘기가 되어 버렸다. 기능과 효율을 우선시하는 사회환경의 변화가 그 주된 까닭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인 것 같다.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 사고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돈 아닌가 싶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말은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 돈 나고 사람 나더니 이제는 가족조차 돈 다음에 났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가고 있는 듯하다. 삶의 패턴 변화에 따른 개별화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공동체 개념이 약화된 탓이다.가족 고유의 가치가 유지되고 있는 영역이 있긴 하다. 조직에 속해 있거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다. 그런 조직은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닌 남남으로 이루어져 있다. 2차적 의미의 가족이다. 이때 주로 쓰는 말이 바로 가족 같은이고, 우리가 남이가다. 한때는 어떤 기업광고의 카피로 가족 경영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도 있다. 그림 속에 있는 건 북대 구 정문 근처에서 발견한 어느 떡볶이 집 구인광고다. 적힌 그대로 흔히들 쓰는 직원 모집이나 아줌마 구함이 아니다. 가족 구함이다. 형제자매처럼 믿고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뜻이겠다. 이 또한 앞서 말했던 2차적 의미의 가족일 것이다.가족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단다. 우선 용모가 단정하고 성실해야 한단다. 연령대도 40대에서 50대 초반으로 제한되어 있다. 떡볶이 가게에서 일을 거들어줄 사람을 가족으로 모신다면서 용모단정은 무엇 때문에 필요할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니까? 그뿐이 아니다. 성실하신 분이 아니어도 자격 미달이다. 한 성실 하는 사람만 지원하라는 뜻이다. 둘 다 갖추었어도 나이가 50대 중반을 넘으면 역시 가족으로 함께하기는 곤란하다. 기운이 떨어져서 가족 역할을 제대로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다로운 조건을 두루 갖추어서 가족이 된다. 가족이니까 내 집안일처럼 성심껏 열심히 일한다. 주인이 월급을 미룬다. 가족이니까 선뜻 얘기를 못하고 망설인다. 또 한 달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월급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거기에 대고 주인은 혹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닐까. 가족끼리 돈은 무슨, 우리가 뭐 남인가? 물론 억지스러운 지레짐작이다. 옛날에는 가족이 아닌 일꾼을 구했어도 피를 나눈 형제자매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잘만 지냈기에 하는 말이다.앞서 보았던 〈봄봄〉의 끝부분에는 나가 장모님과 점순이에게 양쪽 귀를 하나씩 잡혀서 괴로움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건 작가 김유정이 마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장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실제 인물 나와 점순이는 훗날 정식으로 혼인해서 가족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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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4 23:02

[⑨ 바르게 살라 하는 바윗돌] 얼마나 바르게 살지 않으면 이런 글을…

찬 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하얀 눈 맞으며 아픔만 달래는 바윗돌.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1년에 열린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정오차의 <바윗돌>은 이렇게 시작된다.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이라는 대목이 노래 중간에 나오는데 이 바윗돌이 당시 높은 사람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한동안 금지곡으로 묶이기도 했다. 뭐 그런 세상이 다 있었는지 모르겠다. 돌은 단단한 광물질 덩어리다. 다이아몬드도 사실은 돌의 일종이다. 우리 주변에 돌만큼 흔한 것도 없다. 정해진 기준은 없지만 맨손으로 쉽게 집어 들거나 던질 수 있는 크기면 그냥 돌이라고 부른다. 돌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년이 소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화풀이하듯 시냇물 속으로 집어던진 건 조약돌이다. 최루탄을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진압경찰을 향해 손수건 마스크를 두른 시위대에서 던졌던 돌에는 짱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생각의 회전이 느린 사람한테는 가차없이 돌대가리 아니면 돌팍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나기>에서 소년이 소녀를 기다렸던 돌다리나, 충북 진천의 명물인 농다리처럼 냇물을 건너는 다리가 되기도 하는 게 돌이다. 냇물의 돌과 돌 사이는 또 물고기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다. 수천 킬로를 헤엄쳐 온 연어들도 그곳에 알을 낳는다. 돌은 쓸모에 따라 인위적으로 깨트려서 사용하기도 한다. 잘게 부수어서 마당에 깔기도 하고, 모래 대신 쓰기도 한다. 축대도 쌓는다. 납작하게 연마해서 건물의 외벽을 장식한다. 대리석 같은 고급 돌은 주택의 각종 내장재로도 쓰인다. 최근에는 맥반석이니 옥돌이니 하는 걸로 침대까지 만든다. 연마해서 불탑과 같은 갖가지 예술품을 만드는 재료로도 쓰이는 게 돌이다. 이때는 당연히 덩치가 큰 바윗돌을 쓰게 마련이다. 바위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주홍 글씨>를 쓴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htorne)의 <큰바위 얼굴>이다. 가깝게는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을 배웅했던 부엉이 바위가 있다.그 성질이 차갑고 투박하긴 해도 생김새에 따라서는 적잖은 품격을 지닌 것이 또한 돌이다. 선이 부드러운 커다란 돌은 비석 같은 장식용으로 쓴다. 거기에 지명이나 단체나 기관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고, 회사나 학교 같은 데서는 사훈(社訓)이나 교훈(校訓) 등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를 바라는 문구를 새겨 넣기도 한다. 그림과 같이 공공장소에 세워서 특별한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커다란 돌에 뜻을 새겨서 품격을 높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갈 것이다. 그림 속의 돌도 원래 그곳에 그런 모습으로 있었던 것을 아닐 것이다. 받침돌까지 있는 걸 보면 문구를 새긴 뒤 그곳으로 옮겨왔을 게 분명하다. 거기에 바르게 살자라고 적혀 있다. 바르게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이 곧거나 반듯하게라고 나와 있다. 한마디로 삐딱하지 않게가 바르게다. 바르게 살자는 삐딱하지 않게 살자는 뜻일 게다. 진실한 마음을 갖고 질서를 잘 지켜서 모두모두 화합하며 살아가자는 말까지 그 아래 또박또박 덧붙여 놓았다. 거기 적힌 바르게 살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말을 웬만큼 구사할 줄 아는 동남아 출신 노동자가 그 부근을 지나다가 돌에 새겨진 말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바르게 살지 않으면 이런 말을 이렇게 써 놓았을까. 하긴 일리가 없지는 않아. 혹시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을까.잘 가꾸어진 공원 한쪽에 이런 큼직한 돌을 세우고 거기에 바르게 살자고 적어 넣어서 이 땅의 수많은 바르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된 의식과 생활방식을 뜯어고치고 싶어하는 이들은 또 과연 얼마나 바르게 살아가고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 맞아. 우리는 누구나 바르게 살아야 해.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여기서 이 말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쩔 뻔했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얘들아, 너희들도 이리 와서 여기에 적힌 것 좀 읽어 봐라. 어때? 참 좋은 말이지? 앞으로는 엄마하고 아빠도 바르게 살아가도록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너희들도 이걸 꼭 실천해야 한다, 알겠지? 뭐, 이렇게 깨닫거나 말할 사람은 또 과연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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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23 23:02

[⑧ 출산율 획기적 제고방안] '맞고 낳을래, 그냥 알아서 낳을래?'

그 여자의 직업은 공무원이다. 정규직이니 대과만 없으면 거의 환갑까지 쭉 갈 수 있다. 칼출근에 칼퇴근을 고려하면 대기업보다 월급이 적은 것도 아니다. 나이 40줄이 코앞이지만 결혼은 한마디로 별로다. 부모의 성화 때문에 가끔 맞선이라는 걸 마지못해 보긴 한다. 웬만한 남자는 안중에도 없다. 일이 될 리가 없다. 어쩌다 구미가 좀 당긴다 싶은 남자는 그쪽에서 딱지를 놓는다. 그 여자의 취미는 여행이다. 주말에는 화싱(화려한 싱글)이나 돌싱(돌아온 싱글) 친구들하고 어울려 가까운 바닷가나 산을 다녀온다. 연휴에는 월차를 며칠 얹어서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를 여행한다. 휴가 때는 당연히 유럽, 남미, 미국, 호주 같은 원거리다. 일찌감치 결혼한 친구들이 안쓰럽다. 애들 키우느라 자신처럼 근사한 여행 한 번 제대로 떠나지 못하는 걔네들, 인생이 다 한심해 보일 지경이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적힌 표어가 전국 방방곡곡에 나붙은 시절이 있었다. 범국민적 산아제한 운동이었다. 아주 먼 옛날 얘기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그림 같은 시절이었다. 이제는 숫제 그림의 떡이다. 우리나라는 한때 산아제한에 성공을 거둔 대표적 사례로 꼽혔다. 요즘에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들 해서 문제다. 지금은 저출산 경쟁에서 전 세계적으로 톱 랭킹을 다툰다. 그 대표적인 원인과 현상 중 하나가 혹시 앞서 보았던 그 여자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뭐든 한다면 한다. 끝장을 볼 줄 아는 우수한 DNA를 보유한 국민이다. 이런 우수한 DNA를 그 여자들처럼 혼자만 재미나게 살겠다고 썩혀서야 어디 되겠는가. 인류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나라 인구는 더 많아져야 하는 거 아닐까. 저출산의 근본 원인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간에 나온 전문가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청년 취업의 어려움, 집값 상승, 열악한 보육환경, 날로 치솟는 교육비 등의 사회적 환경이 고령 미혼자 양산과 저출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세상 참 많이 변했다. 한번 돌이켜 보자. 옛날에는 성년이 되었는데도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기르지 않으면 어른은커녕 사람 취급도 제대로 안 해 주었다. 시집 간 딸자식이 아이를 못 낳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뿐인가. 늙으면 극진하게 봉양 받을 수 있었으니 자식들 여럿인 게 부자였다. 자식들이 연금이었다. 든든한 노후대책 수단이 따로 필요 없었다. 요즘에는 자식만한 애물단지가 없다. 무자식이 상팔자다. 키우기도 옛날보다 몇 십 배 힘들다. 부모봉양은커녕 늙은 부모에게 빌붙어 등골을 휘어놓는 게 대세다. 자신의 꼴이 그러하고 미래가 빤한데 누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싶겠는가. 지금 한창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를 세대는 또 어떤 이들인가. 저만 아는 개별화된 세대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화해하고 상생하는 방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성장한 인터넷과 스마트폰 세대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만 배워 온,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진 세대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아야 유지되는 결혼생활이 지옥 같아 보일 수밖에.저출산이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는 심각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자치단체나 여러 공공기관에서도 갖가지 출산장려정책을 내놓고 있다. 그림처럼 가는 곳마다 임산부 전용 주차장까지 등장했다. 과연 그걸로 해결이 될까 싶다. 요즘 세대의 특성상 현행 출산장려정책은 한계가 있다. 이쯤 되면 약발이 확실한 걸 쓸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좋게 얘기할 때 결혼해라다. 맞고 낳을래, 그냥 알아서 낳을래?다. 이름하여 양육세를 강제로 징수하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나이 스물여섯이 넘었는데도 저 혼자만 재미나게 살려고 하는 여자, 서른이 지나도록 결혼하지 않는 남자(네 살 차이는 환상의 궁합이라니까)를 모조리 색출해낸다. 그들 각자의 전체 수입 중 절반에 무조건 세금을 물리는 것이다.일찌감치 결혼한 기특하고 어여쁜 부부들에게 그걸 몽땅 지원한다. 임산부 전용 차로와 전용 무료주차장을 운영한다. 임산부는 영화도 공짜, 택시도 공짜, 마사지도 공짜다. 비즈니스 클래스에 태워서 정기적으로 여행도 보내준다. 물론 공짜다. 산부인과 진료비? 기저귀 값, 분유 값? 유치원비? 그거야 말하면 입만 아프다. 내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세대의 특성상, 이런 정책을 법으로 집행하면 너도나도 결혼도 하고 줄줄이 아이도 낳고, 그러지 않을까? 입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들은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들 있는지 모르겠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그런 중차대한 일은 외면한 채 지방선거 입지자들 줄세우기에만 골몰하고들 앉았으니 동네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그런데, 이거, 이 땅의 수많은 그 여자들에게 한 사흘 밤낮에 걸쳐 동네북처럼 두들겨맞을 소리는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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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6 23:02

[⑦ 과태료·범칙금과 나라살림] 운전 중 안전띠 미착용 단속 이유는

겨울비가 쏟아지는데 한 남자가 우산도 쓰지 않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차가운 날씨에 비까지 맞았더니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서 잔뜩 웅크리고 걷는데 경찰관이 다가왔다. “선생께서는 지금 우산도 없이 비를 몽땅 맞고 계십니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가족들의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대단히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판단되어 선생께는 범칙금 3만 원을 부과하겠습니다.”이거 말이 되는가. 남이야 비를 맞든 감기에 걸리든 무슨 상관인가. 경찰관이 나서서 범칙금까지 부과하겠다는 건 또 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도로상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운전하면서 안전띠를 착용하지 않았다고 범칙금을 물리는 게 대표적인 예다. 쓰레기를 남의 집 앞에 함부로 버리거나 주차위반을 했다가 적발되면 과태료를 내야 한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술이 취해서 노상방뇨를 하다가 걸렸다고? 재수없게 당했어도 범칙금을 내야 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다. 남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과태료든 범칙금이든 잘못의 크기에 따라 물어야 하는 금액도 조금씩 다르다. 이 두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에만 부과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행위에 과태료나 범칙금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속도위반을 단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속한 운전자가 불행해질 것을 염려해서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다른 차와 추돌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다른 차를 운전하는 이에게 피해를 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음주운전은 다른 이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에 잠정적 살인 행위로 간주해서 집중적으로 단속을 벌인다. 최소 300만원에서 최대 1,000만 원까지 벌금(전과 기록까지 남는 벌과금)을 물도록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운전 중에 안전띠를 매지 않았다가 적발되면 범칙금 3만 원을 내야 한단다. 왜? 법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했다. 긴 말은 필요없다. 그 상태로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면 사망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추돌사고의 경우는 운전자가 차량 밖으로 튕겨나갈 수도 있기 때문에 2차 사고의 위험도 크다. 마치 우산도 없이 차가운 겨울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릴 확률이 높은 것처럼…. 안전띠를 매면 답답해서 운전에 오히려 지장을 받는 사람도? 물론 범칙금이다. 어떤 교통사고는 안전띠를 매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던데? 소용없다. 3만 원이다. 그런 것까지 국가에서 상관하는가? 당연하다. 어째서? 국민은 국가의 소중한 재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비를 단단히 갖추지 않고 등산길에 오른 사람도 일일이 적발해서 범칙금을 부과해야겠다. 어떤 일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가 실패한 사람도 과태료를 물어야겠다. 전국 방방곡곡 도로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다. “선생께서 운전하고 계시는 차량의 타이어 상태를 보니 심하게 마모되었군요. 이런 상태로 운전하시면 갑자기 빵꾸가 나서 대형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범칙금 5만원 부과하겠습니다.” “아주머니는 보아하니 초보인 것 같은데, 그렇게 두꺼운 장갑을 끼고 운전을 하면 핸들이 미끄러져서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관련 법규에 따라 범칙금은 3만원입니다.” “아니, 아가씨. 이렇게 예쁜 인형을 차 안에 세 개씩이나 싣고 다니면 시선이 자꾸 분산될 거 아녜요? 방향제도 너무 진하잖아요? 운전 중에 이렇게 에로틱한 향기를 마시면 자꾸 딴 생각이 날 게 분명해요. 제 말이 맞죠? 예쁜 인형 동승금지 위반에 실내 향기 과다로 범칙금이 10만 원인데 아가씨는 예쁘니까 특별히 작은 걸로 끊어줄게요.” 국민 한 사람당 과태료나 범칙금을 1년에 10만 원씩만 물리면 무려 5조원 가까이 된다. 나라 살림에 보탬이 많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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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9 23:02

[6.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따순밥] "자식 입에 '따순밥' 들어가는 건 보기만 해도 다 '따순' 일이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게 으뜸이라고 했다. 다들 춥고 배고팠던 시절 얘기다. 배고픔만 면해도 행복하다고 믿었다. 바로 엊그제 일 같기만 하다. 물론 요즘에도 우리 사회 도처에는 그 옛날처럼 춥고 배고픈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런 말을 직설화법으로 쓰는 일은 드물어졌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밥심으로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바로 그 시절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 고된 일상 속에서도 끝끝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게 하나 있다. 지아비와 자식들을 위해 당신 손으로 직접 따순밥(뜨신밥)을 짓는 일이었다. 무쇠 솥에 쌀을 씻어 안치고 장작불을 때야 하는 고된 과정을 거쳐야 했으면서도 따순밥 짓는 일을 번거롭게 생각하는 어머니는 없었다. 어린 자식 입에 따순밥 들어가는 건 보기만 해도 속까지 다 따순 일이었다. 이러저런 이유로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마다 어머니들은 걸레질을 멈추고 한숨을 쉬면서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야가, 밥은 제때 챙겨먹고 다니는지. 그래서였을까. 어쩌다 전화연락이라도 닿으면 맨 먼저 안부를 묻는다는 게 고작 이랬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지? 전화세 많이 나온다면서 통화를 서둘러 마치다가도 이렇게 당부하는 것 또한 결코 잊는 법이 없었다. 끼니 거르지 말고, 밥 잘 챙겨먹어라.명절을 쇠고 떠나는 자식들의 자동차 트렁크에 그 어머니들이 직접 농사를 지은 온갖 곡식이나 고추장, 된장 등속을 바리바리 챙겨서 실어 보내는 것 또한 끼니 거르지 않고 따순밥 잘 챙겨먹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니겠는가. 따뜻한 밥은 어머니의 정성이었다. 간절한 소망이었다. 자식에게는 또 그게 보약이었다. 비탄민이 따로 없었다. 돌이켜보면 추억 자체였다. 아련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귀하고 풍족한 삶의 상징이기도 했다. 찬밥은 당연히 그 반대였다.오죽하면 남에게 괄시받고 소외된 사람이나 하찮게 취급받는 물건을 싸잡아서 찬밥 신세라고 했겠는가. 옛날에 걸인들이 자신을 한껏 낮춰서 얻어간 것도 찬밥 한 덩이였다. 월매도 거지 행색으로 나타난 사위에게는 찬밥을 먹였다. 그나마 향단이를 시켜서.소설가 이외수는 젊었을 적 한때 백열전구로 이불 속을 덥혀서 겨울 추위를 견뎠다고 회고한 바 있다. 밥도 한꺼번에 몽땅 지어서 꽁꽁 얼렸다가 그걸 조금씩 녹여서 먹었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그라고 어찌 따뜻한 밥이 그립지 않았으랴.누가 뭐래도 밥은 따뜻한 게 으뜸이다. 무쇠솥에 쌀을 안치고 장작불을 때든, 돌솥에 가스불을 피우든, 잡곡의 종류에 따라 전기밥솥의 버튼을 눌러서든 방금 지어서 하얀 김이 피어나는 바로 그런 밥 말이다. 김밥이나 주먹밥, 초밥 등의 경우는 좀 다를 것 같지만 이 또한 새로 지은 따순밥을 알맞게 식혀서 써야 제맛이다. 일본제 코끼리밥통 사건으로 온 나라가 한바탕 어수선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모 회사에서 만든 전기밥솥을 사들고 공항 출국장을 나서는 중국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런 풍경도 근원으로 들어가 보면 따순밥 때문이다. 동북아 3개국의 윤택한 식생활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따순밥인 것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겨울철에는 교실에서 조개탄이나 톱밥 난로에 벤또를 층층으로 쌓아서 밥을 데워 먹었다. 요즘에는 인스턴트 밥을 사서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막 지은 것 같은 따순밥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길거리를 오가면서 사먹는 노량진 고시촌의 컵밥에도 온기는 있다. 그림처럼 따순밥을 파는 식당들도 어딜 가나 즐비하다. 그 어떤 따뜻한 밥인들 집밥만할까. 그 시절 어느날 저녁 끼니때도 한참 지나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집에 돌아오면 무쇠 솥에 지은 밥을 그릇에 따로 담아서 아랫목 이불속 깊이 묻어두었다가 꺼내주시던 어머니의 그 따순밥에 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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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2 23:02

5. 백경고(百警告) 불여일득병(不如一得病)이라

어느 마을에 100세를 넘긴 노인이 있었다. 그것만도 놀라운 일인데 그 노인, 장작까지도 곧잘 팬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널리 퍼진 건 당연한 일이었을 터. 소식을 들은 지역의 신문기자가 그 집을 방문했다. 노인에게 축하드린다고 먼저 인사를 챙긴 그 기자, 장수 비결 같은 것이 따로 있으신지 삼가 여쭈었다. 뭐, 그게 그저, 딱히 비결이랄 건 없고.노인은 좀 겸연쩍은지 대답을 선뜻 못하는 것이었다. 기자는 하나씩 조목조목 묻기로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약주는 좀 하셨습니까? 약주는 무슨, 나는 젊었을 때부터 술은 입에도 댄 적이 없어. 아, 장가들 때 딱 한 잔 마셨네. 거 뭐라더냐, 합환주라던가, 그거 절반으로 끊어 마신 게 전부일세.그 노인, 딱 잘라서 그렇게 말하는데, 목소리가 젊은 사람 뺨치게 우렁우렁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러시면, 담배도 당연히 안 피우셨겠네요? 바로 봤어. 그 백해무익하다는 걸 내가 왜 피웠겠나? 네에,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쭈어도 될까요?뭐든, 물어보시게.혹시, 좀 외람되지만, 젊으셨을 때 할머니 말고 다른 여자는. 예끼, 이 사람아! 나는 평생을 우리 할망구 하나 보고 살았다네! 아, 어르신의 장수비결이 바로 그거였군요.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아까부터 방안에서 누군가 끙끙 앓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이었다. 그 방 쪽을 기웃거리던 기자가 덧붙여 물었다. 지금 저 방에서 저렇게 앓고 계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말도 말게. 젊어서부터 술 담배에 계집질까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더니 말년에 저렇게 고생을 하는 거라네. 누구신지 여쭈어도 실례가 안 되겠습니까? 그 노인, 주위를 좀 살피는 척하며 헛기침을 하더니 낮은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누구긴, 이 사람아! 내 아버질세. 중년의 건장한 남자가 병원을 방문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제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그 남자,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 의사, 조금 심드렁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혹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술은 얼마나 마셨습니까?천만에요. 저는, 평생 술을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그러세요? 그러면 주위에 친구도 별로 많지 않겠네요?좀 그런 편, 아니, 제게는 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그래요. 그럼 담배도 피워본 적이 없겠네요?고등학교 때 친구들하고 동네 만화가게에서 장난삼아 딱 한 대 피워본 게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폐암에 걸릴지도 모른다는데 그런 걸 왜 피우겠습니까?그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던 의사, 갑자기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혹시 이거는?참 내, 그런 거 봤다가 양기 다 빠지면 몸만 축나게요?앞으로도 쭈욱 그렇게 사실 겁니까?당연하지요. 아무튼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는지나 알려주십시오.그 의사, 알겠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느긋하게 기대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식으로 살 거면서 뭣 때문에 오래 살려고 하시는 겁니까?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다. 이 따위(?) 이야기를 처음 꾸며낸 이가 누구일지,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낄낄거릴 사람들은 또 어떤 이들일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그들에게 술병에 적힌 경고문을 들이대면, 내가 아는 어느 교회 장로님은 평생 술을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간암에 걸려서 환갑도 되기 전에 저 세상으로 가더라고, 되받는 말이 청산유수다.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릴 수 있다는 경고도 (물론 께름칙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애써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아니, 백경고(百警告) 불여일득병(不如一得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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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6 23:02

4. 안도현 시인 ‘그에게 바란다’ - 안도현 시인, 그의 시가 듣고 싶다

그가 들려주던 시는 늘 힘 있고 건강하고 따뜻했는데그는 지금시를 쓰지 않고 있다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기꺼이 마다하고 성직자의 고된 길로 들어섰던 사람.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땅,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로 가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모든 이들의 친구가 되었던 사람. 세상에 환한 빛을 밝혀주고 마흔여덟 젊은 나이에 하늘로 떠난 사람. 이태석 신부다. 선종 직전 그의 야윈 볼에서, 한겨울밤을 꼬박 새워가며 온몸을 뜨겁게 불태워 사람들에게 온기를 나눠준 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 볼품없는 모습으로 골목길에 버려진 연탄재를 발견한다.세상에는 이태석 신부처럼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해를 끼치면서 사는 사람도 있다. 또 있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온갖 트집을 잡아가며 비난하고 폄하하는 부류다. 골목길에 버려진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는 이들에게서 안도현 시인은 일찍이 그런 수많은 너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너에게 묻는다〉를 통해 따지듯 혹은 나무라듯 물은 바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그가 쓴 〈연어〉의 주인공 눈맑은연어처럼 따뜻한 눈을 가진 시인은, 비록 한때나마 세상의 수많은 너들을 향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던 게 마음에 걸렸던가 보다. 그래서 그림처럼 〈너에게 묻는다〉를 집필실 한쪽에 두고 것이리라. 일찍이 〈연탄 한 장〉을 통해 자기 성찰의 자세로 돌아가 바로 그 너들 앞에서 어깨를 낮추었으면서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삶이란 나 아닌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중략생각하면 삶이란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네, 나는산란을 위해서 초록강을 향해 헤엄쳐가는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의 지느러미처럼 그가 들려주던 시는 늘 힘 있고 건강하고 따뜻했으므로, 비유컨대 그가 쓴 〈연어〉의 초록강은 그에게 시작(詩作)의 터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런 그가 안타깝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구더기와 똥물이 우글거리는 지금의 초록강은 더 이상 초록강이 아니라고, 이런 초록강에서는 그 어떤 희망을 찾을 수도 꿈을 꿀 수도 없다고, 그런 곳에 알을 낳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그 옛날처럼 햇살이 강바닥의 조약돌에 곧장 내리꽂힐 만큼 맑은 물이 흐르지 않는 한 초록강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초록강 아닌 그 어느 곳에도 알을 낳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결기를 뉘라서 말릴 수 있으랴만, 〈너에게 묻는다〉에 빗대어 이제 그에게 바라노니, 훗날 그가 초록강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은빛연어와 눈맑은연어가 그랬던 것처럼 온몸이 누더기가 되어 있는 일은 없기를, 주둥이에서 핏물 따위를 흘리는 일도 생기지 않기를. △안도현 시인은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기간에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묵의 출처를 묻는 글을 몇 차례 트윗했다고 검찰에 기소되어 1심 국민참여재판에서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받았으나 그에 반하는 재판부의 벌금형에 불복하여 상고했다. 그와 관련해서 시인은 현 정권에서는 시를 쓰지도 발표하지도 않겠다고 트윗한 바 있다. 현재 그 사건의 상고심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시를 쓰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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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9 23:02

3. 세상에, ‘젖꼭지탕’이라굽쇼? - '왕족탕'은 어디서 왔고 '우두탕'은 또 무엇인가

전통 음식 중 하나인 탕(湯)은 오래 끓여서 진하게 우려낸 국을 가리킨다. 탕의 종류는 주로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에 이른다. 생선으로 끓이는 탕만 해도 아구탕, 조기탕, 내장탕, 우럭탕 등이 있다. 메기탕이나 빠가탕은 민물고기를 쓴다. 옛날에 임금이 여름철 보양식으로 즐겨 드셨다는 용봉탕(龍鳳湯)은 본디 잉어와 닭을 함께 넣어 끓였다고 하는데, 요즘에는 잉어 대신 자라를 쓰기도 한단다. 뱀탕과 만세탕은 포획 자체가 법으로 금지된 파충류가 주된 식재료이므로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돼지고기로 끓이는 것으로는 순대국밥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경상도 지역의 돼지국밥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탕 중의 으뜸은 갈비탕, 꼬리곰탕, 우족탕, 설렁탕, 도가니탕, 곰탕, 소머리국밥 등과 같이 소의 고기나 뼈를 넣고 끓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식당 입구를 들어서다 보니 그런 탕 이름이 위아래로 가지런히 적힌 메뉴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절로 걸음이 멈춰졌다. 가운데 적힌 세 가지 탕 때문이었다. 꼬리탕은 꼬리곰탕으로 금방 연결이 되었다. 왕족탕도 생소하긴 했지만 족을 보니 그게 우족탕임을 알 것 같았다. 잠깐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 옛날 왕족(王族)이 자기네들끼리만 모여서 먹던 탕인가, 아니면 왕족(王足)으로 끓인 탕인가? 그 아래 적힌 우두탕에서는 고개가 저절로 갸웃거려졌다. 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 우두(牛頭)가 소머리를 가리키는 말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그게 여인네들 젖꼭지를 이르는 한자말 유두(乳頭)로 보였던 것이다. 유두탕, 젖꼭지탕.식당 안으로 들어서면서 카운터에 서 있는, 얼굴이 동그랗고 앞이마가 훤한 60세 전후의 주인 남자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저 우두탕이라는 게 혹시 소머리국밥 아닌가요? 그랬더니 그 남자, 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거, 사람들이 자꾸 소머리국밥이라고들 하는데, 그건 어디 촌구석 장터에서나 쓰던 말이라서 내가 바꿨죠. 도대체 소머리국밥이 뭡니까? 품격 떨어지게.내 식당이니 내 맘대로 이름 좀 바꿨기로서니 당신이 나서서 무슨 상관이냐는 투의 대답에 묻는 쪽에서 오히려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 우두탕인지 유두탕인지를 한 그릇 맛나게 먹고 이빨을 쑤시면서 식당을 나오다가 메뉴판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다들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쓰고 불러 온 꼬리곰탕, 우족탕, 소머리국밥을 두고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적어 붙여서 사람을 헛갈리게 만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두탕이라고 이름을 바꾸면 주인 말대로 식당의 품격이 정말로 높아지기는 하는 걸까.언어, 특히 어떤 대상의 명칭은 본디 역사성과 사회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붙은 말은 그대로 잘 어루만져서 쓰면 그만인 것 아닌가. 그게 옳은 거 아닌가. 그걸 굳이 이런 식으로 바꿔야 했는가. 다른 건 몰라도 우두탕 만큼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메뉴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었다. 이 식당 주인은 분명히 뛰어난 언어적 리듬감과 시각적 센스를 갖춘 사람이겠다. 메뉴판도 세 글자씩 꼭 맞추어서 제작하고 싶었던 거겠다. 소머리국밥이 눈에 제일 거슬렸겠지, 다섯 글자나 되니까. 그 흔한 도가니탕이 메뉴에 없는 것만 봐도 틀림없겠다. 아니다. 진짜 이유는 딴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까 그 주인이 강조했던 것처럼 이 식당만의 독창적이고 품격 있는 음식문화를 창달하고 싶었던 거겠다. 그러니 소머리국밥이라는 이름이 사람들 입에 아무리 친숙한 말이어도 그걸 무시하고 우두탕을 고집하는 거겠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다 보니 맨 위에 적힌 갈비탕이 눈에 확 들어왔다. 동시에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식당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아까 그 주인한테 그 말을 전해주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기왕 고치기로 한 거, 이참에 갈비탕도 이름을 좀 품격 있게 바꾸면 어떨까요? 가령 늑골탕 같은 식으루다가요. 그냥 이빨이나 열심히 쑤시기로 했다. 우석대 교수*글의 내용 중 식당 주인과의 대화 부분은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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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2 23:02

[연재를 시작하며] 어쩌다 마주친 문구로 사회 다시 보기

송준호 우석대 교수가 새봄을 맞이해서 본보 독자들과 다시 만난다. 작년 봄부터 여름까지 본보에 절찬리 연재했던 글쓰기-이제 당신도 시작하라 이후 약 7개월 만이다. 그 사이 송 교수는 연재했던 글을 모아 책을 발간했고, 몇 군데 강연에도 불려가서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거라고, 글을 쓰면 자기 자신을 확실히 바꿔나갈 수 있다고 뻥(?)도 좀 치면서 바쁘게 지냈단다.이번 연재물은 오늘의 사회 현상과 우리 모습들을 필자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기획이다. 우리말의 깊은 맛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사진 한 장 쳐다보면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쓸 계획입니다. 일상의 도처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문구나 장면을 앞에 두고, 거기 적힌 우리 사회의 보편화된 인식이나 특정한 현상에 야유를 보내기도 하고, 뒤통수에 대고 빈정거리기도 하고, 손가락질도 좀 곁들이고, 또 때로는 어깨를 토닥여주기도 하는 것이지요.그는 이번 연재를 위해 적잖이 준비를 했다. 그동안 이러저런 생각을 일으키는 문구를 대할 때마다 그걸 스마트폰에 담아두었단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가장 좋지요. 글과 함께 실리게 될 사진을 독자들도 함께 보시면서 각자 떠오르는 생각과 제가 쓴 글의 내용을 비교하시면 글을 읽는 재미가 더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송준호 교수의 스마트폰으로 세상읽기는 매주 수요일에 독자들을 찾아간다. 필자는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소설창작과 글쓰기지도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좋은 문장 나쁜 문장 문장부터 바로쓰자 송준호의 문장 따라잡기 나를 바꾸는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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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9 23:02

1. '삽질' 그 우직함에 대하여 - 신념을 가진 '삽질'은 값지다

그 옛날 남정네들은 식솔들이 살아갈 집을 짓고, 농사를 지었다. 그 두 가지 짓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가장의 기본이었다. (물론 여자들은 밥을 짓고, 옷을 지었다.) 농사를 짓는 데 꼭 필요한 연장 중 하나가 괭이와 삽이었다. 그런데 이 삽의 뜻이 다양하다.삽은 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뜻으로 쓰인다. 거 왜 기공식 같은 걸 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한 높은 사람들이 예쁜 리본을 매단 삽으로 미리 쌓아놓은 흙을 두어 번 떠서 던지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던가. 그게 바로 첫삽이다. 우리말의 -질은 어떤 행동을 낮춰 부를 때 주로 쓴다. 훈장질, 도둑질, 손가락질, 선생질 등이 그런 예다. 삽질도 예외가 아니다. 엉뚱하거나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는 걸 비꼴 때도 이 말을 쓴다. 그런 경우 삽질은 헛일이고, 그래서 헛삽질인 것이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삽질하지 말라가 된다. 옳은 말이다. 쳐다만 봐서는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 없다는 말을 차돌같이 믿고 열심히 도끼질을 해야 나무를 올라가든지 넘기든지 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삽질 정신이다. 불도저 앞에서 삽질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 어떤 불도저가 굉음을 내지르며 흙을 뭉텅뭉텅 퍼내도 한 삽 한 삽 꿋꿋이 떠낼 줄 아는 게 삽질 정신이다. 그걸 잘 보여준 인물이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다. 거의 맨주먹으로 월남한 그는 삽질 정신으로 수많은 실패를 딛고 일어섰다.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리면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나무랐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앞을 가로막는 이들한테는 언제 해본 적은 있느냐고 호통을 쳤던 이가 바로 정주영이다.당시 5백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배짱 좋게 들이대서 26만 톤짜리 선박 공사를 수주했던 사람이니 그만하면 말 다했다. 말년에는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소떼 천 마리를 자신이 만든 트럭에 나눠 싣고 북한으로 향하는 장관까지 연출했다. 삽질 정신의 대가는 따로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고졸, 그것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학력의 전부인 그는 순전히 삽질 하나로 자신을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라도 말로 헛심 팽기는 일의 대가였던 것이다. 부림사건에 뛰어든 것부터가 그랬다.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그는 정치 생명이 걸린 3당 야합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삽질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다음은 알려진 대로다. 국회의원과 시장 선거 모두 삽 하나만 달랑 들고 부산 지역에 출마했다가 불도저에 밀렸다.불도저의 힘을 맹신하는 이들에게 그의 행보는 늘 삽질 자체였다. 제 무덤을 파는 한심하고 철없는 짓이었다. 스스로를 수렁으로 몰고 가는 무모하기 짝 없는 행동이었다. 그야말로 -질에 불과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노사모가 그걸 증명했다.대통령이 되고도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삽질하기를 결코 주저하거나 멈추지 않았다. 기존의 잘못된 관행을 청산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누군가 가야 하는 길이라면 아무리 그게 삽질이라 해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이른 죽음이 그래서 더욱 아픈 것이다. 불도저로 흙을 파내거나 옮기는 건 손쉽고 빠르다. 그게 상식이고,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길이다. 그에 비하면 삽질은 수십 수백 배 고되다. 그래도 신념을 가진 삽질은 값지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힘은 불도저가 아니라 그런 삽질에서 나온다. 어느 가든의 마당 한쪽에서 발견한 그림의 삽질닷컴은 거기 적힌 그대로 미니 포크레인 임대와 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어느 사업체의 이름일 것이다. 헛일로 보편화된 삽질을 업체명으로 쓴 발상이 참신하다. 게다가 삽질 정신을 감안하면, 이 또한 재미도 있지 않은가.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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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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