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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인디언 체로키 족은 11월을 산책하기 알맞은 달이라 한다지요. 바삭거리는 햇볕이 산책하기 딱 좋은 오후였습니다. 산책이란 본디 느긋하고 한가로워야 하거늘, 시절 탓인지 오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걸어 걸어 한식경, 석양이 사그라드는 모닥불만 같았습니다. 식어가는 볕기를 부지깽이로 다독여 두고 싶었습니다. 나프탈렌 냄새가 배어있는 도톰한 점퍼를 챙겨 입고 나선 세상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동네 앞 들길을 멀리 돌아오는 11월의 한나절이 배추 꼬리처럼 짧기만 했습니다. 앞산에 어스름, 움츠려 옷깃을 여밉니다. 한낮에 쟁여 두었던 볕내 이미 시들었습니다. 성심으로 하루를 산 사람들의 어깨를 감싸는 저 어스름은 안식입니다. 미처 돌아오지 않은 주인을 기다리는 검둥개가 동구 밖을 어슬렁거리듯 가로등 하나둘 밝아옵니다. 저기 고샅을 지우며 어둠이 밀려옵니다. 내 앞에 우뚝 설 어둠도, 막달인 12월도 다른 세상의 것은 아니겠지요. 무릎 담요 덮어주듯 구름이 낮습니다. 밤이 지나야 내일입니다.
수북한 낙엽을 보아 계절은 이미 저 하늘보다 깊었음을 압니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엣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자욱해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가 생각나, 한 잔 커피가 생각나 떨어진 나뭇잎을 그러모아 태웁니다. 시몬, 나뭇잎이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사드락 사드락 구르몽의 <낙엽>을 밟아봅니다. 은행나무 아래 떨어진 샛노란 몇 닢을 주우려다가,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김광균의 <추일 서정>을 떠올립니다. 일삼아 한나절 나무를 흔들고, 떨어진 낙엽을 마대 자루에 쓸어 담는 청소부 아저씨가, 낭만이라곤 모르는 인사만 같아 그만 쓸쓸해집니다. 그이의 수심(愁心)을 모르는 내가 더 슬퍼집니다.
쪽빛, 코발트 빛은 저 파랑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파랑새 한 마리 날아오릅니다. 최초의 파랑은 3400여 년 전 이집트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두건에 있는 줄무늬였다지요. 그 파랑은 겨우 19세에 급사한 비운의 소년 왕을 다른 어떤 파라오보다 유명케 했다지요. 가만 눈을 감습니다. 파랑을 헤쳐갑니다. 아득히 먼 시절, 아득한 사람에게 건넸을 붉었거나 분홍이었을 장미를 생각합니다. 파랑은 하늘이지요. 파랑을 신의 색이라고도 하지요. 인간이 감히 어쩔 수 없는 색이라는 말씀이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장미꽃에 파랑이 없었답니다. 옛이야기지만, 특별한 날엔 염색한 파랑 장미를 쓰기도 했답니다. 꽃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요. 청바지로 갈아입습니다. 주머니에 땅콩 한 줌 없어도 좋겠습니다. 작고 가벼운 시집 한 권 챙겨 들고 나섭니다. 바다 한가운데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 나갑니다. 없는 돛이, 없는 삿대가 저 하늘 어딘가로 데려다줄 것만 같습니다. 억새보다 가볍게 하늘거립니다.
뿌리가 드러났습니다. 무성할 땐 몰랐는데 맨땅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스르르 자꾸만 풀리는 손, 바윗돌을 움켜쥐고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한여름 내내 내어주던 그늘이 가지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살랑거리던 바람이 잎새의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비탈에 선 나무, 잎이 지니 비로소 뿌리가 보입니다. 비탈도 힘에 부쳤을 터, 폭우에 흙이 다 쓸려 서 있기가 죽기 살기였겠습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세 곶 됴코 여름 하나니, 그래요 꽃과 열매가 다 뿌리의 일입니다. 꽃병의 꽃은 뿌리가 없기에 금시 피고 금시 진다고 하지요. 나무는 가지의 바깥 부분을 연결한 원까지 뿌리를 뻗는다고 하지요. 그 길이만큼 뿌리를 내린다고 하지요. 보이는 건 가지와 잎이지만 나무의 근본은 보이지 않는 뿌리입니다. 세월인 듯이 이끼가 푸르고 시립니다. 셋 잘리고도 여섯 가지를 뻗었던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여섯 가지와 흔들리는 무수한 잎을 견딘, 지금은 쓰러지고 없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의 뿌리도 땅속 집채만 한 바위를 꽉 움켜쥐고 있었을 터입니다.
단풍나무, 졸참나무, 개서어나무, 팽나무, 사람주나무가 불붙기 시작했다. 그만 돌아가려는 거다. 불이문 지나 경내, 가을볕이 밭는다. 문수사 만세루 토방에 걸터앉는다. 대웅전 석축에 이끼가 푸르다. 세월이 저만치 청량산 너머로 멀어졌단 말씀이겠다. 문수전 뒤 비탈에 꽃무릇 몇 포기 시들고 있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운명을 거스르려는 듯이 서둘러 돌아가고 있는 저 꽃, 저 오기 전 다녀간 잎을 따라가고 있다. 꽃무릇, 돌아갈 때 더 눈에 들어오는 꽃이다. 왔던 건 가고야 마는 게 세상 정한 이치 아니랴. 용지천 감로수로 목을 축인 산새 한 마리 가을 속으로 사라진다. 물확 옆 수국 져버린 지 오래다. 범음각 앞 배롱나무꽃도 구 할 너머 돌아갔다. 이미 갈 때를 놓쳤다는 듯 서두르는 빛이 역력하다. 문수전 뒤 감나무가 매단 까치밥 붉다. 돌아가고 있는 것들이 바람 앞에 팔락대는 마지막 촛불보다 밝다. 돌아간다는 것, 다시 오겠다는 말 없는 언약이다. 문수사를 뒤에 둔다. 잉걸불 저 꽃무릇이 재가 되어 다시 올 잎이 푸르다.
둔한 건지 모자란 건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형편없고 못난 것들 죄다 호박 같다 해도 그저 둥글둥글 말 못 하니까요. 암만 그래도 향기 없는 꽃이 어디 있고, 곱지 않은 꽃이 또 세상 어디 있답니까? 애써 피워도 꽃이 아니라니요? 꽃 아니면 어디 벌 나비가 거들떠나 본답니까? 한겨울 굴풋 할 때 죽 쑤어 드시라고 뙤약볕 아래 익으면 늙었다 하시지요? 아직 풋풋하면 애라 하고 철들면 늙은이라 하시니 참. 맞아요, 호박입니다. 추적추적 가을비 오시는 날 부침개 부쳐 드시라고 자꾸 매달잖아요, 행여 쓸쓸한 마음 환하게 밝히시라고 노랗게 피었잖아요. 어느새 아침저녁으론 제법 싸늘하네요. 울타리 너머로 하나 밀어 놓는 것, 은근슬쩍 밭둑 넘어가 한 덩이 매달아 놓는 것 다 마음이 급하다는 증표겠지요. 상강(霜降) 전이라 아직 서리 내리지 않았네요. 세 살배기 주먹만 한 채 못 영글 호박 하나 따다가, 호박순 분질러다가, 확독에 으깨고 문대세요. 쌀뜨물 받아 넣고 국 끓이셔요. 분명 넝쿨째 굴러온 맛일 겁니다.
그렁그렁 머금고 있습니다. 고개 들어 올려다본 하늘을 툭 건드리면, 그만 팽그르르 떨굴 것 같습니다. 활로 그으면 라라 라 손가락으로 튕기면 솔 솔 솔 거릴 듯합니다. 아침에 빠진 여섯 살 손녀의 헌 이를 던지면 퐁, 흔적도 없이 받아줄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도도 도 파 파 파 소리가 들립니다. 가만 귀 기울입니다. 뒷산 도토리 한 알 떨어져 비탈을 굴러가는 소리입니다. 그 한 알을 쫓아가는 다람쥐의 잰 발걸음입니다. 하늘과 땅, 가을이 이리도 투명한 것은 사람의 눈이 맑아져서입니다. 사람의 귀가 맑아져서입니다. 무반주 가을 소나타(sonata)입니다. 그래요, 반주는 없어도 그만입니다. 파란 하늘에 오선(五線)이 그어져 있습니다. 가운데 두 가닥이 겹쳐 보이는 전깃줄입니다. 연미복을 입은 제비는 이미 돌아갔을 터, 아침저녁 음표처럼 내려앉아 까치랑 참새가 가을을 연주하겠지요. 전기는 건너가서 세상을 밝히고, 새소리는 건너와서 사람을 밝히겠지요. 음표는 스스로 그려 넣으라고 비워 두었습니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닙 날러오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잦이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메, 단풍 들것네) 추석이 지났습니다만 감잎 아직 골붉지 않았습니다. 마당귀에 가을이 깊어 갑니다. 이미 피어난 꽃이 지는 계절인 줄 알았건만, 꽃이 핍니다. 가을꽃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벌써 잎을 떨군 나무 때문인가요? 가을꽃이 또렷합니다. 꽃이 극성스럽지 않은 것은 저 강마른 햇살 때문입니다. 밭아가는 저 가을 강처럼 군더더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옛 백제 땅에 피어서일 겁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습니다. 화이부치(華而不侈),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습니다. 가을꽃,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겠습니다. 머지않아 장광에도 골붉은 감잎이 날아들겠지요. 놀란 듯이 치어다볼 누이의 마음도 골붉겠지요. 저를 다독이며 가을꽃이 피었습니다.
새들은 무게를 모를까요? 천근만근, 바람이 거세게 불던 어느 날 바닷가를 찾았습니다. 새들은 언제나 가볍습니다. 갈매기 한 마리 푸르게 날아갑니다. 날개가 돋쳤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날개가 있다면 훨훨 날 것 같습니다. 살다 보면 제 그림자조차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지요. 새들도 제 몸뚱이를 띄워 올리는 날개마저 짐이 되는 날 분명 있을 터이지요. 하얗게 파도가 부서집니다. 맞바람입니다. 새들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뼛속을 비웠기 때문입니다. 오줌보조차 버렸기 때문입니다. 때론 숨마저 참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 초가을 담장 너머로 마지막 장미가 곱습니다. 꽃이 환하다고 속조차 하냥 웃고 있는 것도 분명 아닐 것입니다. 우아하게 노니는 호수의 백조도 물 아래에선 쉼 없이 물갈퀴 질을 한다지 않던가요? 새들은 언제나 노래를 합니다. 마음이 무거우면 날아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수한 바람이 불었지만 새들은 여전히 하늘을 납니다. 그래요, 새들처럼 비워야겠습니다.
백로(白露) 지나자 풀잎에 이슬이 차다. 햇볕도 한풀 숨이 죽었다. 어느새 긴소매 차림이다. 나를 따라잡는 청년들, 종아리에 알통이 배어 있다. 스쳐 가는 자전거가 휙 바람을 일으킨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두어 자 더 깊어진 하늘에 딸려간 걸까, 잠자리도 높다. 유난히 길었던 장마, 좀체 가지 않을 성싶던 여름이 벌써 저만치 모퉁이를 돌고 있다. 멀리 돌아가기 싫어 콩 콩 징검다리를 건넌다. 잔잔한 줄만 알았던 냇물도 가까이 보니 잔물결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공사장에 기계 소리 요란하다.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를 놓고 있다. 잠시라도 멈춰서면 큰일 난다는 듯이. 한여름 북적이던 다리 밑 걸상에 앉아 할머니 몇,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본다. 등판이 허전해 보이는 건 계절 탓일까? 내 마음 탓일까? 하늘의 구름도 어디론가 흘러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냇물뿐이랴, 구름뿐이랴. 그새 억새가 피었구나, 어제 차창 밖으로 혼잣말을 던지던 친구의 말 흘려들었다. 귀 어두워 못 알아먹었다.
별도 달도 뜨지 않았습니다. 바람 한 점 없었습니다. 답답하고 깜깜한 밤이었지요. 새벽은 쉬이 오지 않았습니다. 들지 못한 잠에도 꿈속은 마냥 어지러웠습니다. 밤새 뒤척대며 동트기만 기다렸지요. 채 걷히지 않은 어스름 속, 긴 장마에 휩쓸린 갈대숲에 꽃 한 송이 보이네요. 삼천에 새로 생긴 모래톱에 왜가리가 얼쩡거립니다. 징검돌은 반쯤 묻혔고 냇물은 아직도 흐릿합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다가서는 것은 모악입니다. 쓰러진 갈대 가운데 홀로 짯짯합니다. 지금은 먼 막내 고모의 치마처럼 꽃분홍입니다. 양귀비보다 더 고운 부용화입니다. 호미도 안 들고 어둔 마음의 잡초를 환하게 뽑아줍니다. 호락질로 끙끙, 내방친 내 마음속 일손을 거듭니다. 쓰러진 갈대를 헤집고 다가서 한참 넋을 놓습니다. 겨우 한 송이로 채 밝지 않은 새벽이 깨어납니다. 꼭 간밤 꾸지 않은 꿈속에 스친 얼굴만 같습니다. 또 몇 사람 다가와 우북한 마음속 김을 매고 갑니다. 돌아오며 생각합니다. 내 마음 텃밭도 건사 못하는 나, 부용의 꽃 품은 언제 앗을는지요.
바퀴를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합니다. 기원전 3,500년 경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살던 수메르인들이 처음 발명했다지요. 동그랗게 그냥 통나무를 잘랐던 바퀴가 마차가 되고 자전거가 되고 자동차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길이 멀어지면서 세상은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발로 걸어갔던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자전거로 오갔던 길을 자동차를 타고 달립니다. 더 빠르게 더 멀리 가봐도 무지개는 또 그만큼 멀어지는데 말입니다. 씽씽 달리던 자전거가 멈췄습니다. 내달리던 세상이 빨강 신호에 걸렸습니다. 도로변 철책에 자전거가 푸르게 섰습니다. 잠시 멈추라고 나팔꽃 넝쿨이 붙잡았습니다. 뚜뚜 뚜 나팔꽃이 피었습니다. 달리던 자동차도 멈춰 섰습니다. 내가 멈추어야 남이 달리고, 남이 멈추어야 내가 달릴 수 있습니다. 앞만 보고 가다가는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설 때와 달릴 때를 알아야 최고겠지요. 일제 강점기 때 자전차대회를 휩쓸었다던 엄복동도 멈춰 설 때는 멈췄을 겁니다.
샘물은 시원했습니다. 우물물은 시렸습니다. 샘은 마을이 들어서기 전부터 샘솟았을 터입니다. 우물은 터를 잡아 집을 지은 뒤 팠을 터입니다. 목마른 누구라도 마실 수 있게 낮았고 행여 삼대독자 빠질세라 높았습니다. 동네 한가운데 샘은 주인이 없었습니다. 우물은 항상 대문이 닫혀있던 기와집 거였습니다. 샘터는 왁자했고 우물가는 고요했습니다. 바가지로 떴고 열 길 두레박을 내려 퍼 올렸습니다. 샘에는 별도 달도 떴습니다. 그믐밤 같은 우물엔 물 긷는 얼굴조차 뜨지 않았습니다. 새벽 샘물로 가마솥에 밥을 안쳤고 첫 우물물로 조왕신께 빌었습니다. 샘터에선 탁탁 탁 빨랫방망이를 두들겼고 우물가에선 시할머니 흰 고무신을 짚수세미로 씻었습니다. 항상 퐁퐁댔고 언제나 입 다물고 있었습니다. 샘을 보고 하늘을 보았으며, 하늘을 보고 우물을 보았습니다. 찰랑거렸고 철렁거렸습니다. 우물이 말랐습니다. 돌확엔 세월이 고였고 장독은 깨졌습니다. 집안 내력을 발설할 수 없다는 듯이, 우물은 꾹 덮개를 쓰고 있습니다.
운다. 뜨겁게 매미가 운다. 열댓 평 느티나무 그늘이 들썩인다. 뭉실뭉실 구름도 목화송이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다, 악을 쓴다. 폭포수 아래 소리꾼처럼 목울대를 세우지만 아직은 떡목이다. 수리성까지는 멀고도 멀다. 뜨건 피 서너 동이는 쏟아야, 똥물 서너 말은 마셔야 명창이다. 백로(白露) 지나고 풀 먹인 옥양목 홑청 다듬이질 소리가 나야 득음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겁다. 아름드리 둥구나무를 마냥 올려다보던 소싯적, 동네 형이 잡아 준 매미는 연애편지 심부름 값이었다. 타는 삼복에 둥구나무도 손부채처럼 활랑활랑 잎새를 흔들던 그 시절, 매미 소리는 없는 선풍기보다 더 시원했다. 어느덧 가까운 것보다 먼 것이 더 잘 보이는 나이, 느티나무를 올려다보니 한눈에 매미다. 뙤약볕에 달궈진 양철 지붕에 발이라도 덴 듯 뜨겁게 운다. 매미는 짧은 제 생이 아쉬워 저토록 악을 쓰는 것이 아니다. 매미, 목하 소리 공부 중이다.
아무리 조심조심 내딛어도 불어난 위봉폭포 수 소리보다 더 쿵쿵거립니다. 꽃잎처럼 가벼운 마음 아니라 귀 떨어져 나간 저 옥개석보다 무거운 내 발걸음 탓입니다. 완주 소양 위봉사(威鳳寺) 보광명전 앞마당, 꼭 우산만 같은 소나무 아래 돌탑을 돌고 돕니다. 일주문 지나 천왕문 축대 밑에 봉황을 닮아 피었습니다. 행여 쉬이 눈에 띌세라 빨강 아닙니다. 두고 온 저 아래 속세처럼 분홍, 분홍입니다. 떨군 고개 들어 목젖에 걸린 낮달을 삼키는/ 돌탑 뒤 저 사미니/ 눈물 감추는 게 아니다 어룽어룽 자꾸만 따라붙는 그림자/ 산문 밖으로 밀어내는 거다(졸시 <목어>). 그래요, 인연이란 끊기가 더 어려운 거라지요. 굽이돌아 위봉사입니다. 돌탑을 도는 내 발걸음이 간간이 우는 천둥소리보다 더 쾅쾅거립니다. 잠 못 들던 밤, 마음 돌절구에 저 분홍 꽃잎을 찧었더랬지요. 손톱 끝 꽃달이 지기 전에 첫눈이 내렸고요. 달포 넘게 장마, 파랗게 이끼 앉은 바위보다 축축합니다.
거미줄에 걸린 빗방울이었습니다. 떡갈나무 잎새에 덮인 옹달샘이었습니다. 졸졸 속살거리며 실개천은 몸집이 커졌지요. 동네 앞을 지날 때쯤 제법 찰랑거렸지요. 개울물에 종이배를 띄우고 따라가던 까까머리 시절도 있었지요. 막 여드름이 돋던 시절 맞닥뜨린 강물은 얼마나 먹먹하던지요. 그 큰 강 앞에서 얼마나 벅차올랐던지요. 수평선 너머를, 은하수 건너를 꿈꾸며 잠 못 이루던 때 있었습니다. 사나흘 퍼부었습니다. 큰물 구경 나갔던 생각에 집 앞 냇가로 나갔습니다. 붉덩물에 둥둥 떠내려가던 호박덩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윗동네 누구네 허름한 살림살이도 떠내려오지 않았고요. 어려선 신이 났었는데 나잇값 못하고 겁먹었습니다. 길을 끊을 듯이 둑을 넘을 듯이 달려드는 큰물이 무서워 그만 돌아섰습니다. 비 그치고 늘 거닐던 산책길, 무성하던 갈대가 드러누워 있습니다. 밤새 잡아끄는 손 뿌리치느라 몸살이 난 것이지요. 홍수에 쓸린 갈대숲, 쓰러진 달맞이꽃이 허리를 세웁니다. 대낮에 노랗게 꽃불 켜 들었습니다.
풍광 좋은 곳이랍니다. 열여섯 평도 아니 여섯 평 컨테이너랍니다. 김 시인, 삼십 년 봉직했던 직장을 물러 나와 덜컥 일을 저질렀노라 했습니다. 상추 몇 잎 풋고추 몇 개, 소원이었답니다. 평생 최고의 사치라네요. 동서남북 벽마다 창을 냈습니다. 마루도 없는 단칸이지만, 그림은 세상에 단 한 점뿐인 진품만 빌려 왔노라 침이 마릅니다. 동쪽 벽엔 도라지밭 건너 대숲 한 폭, 남쪽 창엔 구름 걸린 내장산 서래봉이 한 폭, 가히 명화입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 삼 간 지어내어/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딱 면앙정 송순입니다. 빚 무서운 줄 알아라! 평생 못이 귀에 박혔지만, 빚도 이런 빚이라면 기꺼이 지고 살 만하겠습니다. 뒷산 멧비둘기도 목이 쉬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남창에 걸릴 가을 서래봉은 얼마나 시릴까요? 겨울 동쪽 벽엔, 흰 눈을 뒤집어쓴 푸른 대숲이 골똘히 생각에 잠길 테지요. 마음으로 뚫어준 달 밝고 별 초롱 할 하늘 창, 하이타이 대신입니다.
가른 듯 가르지 않았습니다. 가리지 않은 듯 가렸습니다. 헛담입니다. 내외가 엄격하던 시절이었으니 안팎을 구분해야 했겠지요. 안채와 사랑채를 가를 필요가 있었겠지요. 안주인 민망하지 않게 사랑채를 가렸습니다. 붙박이 사랑손님 체통 안 떨어지게 안채를 떼어놓았습니다. 담장 안쪽에 담인 듯 담 아닌, 담 아닌 듯 담인 내외담을 지었습니다. 벽보다 덜 완고하게 구분지었습니다. 정읍 김명관 고택, 바깥주인이나 쥐걸음으로 드나들고 참새 헛기침으로 넘나들게 지었습니다. 사랑채 댓돌 위를 살필 수 있게 반담입니다. 그 너머로 헤아려 늦지 않게 술상을 내고 때맞춰 밥상을 들였겠지요. 꽃으로 경계를 놓는 꽃담처럼 마음에나 지은 담입니다. 말이 벽이 되는 세상입니다. 담장 위 가시철망을, 깨진 유리병 조각을 걷어내야 하겠습니다. 콘크리트 담 허물고 흙으로 반담을 지어야겠습니다. 견고와 완강을 허물어 헛담처럼 경계인 듯 아닌 시늉을 지어야겠습니다. 가시 달린 덩굴장미는 말고 함박꽃을 피워, 담장 안팎에 함박웃음 환했으면 좋겠습니다.
주구장창 내린다. 그러께, 작년엔 마른장마더니 올해는 비가 많다. 비 내리는 소리 지글거린다. 꼭 부침개 부치는 소리 같다. 비 오시는 날 파전, 호박전, 부추전, 감자전 생각에 출출해지는 건 다 이 빗소리 때문이다. 장마통에 호박 크듯 한다는데, 없는 남새밭엔 못 가고 마트에 간다. 호박 부추 감자에 막걸리 한 병, 마음이 먼저 거나해진다. 막걸리는 찌그러진 주전자다. 유리잔 말고 양재기가 제격이다. 단추 하나쯤 풀어진 채 먹어야, 옆자리보다 더 목청을 돋워야 제맛이다. 독작 말고 서넛은 둘러앉아, 권커니자커니 돌려야 제격이다. 뼈째 썬 병어회를 깻잎에 싸 먹으며, 막걸리는 배불러서 싫다는 싸가지를 씹어야 제맛이다. 사골 고듯 조린 고등어 조림 한 접시에 한 주전자 추가다. 어디 밥만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더냐? 맨정신으로 건널 수 있는 세월이더냐? 멀쩡한 화장실 두고 골목에 오줌 갈기듯, 막걸릿집 벽면에 가버린 사랑을 변해버린 우정을 달아나는 세월을 휘갈겨야 제맛이다. 축축한 날엔 막걸리가 딱이다.
수많은 섬이 있지요. 저 아래 남쪽에 마라도, 동해 울릉도 밖 독도, 서해 최북단 백령도, 우리나라에만 삼천 개가 넘는다고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섬은 고립이지요. 뭍에서 불과 수백 미터 밀려난 섬부터 수백 킬로미터 나앉은 섬까지, 거리와 크기 상관없이 고독하지요. 물에도 분명 길이 있건만 쉽게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지요. 하여 그 옛날 중죄인들을 섬에 유배 보냈을 거고요. 담도 없고 대문도 없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섬보다 낮은 물 울타리만 있을 뿐인데 탱자나무를 둘러친 듯 멀고도 멀지요.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이라, 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이라 애가 타 부르던 노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뭍이기도 섬이기도 합니다. 섬으로 내몰기도, 섬처럼 내몰리기도 한다는 말씀이지요. 외따로이 떨어져 앉은 섬처럼 외로운 시절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만 섬이 있는 게 아니라 한 개 섬인 내 안에도 또 섬이 있습니다. 나조차 다가설 수 없는 내 안의 나, 나 아닌 나이지요. 내 안의 유배지 그 섬에 가닿고 싶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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