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문화의 중심지…굳은 절개, 항일투쟁으로
태인천·정읍천·내장천·고부천 등 오래된 한지의 실핏줄처럼 뻗어있는 동진강 물길에는 수많은 위인(偉人)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
최치원으로 상징되는 정읍 지역 선비의 맥은 조선시대 김회련·정극인·송세림·김약묵·신잠·이향 등으로 이어졌으며, 오늘까지 도도한 절조와 풍류를 더하고 있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최경선·김덕명 등 동학농민혁명의 앞선 이들 역시 동진강가의 사람들이며, 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이인좌의난·항일운동·독립운동 등 국가의 위기에도 정읍을 중심으로 한 선인들은 늘 빼어난 기상을 자랑했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재민과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안의·송흥록, 정묘호란의 장군 김준, 이인좌·박필현의 난을 평정한 의금부도사 김도언, 한말 의병활동을 한 김기술, 독립운동가 백정기, 3·1운동의 민족대표 박준승 등이 그들이다. 을사조약 체결에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1851~1916)은 옥구 출신지만,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들을 모아 훈련시켰던 곳은 칠보면과 산내면, 동진강 어귀다.
▲ 동진천의 최치원과 정극인
동진강 본류가 흐르는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태산선비문화사료관(관장 안성렬)에서는 살아 있는 고운 최치원(857~?)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상춘곡」의 배경인 태산(현 칠보) 지역의 선비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그곳에 채용신(1850~1941)의 붓에 담긴 최치원의 초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료관 바로 옆에는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1401~1481)의 동상이 있다. 그는 단종이 폐위되자 정언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인 태인에 은거하면서 이 작품을 지었다. 속세를 떠나 자연에 묻혀 봄 경치를 완상(玩賞)하며 안빈낙도를 노래한 이 작품의 시작 부분 '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 옛사람 풍류랄 미찰가 맛 미찰가'에서 '옛사람'은 최치원의 풍류를 말한다. 태산의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이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축조해 유상대(流觴臺)를 만들고 검단대사와 더불어 풍류를 즐긴 역사를 흠모하는 것. 굴곡진 작은 물길을 만들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그 잔이 수로를 돌아 앞에 오면 시 한 수를 읊던 선비들의 풍류다.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신라시대에 행해졌던 이 놀이는 칠보의 동진강변에 흔적을 남겼다. 돌의 홈을 파서 만든 경주의 포석정은 인공적인 성격이 짙지만, 동진천의 물을 끌어들였던 유상대는 칠보팔경에 꼽힐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했다. 1700년대 큰 홍수로 유실된 유상곡수 수로 터에는 최치원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이 건립한 감운정(感雲亭)이 들어서 있고, 그 앞에는 유상대의 내력을 상세히 알려주는 유상대유지비가 있어 유상곡수의 옛터를 증명하고 있다.
유상곡수에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 술 한 잔을 띄워놓고 시를 읊다보면 어느새 유유히 흘러오는 술잔은 한 떨기 꽃잎처럼 보였을 것이다. 매년 11월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무성서원에서 최치원태산선비문화축제가 열린다.
▲ 태인천의 정순왕후와 숙빈 최씨
태인천이 흐르는 칠보와 태인에는 조선 단종의 비(妃)인 정순왕후(1440~1521)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자취가 있다. 정순왕수의 태생지는 칠보면 소재지인 시산리 동편마을. 그는 판동녕부사 송현수(?~1457)의 딸로 14세에 단종 왕비로 책봉됐으나, 18세에 홀로 된 뒤 82세까지 생애를 청빈하게 보냈다. 시산리 남전마을에 유허비각이 있다.
태인면 거산리에 있던 대각교(大脚橋)는 조선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와 깊은 인연이 있다. 숙빈 최씨는 천민 출신 하급 궁녀에서 정1품 후궁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한 여인의 입지전적 성공담을 그린 MBC드라마 <동이> 의 주인공. 대각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이 영광 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이 다리에서 만나 데려다 키웠다는 '거지소녀'의 이야기가 전하는데, '의복은 비록 남루하나 그 나이와 용모의 귀여움은 자기의 딸과 비슷하였다'는 그 소녀가 숙빈 최씨로 알려져 있다. 지금 그곳에는 <만남의 광장> 이 조성돼 있다. 만남의> 동이>
▲ 정읍천의 송시열과 이순신
숙빈 최씨가 왕의 눈에 들지 못할 무렵, 장희빈이 낳은 아들(이윤)의 세자책봉을 막으려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자신이 화를 입은 이가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자 서인의 수장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 정읍 시내를 관통하는 정읍천은 우암이 사약을 마시고 쓰러진 자리에 세운 추모비 '송우암 수명 유허비'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충렬사가 가까이 있다. 유허비는 한 인물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우는 비. 우암은 숙종 15년인 1689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 수성동에서 사약을 받고 83세의 나이에 죽었다. 6년 뒤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고암서원이 세워졌으며, 1737년 이 자리에 비가 세워졌다.
충렬사는 충무공이 45세이던 1589년부터 1년 4개월 동안 정읍과 태인의 현감으로 재임하면서 쌓은 치적을 기려 1963년 준공되었다. 성황산 서쪽에 공원 형태로 조성된 충렬사는 정읍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매년 4월 28일 이순신의 덕과 충의 정신을 기리는 제를 올린다.
▲ 내장천의 안의와 손홍록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그 가치가 더 확고해졌다. 그러나 태인의 선비 손홍록(1527~1610)과 안의(?~1593)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조선 전기의 방대한 역사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춘추관과 성주사고·충주사고의 실록은 모두 불탔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을 비롯한 정읍 사람들의 죽음을 불사한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은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 180년 동안의 실록과 서책들이 불타 없어질 것을 걱정했고, 사재를 털어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과 비래암에 옮겨 보관했다. 이들과 함께 영은사(현 내장사)의 승려 희묵과 무사 김홍무 등 의병 100여 명이 함께 했다. 두 사람은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남천사에 향사되었다.
▲ 고부천의 동학농민들과 백정기
고부천에 흐르는 동학농민혁명의 장장(章章)한 기운은 항일운동으로 이어진다. 정읍 영원면 은선리 구파 백정기(1896~1934) 의사의 유적지다. 윤봉길·이봉창과 함께 3대 의사(義士)로 불리는 구파는 1933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주중공사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돼 이듬해 일본 나가시키현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순국한 항일 애국투사다. 부안읍에서 태어났지만 1907년부터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12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은선리에는 백 의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의열사와 유품 및 활동상을 전시해 놓은 구파기념관, 교육이 가능한 청의당, 의열문, 숭의문, 동상, 어록비와 순국비, 추모비가 시민들을 반긴다.
/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 공동기획: 만경강 생태하천가꾸기민관학협의회·정읍의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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