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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기반(李基班)편 - 사랑을 기도하는 순백의 박애주의자

▲ 이기반 시인

가을은

 

소리가 난다.

 

갈잎 서걱이는

 

바람 소리

 

짙은

 

옥색 비단 자락에

 

은하수 흐르는 소리

 

[...]

 

내 가슴에

 

영롱한

 

점 하나 찍어 놓고

 

팔랑이는

 

옷자락

 

옥양목 스치는 소리

 

가을은

 

떠나면서도

 

소리가 난다.

 

-「가을 소리」일부, 1977년

 

퍽 감각적이다. 스산한 가을의 정념을 청각적 이미지로 감지하고 있다. '갈잎에 서걱이는 소리', '옥색 비단 자락에 흔하수 흐르는 소리', '바람결에 팔랑이며 옥양목 스치는 소리'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서늘한 하강(下降)의 이미지들로서 그것들이 '내 가슴에/ 점 하나 찍어 놓고/ 돌아서'서 가을 소리로 떠나가고 있다니..., 맑고 투명한 가을 하늘처럼 청량한 가을날의 심상이 아닐 수 없다.

 

꺾고 싶은 꽃이거들랑

 

차라리 멀리서 보아라

 

감미로운 미소가

 

향기로 번지다가

 

피보다 진한 사랑으로 피어나게

 

꽃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이웃을 보고 세상을 보아라

 

이파리로 돋아나듯

 

순수의 나비가 춤을 추다가

 

장미 빛 사랑으로 영글어지게

 

사랑하고 싶거들랑

 

뜨거운 눈물부터 배워라

 

영혼이 녹아 흐르는 그 자리에

 

가득 부어질

 

-「십자가의 연가」에서, 1983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삶의 철학과, 생활 자세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꽃을 꺾지 말고 그대로 두고 보라' 고 한다.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물리적 독점의 이기(利己)가 아니라, 상대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그대로 존중하면서 그 향기를 이웃과 함께 그대로 공유하고자 하는 평화공존과 박애의 정신을 엿보게 한다.

 

2연에선, 꽃과 나비가 공존공생하며 아름다운 삶을 서로 영위하듯, 이웃과 이웃, 세상과 세상의 관계 또한 서로 돕고 돕는 상생과 화해의 세계, 그런가 하면 '사랑=눈물'이라고 하는 순수와 자기 헌신을 통해 보다 깊은 사랑과 구원을 노래한 3연, 그리고 자신을 태워 이웃을 밝히는 촛불의 순교자적 희생정신들이 그의 삶 속에서 아름답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십자가의 연가」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모질도록

 

짓밟히는 아픔에

 

못 견디는 슬픔일랑

 

모두 삼켜 버리고

 

어둔 밤 별빛 밝히는

 

한 포기 들풀로

 

거기 서 있거라

 

- 「한 포기 들풀로」에서, 1987년

 

짓밟히고 '짓밟히는 아픔'과 '슬픔'도 '모두 삼키고' 굳건히 일어선 '한 포기 들풀'이기를 소망한다.

 

이처럼 고난 속에서도 '일어서고', '어두운 밤'에도 맑은 영혼의 기도로써 어둠을 미학으로 승화시켜 가는 모습에서, 일찍이 '시를 종교로, 시작을 신앙으로 여기며' 일생을 구도자적인 모습으로 일관되게 살아온 시인의 한 생을 본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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