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이질 소리 한창이다.
고부(姑婦)의 방망이 딱뚝 똑딱
학(鶴) 울음도 한 밤에 천리를 난다.
참기름 불은 죽창가에 조을고
오동꽃 그늘엔 봉황이 난다.
다듬잇돌 명주 올에 선(線)을 그리며
설움을 두들기는 오롯한 그림자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 울음
은대야 하늘에 산월(産月)이 떴다.
- '섣달' 전문
임실 오수 출생 황송문 시인(1941~)은 전주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71년 '문학'지로 등단했다. 선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역임하고 현재 계간지 '문학사계' 주간으로 있다.
섣달 하늘의 차가움과 그 하늘을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의 서늘한 모습들이 한폭의 수묵화를 보듯 선명하다. 특히 '소복- 달빛- 은대야 하늘'이 주는 하얀 색감의 시각적 이미지와, '다듬이질 소리- 학(鶴) 울음- 철새 울음' 소리에서 환기되는 청각적 이미지와의 결합에서 오는 공감각적 이미지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서 한 겨울을 나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마치 정지용의 '향수'를 보듯 그 시절 고향 마을의 풍경과 그 안에서 다정했던 식솔들과 일가친척들의 모습까지도 떠오르면서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온 듯 그립다.
우리 조용히 썩기로 해요.
우리 기꺼이 죽기로 해요.
토속의 항아리 가득히 고여
삭아 내린 뒤에
맛으로 살아나는 삶
우리 익어서 살기로 해요
...
정겹게 익어가자면
꽃답게 썩어 가자면
속맛이 우러날 때까지는
속 삭는 아픔도 크겠지오.
잦아드는 짠맛이
일어나는 단맛으로
우러날 때까지
우리 곱게 곱게 썩기로 해요
우리 깊이 깊이 익기로 해요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부활의 윤회 - '간장' 일부
시집 '메시아의 손' 후기에서 황송문 시인은 '요즈음 곱게 썩는 인생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시란, 근원으로부터 뽑아 올린 진액의 이파리라면 나의 영혼, 나의 인생은 그 뿌리요 줄기임에 틀림이 없다.' 며 절대자나 대 자연의 순리 앞에서 겸허하게 옷깃을 여미고 좀더 겸손의 옷을 입고 구름 저쪽 보이지 않는 무한의 세계와 교신하고 싶어한다.
그는 '죽(익)어서 살기'를 희망한다. 죽어서 죽고, 살아서 사는 삶의 철학이 아니라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의 철학론을 펼치고 있다. 그것은 나서지 말고 죽은 듯이 살자는 은인자중의 의미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자는 재생의 이중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잦아드는 짠맛이/ 일어나는 단맛으로/ 우러날 때까지/ 우리 곱게 곱게 썩기로 해요'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죽음보다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부활의 윤회'는 후자에 해당된다 하겠다.
그러나 '죽어 살자'는 의미와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 살자', 이 둘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서는, 마치 니체의 '네 운명을 사랑하라' 하듯이 눈앞의 고난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업보로 받아들여 업장을 먼저 소멸하여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미 이러한 깨침과 수행 의지를 바탕으로 이 시가 탄생하였으리라고 보기에 우리는 다만 그의 값진 결실을 지켜볼 따름이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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