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5 06:30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문화일반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여민락의 호흡으로

전라북도에 살면서 모악산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지인과 필자도 모악산에 올랐다. 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고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라 산을 좋아하지 않는 필자도 용기를 얻어 발길을 옮겼다. 모악산은 구전에 의하면 산꼭대기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은 큰 바위가 있어 그런 의미에서 모악(母岳)이라 불린다고 한다. 산 입구에는 코로나19를 무색하게 능소화의 밝은 모습이 있었다. 때아닌 역병이 사람들의 발걸음은 떼어 놓았지만 그래도 산을 사랑하는 이들은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쓴 채 어머니의 품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산을 오르기 얼마 안 되어 대원사라는 사찰에 도착했을 때 한 전통음악의 선율이 어디선가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여민락이었다. 이런 산 중에 궁중음악이 나온 것에 놀랍기도 했고 더욱더 놀라웠던 것은 흘러나온 선율에 등산객들이 산을 오르며 생긴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있던 것이다. 그래, 이거였구나! 필자는 마음속 쾌재를 부르며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여민락은 조선 세종대왕이 만든 전통음악으로 백성과 더불어 즐기자라는 뜻이며 본래 용비어천가를 노래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모두 7장으로 되어 있는데 매우 느리게 시작해서 조금 빠른 연주의 속도로 마치는 웅장하고 포근하며 아정한 궁중음악이다. 전곡을 연주하려면 무려 1시간하고도 30분이나 걸린다. 자, 그럼 필자가 느꼈던 전율을 함께 나누며 여민락에 잠겨보자. 그리하면 쉽고 재미있게 모악산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모악산의 입구에서 대원사를 향해 가는 길은 마치 여민락 초장의 호흡처럼 가볍고 포근하며 아기의 숨처럼 따듯하다. 대원사를 지나 수왕사에 오르기 위한 험준한 여정은 마치 여민락 2장에서 3장의 긴 호흡처럼 깊다. 시간이 갈수록 산의 경사는 높아지고 호흡은 거칠어진다. 마치 여민락 3장까지 이어온 전통악기 피리의 거세고 모진 숨결처럼 모악산의 기세는 그렇게 이어진다. 여민락 초장에서 3장까지의 곡은 20박이 한 장단이다. 하나, 둘, 셋의 수를 천천히 말한 속도가 한 박이니 그 한 박을 스무 번 부르는 것이 한 장단인 것이다. 참으로 깊고도 아정한 박자의 연주다. 수왕사에 오르는 걸음은 여민락 20박 한 장단의 호흡과 이어지면 금상첨화의 합이 된다. 느린 전통 선율에 얹은 발걸음은 구름을 걷듯 그렇게 여민락의 호흡과 운율을 만든다. 수왕사에 도착하여 호흡을 가다듬고 여민락 4장부터 연주를 듣자. 4장부터 마지막 7장까지의 박자는 10박을 합한 한 장단이 기본 박으로 조금 빠르게 하나, 둘, 셋 수를 말하기 시작해서 열까지 세면 그것이 한 장단이 된다. 수왕사에서 포기하지 말고 걸음을 재촉하면 완급의 계단이 나오니 힘을 내어 여민락 5장을 듣자. 그리하면 6장을 지나 7장의 초 앞 연주가 끝날 때쯤 정상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정상에서 마지막 7장의 여음을 크게 들으며 숨을 깊게 쉬어 보자. 모악산 전설의 바위 어머니가 우리를 안을 수 있도록 가슴도 활짝 펴 보자. 그리하면 모악산과 과거 세종이 간직했던 사랑과 기세를 함께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7.01 16:52

전북출신 떠오르는 재즈 피아니스트 용리 데뷔앨범 <Touch> 발표

뉴욕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해온 피아니스트 용리(본명 이용현)(33)의 데뷔앨범 가 지난 29일 발표됐다. 앨범은 각 음원사이트를 통해 들을 수 있으며, 음반은 7월 12일 발매될 예정이다. 용리는 뉴욕에서 재즈 연주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최근 귀국해 피아노를 통한 자신만의 독보적이고 멜로디를 앨범에 담았다. 앨범에는 그 어느 때보다 격변하는 시대에 사는 한 젊은 예술가의 자화상을 주제로 나를 통해 바라본 세상, 그리고 세상을 통해 바라본 나 자신의 흔적들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자신이 직접 작곡, 편곡한 9곡이 담긴 첫 앨범이지만, 재즈계에선 누구나 다 아는 세계적인 색소폰 연주자 월터스미스 3세(Walter Smith III), 가장 권위 있는 재즈 경연대회인 몽크 컴페티션에서 2등을 차지한 맥스 라이트(Max Light) 등이 참여해 완성도를 높였다. 이 밖에도 정상급 뮤지션들과 함께 연주하고 투어를 함께하는 등 뉴욕에서 떠오르는 신예 뮤지션들인 제이콥 슐만(Jacob Shulman, 테너 색소폰), 태미 셰퍼(Tammy Scheffer, 보컬), 시몬 윌슨(Simon Willson, 베이스), 케이번 고든(Kayvon Gordon, 드럼)이 함께해 연주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앨범 사진 타이틀곡 은 세련된 멜로디와 드라마틱한 전개가 돋보이는 곡으로, 태미 셰퍼(Tammy Scheffer)의 몽환적인 목소리와 용리의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 그리고 월터 스미스 3세(Walter Smith III)의 정제된 연주가 어우러져 감성적인 현대 재즈 음악의 정수를 담아냈다는 평이다. 용리 피아니스트는 재즈를 넘어 클래식오케스트라 곡을 작곡하는 등 실험적인 연구음악을 했던 재즈 스탠다드의 대명사 키스 재럿(Keith Jarrett)같은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전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록 음악을 즐겨 듣던 그는 드럼연주 키보드 연주에 매료됐고, 이후 여러 동료 뮤지션들을 거쳐 아티스트만의 자유로운 표현의 정점을 보여주는 재즈의 음악세계에 빠져들었다. 2009년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 그는 재즈 교육의 명문인 버클리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최초의 음악교육 기관이자 최초로 재즈 학과를 설립한 뉴잉글랜드 음악원(New England Conservatory)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석사과정 중에는 국내 CJ문화재단 장학생으로 선정돼 음악 공부에 매진했다. 전 세계 뮤지션들이 모여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뉴욕으로 건너가 한국인이 많지 않은 척박한 환경 속 수많은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들을 발굴했고 재즈의 미래를 배양하는 곳이라 평을 받는 재즈 갤러리(Jazz Gallery), 그리고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 등도 연주했었던 코넬리아 스트릿 카페(Cornelia Street Cafe) 등의 무대에 서며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귀국한 후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 등의 무대에 섰고, 여러 재즈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디. 서울문화재단으로부터 높은 경쟁률을 뚫고 그의 예술성을 인정받아 예술지원대상으로 선정되어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다.

  • 문화일반
  • 백세종
  • 2021.07.01 16:52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죽음 그 이후 2

죽은 자의 치아를 묻는 것이 치총이다. 이때 어디서 비명횡사하여 시신을 못 찾을 때 집에 보관된 이를 묻으면 쉽겠으나 없는 경우가 많다. 배비장전에 나오듯이 당시에는 정분을 약속하는 의미로 이를 빼주는 풍습이 있어서 집을 나간 양반의 시신을 못 찾을 때는 평소 정분을 나누던 기생에게 찾아가 치아를 사서 묻었던 것이 치총이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유행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에 의하면 이 하나에 쌀 두 섬까지도 받았다 한다. 그 당시에는 임플란트도 없었을 텐데 당시의 바람꾼들은 이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실소가 나온다. 발총은 고인의 머리카락 같은 것을 묻는 것이다. 지금도 군부대에서는 신체의 일부인 손톱이나 발톱을 깎아 놓고 나가는 훈련도 있다. 훈련 시 혹시 시신을 못 찾는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서 이다. 여인의 경우에는 육신이 없을 때 집에 남아있던 치마를 매장한 치마무덤의 기록도 있다. 묘제에는 일반적인 것으로 땅에 묻는 토장, 물속에 넣어버리는 수장, 지상에 시신을 노출시켜 썩게 하거나 짐승의 먹이로 주는 풍장, 요즘 대세인 불에 태우는 화장이 있으나 화장과 매장을 다 이용하는 방식도 있다. 역사적으로 세계에 단 하나뿐인 해중릉도 있다. 이 해중릉은 신라 문무대왕이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뜻으로 묻힌 무덤( 사적 제158호)이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바다에 있다. 아프리카의 어느 바닷가 부족은 남아 있는 자손들이 풍요로운 먹이를 취하게 하기 위하여 바다에 시신을 버린다. 토장이나 매장은 인류 사회에서만 있는 것으로 결국 시신의 연부는 썩히고 뼈는 보존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분묘에는 피라미드와 마스터파, 그리고 왕릉으로 대변되는 무덤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영혼은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간다는 말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왕릉이 축조된 위치는 대개 산을 등지고 냇물이 흐르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당시의 생업이 농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덤은 그 크기의 차이에 따른 권력의 상징이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28 17:36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경기도 도당굿과 이동갈비

경기도 도당굿은 한국전쟁과 새마을운동의 영향으로 한동안 단절되었다가 199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된 전통문화이다. 보통 굿이라 하면 여자 무당의 사제가 전체적인 굿의 연행을 이끌어 가지만, 경기도 도당굿은 남자 무당인 화랭이들의 역할이 주종을 이루며 소리와 재담, 재주놀이 등을 통해 강신여무(降神女巫)인 미지와 함께 굿을 이끌고 나아간다. 이러한 화랭이는 남자 세습무(世襲巫)로서 신라의 화랑(花郞)에서 어원이 유래되었다. 경기도에서는 당제 즉 도당굿과 함께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제사로 산신제를 지내기도 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의 산신제는 음력 3월과 9월에 큰 소를 잡아 제의에 쓰고 연행이 끝나면 마을 집마다 소고기를 돌려 함께 음복하였다. 때론 돼지를 제물로 잡아 쓸 때도 삶아 음복을 하고 남은 고기를 마을로 가지고 내려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1970년대 말 이후 제수를 마련하고 산제를 지내는 비용이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비용 부담을 꺼리면서 도당굿과 달리 지역의 산신제는 안타깝게 점점 사라져 갔다. 이렇듯 제의에 십시일반으로 비용을 함께 모아 육류를 올렸던 정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남달랐으며 특히 소의 가치는 특별했다. 도당굿과 더불어 과거의 산신제에서는 이러한 소고기를 최고의 제수 음식으로 올리고 음복했던 것이다. 하물며 개인적으로 소고기를 사 먹으려면 쉽지 않은 것을 마을 단위에 큰 소를 잡아 치성을 드리고 음복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소고기가 귀한 정성의 음식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경기도 양주에서 가까운 포천군 이동면에는 소고기 중 갈비로 유명한 이동갈비가 있다. 이동갈비는 1980년대 초반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 조그만 식육 식당을 하던 네 곳(이동갈비, 백운갈비, 장암갈비, 느티나무갈비)이 맛의 유명세를 타면서 포천군 일동면과 이동면에 250여 군데의 갈빗집을 생성하고 집성촌으로 만든 유명한 먹을거리다. 이동갈비에는 생갈비와 양념갈비 두 종류의 소갈비가 있다. 각각 그 맛과 정성은 남다르다. 생갈비는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소갈비를 참나무 숯으로 구워 손님상에 놓는다. 그 감칠맛이란 왕후장상의 불로초보다 진하다. 양념갈비는 특유의 양념 비법으로 달콤함과 단백함을 합(合)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가격이었다. 갈비 10대(1인분)의 가격이 그 당시 서울 음식점 삼겹살의 가격과 별 차이가 없었으니 그렇게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왕래했던 손님들의 마음을 필자는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 당시 포천군 일동면과 이동면 지역에는 군부대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군 장병과 면회하러 온 식구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주말이면 한 점의 소갈비를 어머니가 이등병 아들에게 먹여 주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경기도 포천 이동의 갈비 맛은 여느 지역의 갈비 맛과 다르고 더욱 특별하다. 이러한 마을의 치성이 담긴 경기도 도당굿과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이동갈비는 지금도 대한민국의 소중한 전통문화로 자리하고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24 16:26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문화, 일본 고대국가 성립의 기초가 되다

일본의 방형주구묘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효고현 히가시무코(兵庫縣 東武庫) 2호분의 주구 내에서 한국 청동기시대 중기의 송국리형 토기가 출토되었고, 목관의 나이테 연대측정에 의하면 기원전 445년임이 밝혀졌다. 이 유적은 한반도 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점토대토기와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에 의한 마한의 성립과 관련된 새로운 정치변혁과정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전래된 주구묘는 야요이 후기에 들어서면 지역적인 특징을 가지고 발전되어 가는데, 일본 고대문화의 중심지역인 긴끼(近畿)지방에서는 마한 주구묘의 변화와 동일한 패턴으로 축조된 분구묘가 출현한다. 분구묘라는 용어는 원래 일본 고고학에서 흙을 쌓아 분구를 갖춘 야요이 분구묘와 고분시대의 전방후원분을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된 명칭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분구묘라는 용어를 그대로 수용해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먼저 분구를 조성한 후 분구를 되파서 매장부를 지상에 두는 축조방법의 묘제라는 것에 대한 인식은 같이하고 있다. 마한 주구묘는 정치와 사회발전에 따라서 점차 그 규모가 대형화되면서 영암 만수리나 함평 예덕리 만가촌 분구묘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분구묘로 변화된다. 그리고 점차 대형화가 이루어진 하나의 분구 내에 다장(多葬)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농경위주의 생업경제에서 비롯된 혈연중심의 사회현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에도 긴끼지방의 오사카 우류도오(大阪 瓜生堂)유적과 카미(加美)유적에서는 장방형 분구에 다장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마한 분구묘와 속성을 같이하고 있다. 오사카 瓜生堂 분구묘 마한 지역과 일본 긴끼지방의 주구묘는 4세기 전반까지 유사한 형태의 분구묘로 변화 발전한 형태로 축조된다. 백제가 마한지역을 영역화하는 영향 속에서도 마한 분구묘는 백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영산강유역이나 마한 전통이 강한 지역에서는 6세기 전반까지도 지속적으로 축조되고 있다. 한편 일본 긴끼(近畿)지역에서는 4세기 전반기에 들어서 다장 형태의 야요이 분구묘는 1인장인 전방후원분으로 변화되는데, 이는 권력자의 등장을 의미하며 긴끼 중심의 정치세력이 야마토(大和)정권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한문화는 한반도 서해안 일대의 기층문화로서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지역적 전통에 따라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고, 일본은 마한문화에 뿌리를 둔 전방후원분체제에 들어서면서 일본 전형의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는데 이를 계기로 마한 분구묘와는 차별화가 이루어진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22 16:58

“서예 본질 구현” 제13회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한달간 열린다

1997년 첫 행사 이후 열세 번째를 맞는 2021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11월 6일부터 12월 5일까지 한 달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을 중심으로 전북지역 14개 시군에서 열린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조직위원회(위원장 이선홍)는 자연을 품다(회귀자연, 回歸自然)를 주제로 도내 31곳에서 전시와 학술, 부대행사 등 6개 부문 37개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비엔날레를 대표하는 전시 서예의 역사를 말하다에서는 20개국의 작가 110명이 모여 고대, 근대, 현대 서체별 변화 등 서예의 흐름을 조망한다. 나랏말싸미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서예의 역사를 살핀다. 일반 관람객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 전시도 있다. 대중에게 친숙한 노랫말을 붓글씨로 표현한 선율&음율전, 서예 문자 디자인의 실용적 가치를 재해석한 디자인 글꼴전, 서화작품을 소품으로 제작한 작은 대작전 등은 일반 관람객도 부담 없이 감상하고 즐기는 전시가 될 전망이다. 특히 올해는 전북 서예가 초청 규모를 확대하고, 14개 시군으로 전시 공간을 확장해 전북서예의 상생 방안을 찾을 계획이다. 14개 시군 작가들의 퍼레이드 전시 서예, 전북의 산하를 말하다를 비롯해 어디엔들 서예가 없으랴, 미술관, 서예 이야기 등을 통해 지역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하려고 했다. 이밖에 방촌의 미학으로 불리는 전각 역사를 되돌아보는 철필전각전, 전각가 1000명이 천자문을 한 글자씩 새겨 실인과 함께 전시하는 천인천각전, 서예와 그림도자기문인화가 함께하는 서중화화중서전 융합서예전 시서화전 등도 마련했다. 윤점용 집행위원장은 서예의 본질과 변화의 길을 추구하며 대중적인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영상 전시 등을 도입해 시대 변화에 대응하고자 한다며 서예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성을 더해 시공을 넘나드는 공감과 공명이 있는 행사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21.06.22 16:53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죽음 그 이후 1

아름다운 인생이었거나, 아쉬웠던 인생이었거나, 또는 원망의 세월이었거나 간에 누구에게나 죽음은 기어이 한번은 찾아오고야 만다. 시인 김지하가 젊은 날 한 때 어름사니(남사당 패거리의 줄 광대)라는 시에서 죽음은 좋은 것, 어차피 한번뿐일 테니까라고 호기를 부렸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의 죽음이라도 그 지역 문화에 따라 처리될 뿐이다. 볼케나우가 밝힌 내세관에 의하면 첫째 이집트 사람들처럼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육체인 세트(Set)도. 영혼들 바(Ba)와 카(Ka)도 영원히 살아있다는 사상, 그래서 미이라를 만들고 뇌와 내장은 적출하여 카노보스라는 병에 밀봉하여 보관하는데도 심장만은 적출하지 않고 주술이 깃든 부적으로 덮어 소다와 향료를 넣은 수지로 만든 마포를 여러번 감아 미이라로 보관했을 것이다. 그리스의 사학자 헤로도투스의 증언이다. 물론 살았을 때의 신분에 따라 다르다. 어떤 자는 넓은 피라밋이나 마스터파에 들어가고 천한 사람들은 그냥 들판에 던져진다. 두 번째는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다. 죽으면 끝이다. 그래서 실존주의가 발달된 그리스 지역이다. 그들은 24시간 이내에 장례를 치러도 안 되고 48시간을 넘겨도 안 되는 관례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는 기독교 문명권의 죽음이다. 그들은 죽음을 인정하지만 그 죽음을 어떤 형태로든지 초월하려 한다. 넷째가 우리나라를 비롯 동양문화권에 있는 나라들의 죽음과의 연결 사상이다. 육체는 소멸되지만 영혼만은 불멸하여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의 방법이나 법도가 더 복잡해진 측면도 있다. 우선 장레를 치루는 일수도 신분이나 재산에 따라 3일장, 5일장, 심지어는 광개토대왕처럼 3년장으로 치러지는 경우도 있다. 육체에 다시 영혼이 깃들기를 기다리는, 즉 예수님도 아닌데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무덤의 내용도 허총(虛塚)을 비롯 혈총(血塚), 발총(髮塚), 치총(齒塚) 등이 있으며 때로는 신주(神主)만 묻기도 했다. 전쟁에 나가는 남편이나 아들에게 문신을 해 주고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전장을 돌아다니며 문신을 보고 아들을 찾거나 그도 못 찾으면 문신을 할 때 피를 닦았던 손수건의 피를 묻으며 혈총을 만들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21 16:40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역병을 이겨내라

세종대왕 조선왕조 중 세종대왕은 많은 공적을 남긴 성군이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글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었고, 정음청을 중심으로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시켜 그 뜻을 백성과 함께 하고자 했다. 또한 조선 실정에 맞는 농법서인 농사직설(農事直設)을 만들어 농업의 발전을 끌어내고자 했으며, 민족의 음악을 더불어 아끼시고 귀히 여겨 박연으로 하여금 궁중음악인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했다. 이러한 성군의 시절에도 전염병은 있었으니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전염병의 350회 전체 원문 중 10회의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 기록은 세종 2년, 6년, 12년~16년, 18년~19년, 25년~26년의 해로 참으로 적지 않은 환난을 겪은 성왕이었다. 세종 2년, 첫 전염병이 돌자 세종은 서울과 지방에 전염병이 성하게 유행한다 하니 소재지 관리로 하여금 성의를 다하여 치료하여 죽은 자가 나지 않도록 하라 하였고, 세종 14년에는 각 도의 감사에게 민간에 전염병이 발생하면 구제하여 치료해주라는 법의 조항을 상고하여 구료(求療)해 살리도록 마음을 쓰라 전지(傳旨)했다. 세종은 즉위 후 전염병이 돌자 온 힘을 기울여 사망자가 나오지 않게 지시했으며 더불어 법을 만들어 치료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절실히 표명했다. 또한 세종 16년에는 외방(外邦)의 유행. 전염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방문(方文)으로 써서 주지시키도록 하라 명을 내렸는데 이는 각 고을의 관직을 맡은 이들에게 현장에 직접 가서 치료법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백성들에게 향하는 긍휼(矜恤)이 닿는 성군의 마음이었고 당시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성왕의 방법이었다. 세종 18년에는 예조가 간청하기를 전염병으로 죽은 자의 가족을 살피게 쌀과 면포를 주게 하소서 상소하자 이에 그대로 세종은 명을 내려 실행하도록 했으며, 세종 19년에는 황해도에 여러 병이 전염됨을 염려하여 유명한 의원을 보내어 도내 의학생에게 교류하고 구료하는 방법을 견습(見習)시키라 하교하여 성왕의 의지를 전했다. 이처럼 세종은 치료에 국한하지 않았으며 예방을 위한 계획도 만들고 실천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많은 시련을 겪고 있다. 잊고 싶은 과거의 전염병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금 나타났지만, 우리는 필사(必死)를 다 하여 이겨낼 것이다. 600여 년 전 세종대왕과 선조들처럼 꿋꿋하고 의연하게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우리 민족은 항상 서로를 아끼고 위로하며 승리했다. 세종실록 56권 세종14년 4월 23일 非獨疾疫者, 流離絶糧之人, 悉訪以啓 <전염병에 걸린 사람뿐 아니라, 유리(流離)하여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도 죄다 찾아서 아뢰라>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17 16:44

빌리 브란트의 ‘작은 걸음’

삽화 = 정윤성 기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는 유대인 위령탑이 있다. 1943년 바르샤바의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에서 나치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섰다가 희생당한 수만 명 유대인들을 기리는 탑이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함께 이 위령탑을 세상에 더 널리 알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서독 총리를 지낸 빌리 브란트(1913~1992)가 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사진이다. 당시 서독에서는 브란트의 행위에 공감하는 사람들보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세계의 언론들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며 브란트를 격찬했다. 후에 브란트는 헌화를 하는 순간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며 인간의 말이 소용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이 흑백 사진 한 장이 가져온 결과는 놀라웠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은 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동안 쌓여온 문제들이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것은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은 정책, 평화의 현실적 가능성을 넓힌 20세기 평화정치가 빌리 브란트를 우뚝 서게 한 동방정책의 상징적 출발점이기도 했다. 동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외교를 적극 추진하면서 동서 화해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동방정책은 결국 1990년 10월 서독과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탄생시키는 동력이 됐다. 동서독 평화공존으로 통일을 이끌어내고 독일형 복지국가를 건설해낸 동방정책을 성공시킨 브란트는 거창한 정책보다는 당장 해결 가능한 문제들에 집중하면서 더 많은 대화와 협상을 신뢰와 변화의 통로로 삼았다. 작은 걸음과 접근을 통한 변화의 가치를 추구했던 그는 사민당을 이끌면서도 합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세웠다. 덕분에 결단력과 추진력 부족이라는 비난을 불러들이기 일쑤였지만 끝까지 의견을 듣고 조정하며 통합해 당의 결속력을 강화했다. 1970년대, 브란트가 이끌었던 사민당은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청년당원이 급격히 늘어났다. 위압적 권위보다는 소통과 조정, 통합의 리더십으로 새로운 정치 발전을 원했던 이들에게 브란트는 상징적 리더이자 희망이었다. 한국 정치에 변화의 바람이 몰려왔다.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 청년정치의 부상이 그 증거다. 30대 야당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의 대상이 되고,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한편에서는 거창한 구호들이 먼저 나부댄다. 신중함과 진정성이 더 절실해진 시절, 브란트가 지켰던 작은 걸음의 가치가 새삼스러워진다. /김은정 선임기자

  • 문화일반
  • 김은정
  • 2021.06.17 16:19

10년 동안 동요 향유하고 즐기는 60·80대 모임‘소리샘’

10년의 세월 동안 매월 한 번씩 동요나 민요를 부르면서 향유하고 즐기는 모임이 있다. 소리샘이란 노래모임이다. 동심으로 돌아가 맑은 소리를 내고 싶다는 의지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소리가 우러나오는 샘이란 의미도 담고 있다. 이름에 걸맞게 모임에서는 주로 클레멘타인, 로렐라이 언덕 등 동심을 느끼게끔 하는 노래를 부른다. 이명화 부회장(63)은 동요를 비롯해 회원들이 요청한 곡을 부르기도 한다며 노사연의 만남과 같은 대중가요도 이따금씩 부른다고 말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하나 더 있다. 전북에 거주하는 60대~80대가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출신은 예술가, 수필가, 사진가, 언론인 등 다양하다. 김명곤 회장(83)은 일반적인 직장을 다녔던 분들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며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찾아와서 노년을 즐기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첫 시작은 지난 2011년 김 회장이 지인들과 만나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동요를 하는 동아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부터였다. 그러면서 서로 인연이 닿아있던 사람들이 모였고, 어느 덧 회원수가 20명이 됐다. 반주자와 지휘자도 섭외했다. 이 부회장은 반주는 회장님 지인분이 해주셨고, 지휘자는 정읍의 한 성당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셨던 분이 맡아주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휘자는 우리가 음을 잘못 낼 경우 일일이 수정해줬다고 부연했다. 노래를 부르는 장소는 폐교가 된 정읍시 옹동면 산성초등학교를 활용했다. 모임에서 직접 폐교를 인수했고,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김 회장은 초등학교에서 동요를 부를 때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아 참 행복했다며 연령과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지난 2017년 매도했고, 이후 전주에 있는 오페라단 사무실을 밀려 매월 마지막 주 주말에 한 번씩 연습을 하고 있다. 지휘자도 다시 섭외했다. 김 회장은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며동요에 대한 느낌을 살릴수 있는 공간을 다시 확보하고 싶다고 밝혔다. 앞으로 중창단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회원수가 30명~40명 정도 늘어나, 소트라노 알토, 테너 등 파트를 나눠 전문적으로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는 바람이다. 김 회장은 회원수가 늘어나고 어느 정도 전문성이 갖춰진다면, 각종 요양시설을 찾아가 공연을 하며 노래봉사를 할 계획을 갖고 있다며 동요를 통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파란마음으로 물들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모임에 참여하길 희망하는 사람은 김명곤 회장과 이명화 부회장에게 문의하면 된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5 18:2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마한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

한반도 서해안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 주구묘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백제문화와 뚜렷이 구분되는 마한문화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고학적인 자료이다.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처음 주구묘가 발견되었을 당시 그 연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주구 내에서 출토되었던 유물 가운데에서 토기 제작할 때 단단하게 하기위해 두드린 무늬가 찍힌 타날문토기에 대한 연대를 기원후 3세기로 설정하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 견해였기 때문에 주구묘의 연대 역시 3세기를 상한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보령 관창리유적의 보고서에서는 주구 내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분석한 결과, 청동기시대 중기의 송국리문화와 후기에 해당하는 점토대토기문화 집단과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 주구묘의 축조연대를 기원전 3~2세기로 설정했지만, 학계 다수의 연대관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일본 야요이 시대의 보편적 묘제인 주구묘는 축조수법이나 그 형태에 있어서 한국에서 발견된 주구묘와 유사한데, 그 출현연대를 야요이 전기 곧 기원전 3세기에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주구묘의 기원은 북부 구주에서 벼농사의 기원과 같은 것으로 긴끼(近畿)지역에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농경에서 논의 구획에서 비롯된 묘제로서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편 진시황의 지시로 불노초를 구하러 바다를 건너온 서복(徐福) 전설과 관련지어 중국 진(秦)묘제인 위구묘(圍溝墓)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한국 주구묘의 상한연대를 기원후 3세기로 설정하게 되면 일본 야요이시대의 주구묘와 연대차는 물론, 그 원류에 대한 논쟁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보령 관창리유적 발견이후 익산 영등동, 서천 당정리 등 서해안 일대에서 급증하는 주구묘 자료는 일본의 주구묘 원류에 대해 재고해야 된다는 의견이 먼저 일본에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관창리 주구묘의 연대를 한국 청동시대 중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며, 특히 긴끼지방의 효고현 히가시무코(兵庫縣 東武庫)에서 출토된 송국리형 토기가 일본 주구묘 기원의 한반도설의 적극적인 증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한반도에서 긴끼지방으로 이주해온 도래인에 의해 직접 전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 주구묘의 연대를 청동기시대 중기까지 소급할 수 자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일본 고고학자들의 주구묘에 대한 연구는 매우 각별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을 상징하는 고유의 고대묘제인 전방후원분의 원조가 바로 이 주구묘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곧 일본 고대사회의 변화추이에 따라 주구묘는 분구묘로 발전되고, 분구묘는 다시 전방후원분으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며,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긍지 또한 매우 강했음도 알 수 있다. 보령 관창리 유적을 직접 발굴 조사한 고려대학교 이홍종 교수의 전언에 의하면 이 유적 조사이후 일본 방형주구묘의 저명한 연구자 한명이 주구묘에 관한 연구에서 절필을 선언할 정도로 마한 주구묘의 발견은 일본 학계에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5 18:22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미켈란젤로의 아름다운 죽음2

자코피노 델 콘테가 그린 미켈란젤로 초상화 사람들은 나의 뛰어난 솜씨에 놀란다. 하지만 이런 솜씨를 익히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알게 된다면 더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던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1475-1569, 이탈리아)와 레오날도 다빈치 그리고 라파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연의 힘으로는 다시 만들 수 없다는 천재로 이 세상에서 67년을 살다 간 다빈치는 평소 보람찬 하루 끝에 행복한 잠이 오듯 보람있게 쓰는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라는 말과는 달리 유언은 나는 단 한 가지도 이룬 것이 없다.이었다. 이미 모든 학문의 천재이며 화가를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훌륭한 인문주의자로 위치를 증명해 보인 다빈치의 유언치고는 너무 아쉬움이 남는다. 짐작건대 그 당시에는 황당하기까지 했었을 그의 천재성을 몰라주는 사람들이 못내 원망스러웠을 것이며 그래서 그의 유언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그 시기의 세 천재는 다빈치가 미켈란젤로보다 23살이 많았고 라파엘은 미켈란젤로보다 7살이 적었다. 그리고 라파엘이 37세로 요절하였으니, 이 지구상에서 그들이 같은 공기를 마셨던 기간은 36년쯤 된다.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네 몸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페인트가 흐를 뿐이다.라거나, 내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교황 따위는 되지 않으리라. 반드시 너와 같은 화가가 되어 신을 가깝게 보리라.라는 말을 하게 만든 미켈란젤로는 4년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 자기가 가장 존경했던 아버지께 보낸 편지에 지난 6개월 동안 교황청에서는 단 한 푼의 돈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나의 아름다운 죽음을 위하여라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 교황은 거듭되는 전쟁의 군비로 돈을 모두 지불해야 했기에 자신의 묘지도 못 만들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89년의 생애를 마감하면서는 나의 영혼은 신에게. 나의 육체는 땅에, 나의 재산은 친척에게이었다. 지극히 냉정하고 정리된 죽음이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14 16:29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인물과 전투 등 전북 왜란사 연구 집중 필요

전북 지역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정유재란사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전북 인물들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과 수군, 의병중심의 연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그 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다양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학술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란극복은 특정인물과 집단의 활약뿐만 아니라 각계 각층의 보이지 않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유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전북의 활약상과 비중을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에 있는 국외사료의 수집과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료를 통해 한산도행주진주대첩, 명량해전, 영남권 중심의 연구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어서다. 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 한문종 교수는 임진왜란정유재란 관련기록이 있는 일본중국의 고문서, 사서를 수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국외 자료를 수집한 뒤, 국내 자료와 비교 분석해야 한다며 전북 임진왜란사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토대라고 했다. 각 국가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의 성격도 설명했다. 한 교수는 당시 일본은 제후가 각 번(藩)을 다스리는 지방분권 사회였기 때문에 자료가 한 곳에만 집중돼 있지 않다며 자치단체별로 찾아가 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왜란 당시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던 중국 역시 상당한 자료가 남아있다며 연구자들이 최근 중국에 남아있는 자료를 많이 활용한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한중일 사료를 비판검증하면서 연구하면 잘못된 사실이 바로 잡힐 수 있다며 국내 사료의 경우 개별 인물을 문중에서 선양하려는 목적에서 쓰거나 후대에 작성된 사례가 많아 성과가 부풀려졌거나 사실관계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전북 임진왜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전문가 양성, 웅치이치 전투의 재조명, 다른 지역에서 활약했던 전북 출신 의병들의 활동 정리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한 교수는 이런 과제들이 수행되면 영남 중심의 임진왜란사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현재 대부분 교과서가 영남을 중심으로 서술돼 있는 데 실제로 그렇진 않다고 주장했다.하태규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관군의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태규 전북대 사학과 교수 하 교수는 그 동안 임진왜란사를 의병과 수군, 이순신 중심으로 제한된 인식을 갖고 조명했다며 당시 관군의 역할과 당시 행정 체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뒤, 역사적으로 걸맞은 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호남 의병과 관군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며 왜란시기 호남 관군은 근왕병이 무너진 후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호남 의병은 처음부터 수령과 장수의 협력과 지원을 받으면서 결성됐고, 전투할 때도 서로 협력하며 적을 공격했다며 관군의 장수와 의병장 사이에 전공을 다투거나 시기했던 사례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진주성 전투에서 전북 의병의 역할 등 개별 연구과제도 제시했다. 하 교수는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했던 전북 출신 관군과 의병을 조명해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그 지역출신 의병이라 할 수 있는 지역사족과의 결합양태도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특정집단만의 활약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며 훌륭한 무장과 관군, 의병, 말없이 희생했던 백성들의 보이지 않은 역할을 조명하는 것도 대단이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동희 예원예술대 교양학부 교수 이동희 교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개별 인물들을 조명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치웅치 전투, 호벌치 전투, 운암전투, 남원성 전투에 참여했던 개별 의병의 역할과 활동을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특히 충남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의 인물들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 선생과 승장 영규 대사가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이 금산(조선시대 당시 전라도) 연곤평에서 1만 5000여 명의 왜적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유해와 넋을 함께 모셔놓은 곳이다. 이 교수는 단체로 유해를 모셔놓은 의병들의 경우 개별 의병보다 상대적으로 관심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이들을 정려하던가. 문화재로 지정해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술적인 부분에서는 전국적인 차원의 접근을 주장했다. 이 교수는 웅치이치 등 대표적인 전투를 놓고 지역 학자들을 중심으로 의미를 짚고 조명한 사례는 있다며 이제는 전국 학자들이 모여 임진왜란사에서 전북 출신 관군과 의병이 했던 역할을 논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 나종우 회장도 인물사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 회장은 전북출신 인물들은 단편적인 사실만 조명되고 있다며 연구가 부족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행적을 비롯해 정신사까지 조명할 수 있는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며 유공자나 후손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엄밀하게 연구검증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진왜란사의 거시적인 의미도출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 회장은 국가 전체적인 관점으로 국난극복을 한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며 당시에 신분계층을 막론하고 지도부, 의병, 백성들이 하나가 돼서 전란을 극복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며 이순신, 권율 등 지금까지 부각된 특정 인물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국난 극복은 개별 인물의 힘만으로 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만 당시 지도부나 정치인들의 실정은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하다고 부연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기, 왜군은 도고으 화가, 서예가, 공예가 등 세공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을 끌고 갔다. 그 중 우리나라 기록에도 없는 인물이 있다. 소위 조선국녀라 불리는 베짜는 직공이다. 이 직공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가 끝난 뒤 강제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초 일본 문화연간(文化年間)에 출간된 <토좌향토지료(土佐鄕土志料)>에 따르면, 고치현 구로시오초 토호인 오다니 요쥬로(小谷與十郞)가 임란시기 이 지역 영주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휘하 군인으로 조선으로 출병했으며, 귀국 때 조선 여인 한 명을 데리고 왔다. 베를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여인은 자신의 기술을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전수한 기술로 짠 베는 매우 세련됐으며, 혼겐(本絹)의 츠무기오리(織)라 불렸다고 한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애를 마감했으며, 가미가와구치 마을 계장사에 있는 오다니 가문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를 세운 것은 요쥬로의 4대손인 오다니 야스지(小谷安次)다. 이후 마을로 이장했다. 묘비는 높이가 50cm정도 되며, 앞면에는 조선국녀(朝鮮國女)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측면에는 천정연간(天正年間: 1573-1583)에 이곳에 왔다는 의미인 천정연중래(天正年中來), 좌측면에는 사망한 해를 모른다는 의미인 졸년부지(卒年不知)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국 출신의 여인으로서 천정연간에 이곳으로 와서 살다가 언제 사망하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현재 이 소녀의 이야기는 남원문화원에서 지난해 제작한 다큐멘터리와 그림책 정유재란 때 끌려간 한 소녀이야기 조선국女에서 자세히 나와 있다. 여기에는 소녀의 고향으로 추정하는 사매면 수동마을을 배경으로 정유재란의 발발, 일본으로 끌려가는 과정, 일본 벽촌에서의 생활, 베 짜는 기술의 전수 등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일본으로 끌려가 고향을 그리워하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잠든 소녀의 애달픈 심정도 담겨 있다.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은 일본 고치신문에 조용하게 잠든 조선의 직녀라는 제목으로 집중 조명했고, 일본 작가 우에노마사에가 지난 1998년 <무궁화소녀>라는 제목으로 그림책을 펴냈다며 고치현에 조선국녀의 묘를 지키는 회도 있을 정도로 주목도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진왜란정유재란사에서도 이 소녀를 비롯해 주목받지 못한 인물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3 17:06

전북 후백제사 비롯한 인문학 콘텐츠 강의

전북 후백제사를 비롯한 다양한 인문학 콘텐츠 강의가 온라인으로 선보여진다. 전북연구원(원장 권혁남) 전북학연구센터는2021년도 전북학 도민강좌 <전북학당>을 제작한 뒤, 온라인 플랫폼에서 공개한다. 강의주제는 전북의 역사문화재음식산업이며 총 10강으로 구성됐다. 한 강좌 당 10분 분량으로 제작됐다. 이달 공개되는 12강 주제는 후백제로, 견훤의 업적과 후백제 유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 1강은 전북과 견훤의 정치학 : 후백제 왕, 전주에서 삼국의 패권을 노리다라는 제목으로 건국 과정과 통치, 외교, 공산 전투 승리 후 야망 등을 소개한다. 2강은 전북과 후백제의 유산 : 천백 년 전 역사를 길어올리다라는 제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던 전주 동고산성, 중요 사찰인 봉림사지, 유물과 관련된 강의를 진행한다. 7월에 공개하는 34강은 문화재를 주제로 전북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8월에 선보이는 56강은 전북 고대사 마한을, 9월 공개하는 78강은 전북 관광상품인 음식을 주제로 전개한다. 10월에 공개하는 910강은 전북 산업을 주제로 강의한다. 관련영상은 유튜브 채널 전북학연구센터와 전북학연구센터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김동영 전북학연구센터장은 전북학연구센터는 코로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영상 콘텐츠 2021년도 전북학 도민강좌 <전북학당>을 제작,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며 도내외 남녀노소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강좌로 우리 지역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3 17:00

김형중 교수 2021한국문학신문 문학상 수상

김형중 군산대학교 산학협력단 자문 교수 김형중 시조시인이 2021한국문학신문 문학상을 받는다. 한국문학신문사는 올해 시조부문 최우수상 수상자로 김형중 시인을 선정했다고 10일 밝혔다. 시상식은 오는 12일 서울시 중앙보훈병원 뒤 일자상 생태공원에서 열린다. 심사위원들은 김형중 시인의 고속도로는 묘사와 진술로 이뤄진 작품이라며 첫수에서 시원스럽게 뻗은 고속도로의 모습과 자신의 감회를 나타냈고, 둘째 수에서는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작품으로 시조의 미학을 높였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강조했다. 김형중 시인은 중등학교 교단을 거쳐 원광보건대학에서 정년 퇴직한 문학박사이다. 지난 2016년 월간 국보문학을 통해 시조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수년 간 전북일보 칼럼리스트로 활동해왔다. 전북문협과 전북시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행촌수필문학회 등의 문학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지난 1월에는 제32회 전북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군산대학교 산학협렵단 자문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작품집으로는 시집 <어머니의 지게> 외 3권, <당신도 하고 싶은 이야기>등 칼럼집과 수필집 등 3권이 있다. 지난 1월에는 전공서적 <漢詩이야기>를 펴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0 19:39

한국관광공사 선정 ‘여름 비대면 안심관광지 25선’ 에 전북 3곳 선정

고창 운곡람사르습지와 진안 주천 운일암반일암 숲길, 무주구천동 어사길이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여름 비대면 안심관광지 25선에 선정됐다. 한국관광공사는 무더운 여름을 안전하고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여름 비대면 안심관광지로 도내 3곳을 포함, 전국 25곳을 선정했다고 8일 밝혔다. 고창 운곡람사르습지는 동산지형 저층습지로 그 생태적 가치가 높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모두 864종의 동식물 생물다양성이 높고,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과 희귀종의 생태적 서식지로서도 보전가치가 높다. 특히 습지 데크길은 동물들의 이동 통로를 방해하지 않고, 자연 훼손을 막기 위해서 최소한의 규모로 높게 세워져 있다. 데크 아래 있는 식물도 빛을 받을 수 있게 데크 디딤판 나무의 간격을 일정하게 띄워놓았다. 진안 운일암반일암 숲길은 주천면 삼거리에서 주천면행정복지센터에 이르는 8.6km의 평탄한 구간으로 지친 심신을 가다듬으면서 걷기에 안성맞춤인 사색길이다. 진안고원 9구간으로 전북천리길에 든다. 관광명소인 운일암반일암 안에 자리한 이 숲길에서는 차가운 시냇물에서 나오는 시원한 기운과 산기운 가득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심신을 씻을 수 있다. 무지개다리에서 용틀임하고 내려가는 주자천과 곳곳에 널려있는 기암괴석을 바라보면 누구든 감탄사를 절로 발산한다. 특히 2021년 반려견과 함께하는 우선 안심 걷기 길로 선정돼 반려동물 애호가들의 방문이 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주 구천동 어사길은 초입부터 인월담, 사자담, 신양담, 구천폭포, 백련사까지 5km의 이어지는 여정으로 숲과 계곡이 주는 정취와 그 안에서 얻는 만족감이 최고로 꼽힌다. 또 인월담 일원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이용했던 길로 오솔길과 돌계단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길 곳곳 옛사람들이 살던 흔적과 1960년대 최고의 명성을 떨쳤던 한성여관 터도 만날 수 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웃들에게 횡포를 부리던 자들을 벌하고 사람의 도리를 바로 세웠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김성규국승호김효종 기자

  • 문화일반
  • 전북일보
  • 2021.06.08 19:28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