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news
쑤꾸기 소리 따라 감꽃은 하나 둘 피어났는가? 다시는 오지 못할 푸르름 밑에 하마트면 뜨지 못할 나의 눈빛이 진정 새로운 뜻으로만 피어났는가? 의좋은 어느 집 어린 형제와 같이 돌담 위에 서로의 손짓이 보일 듯 어제 밤 너와 나와의 아쉽던 가슴 위엔 저기 저 감꽃이 쑤꾸기 소리 따라 피어 났는가? -이철균,「감꽃」 전문 '쑤꾸기'는 보릿고개가 한창일 때 마을 뒷산에서 애절하게 울어대던 새(뻐꾸기)였다. 복거일은 이철균의 이러한 '「감꽃」을 낭송하면 사랑의 애틋함으로 가슴에 파란 물살이 일어 - 지난날의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고 하였다. 시조 시인 정완영도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보는 이도 없는 날에 /푸른 산 뻐꾸기 울고 감꽃 하나 떨어진다.'(「감꽃」)를 발표하여 이철균의 '뻐꾸기 울음 속에 피어나는 감꽃'의 시상을 이어가고 있다. 해가 긴 봄날 '쑤꾸기 울음'과 '새하얀 감꽃'의 절묘한 매치(match)는 소박하고도 담백한 그러면서도 어린 시절 고향의 애틋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썩 좋은 시적 소재다. 그의 시에는 이처럼 '감꽃'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늦은 봄이던가 초여름이던가 아무튼 보릿고개가 한창일 때 그 조그맣고 하얀 감꽃이 '쑤꾹기 소리 따라 하나 둘 피어났다'이른 새벽이면 아직도 서늘한 아침 공기에 몸을 웅크리며 동네 아이들은 그걸 주워 먹곤 하였다. 쌉쏘롬하고 약간 떫은 맛이 있으면서도 뒷맛이 달큼한 감꽃 내음, 그걸 주워 먹으려고 이른 새벽부터 눈을 부비며 골목길을 나섰던 어린 날의 추억들이 새롭다. 그는 누군가 여기서는 소쩍새 소리 따라 귀 대이면 감꽃 어느 방에선가 너의 속삭임 부르면 돌아서서 수줍어 숨어들더니 앞산 뒷바다 끌어안고 冬天에도 붉은 달로 뜬다. 빈 메아리는 허무와 절대의 사이에서 그렇게도 울어대더니 이제는 하늘까지도 버리고 나서 감은 즉 한 개의 감 애당초 그것뿐 내 時空 앞에 꾀 벗고 섰구나. - 이철균. 「감」 부분 이 시에서도 '감'이 등장하고 앞의 '쑤구기'처럼 소쩍새가 등장하고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배경(back ground)으로 '꾀 벗고 우투거니 서 있는 한 개의 감'이 전경화(前景化)되어 독자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것은 분명 '절대'와 '허무' 틈새에서 '그렇게 울어대는' 화자의 심정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는 이렇게 절대 순수의 영지를 그리워하다 감꽃처럼 잠깐 얼굴을 보였다가, 한 권의 시집을 남기고 떠난 순백의 감꽃 시인이었다. 전주에서 출생한 이철균 시인(1927-1987)은 전주북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早稻田) 제1고등학원을 졸업했다. 귀국 후 목포 문태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1949년-1958)을 하면서 1953년 『문예』지에 「염원」(1953.2), 「한낮에」(1953.6), 「소리」(1954.3) 등이 서정주에 의해 3회 추천되었다. 1955년에는 전주에서 시 동인지 『南風』을 주재하여 발간하고, 잡지 『인물계』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으나 60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며 시를 썼다. 그러나 말년에는 전주고등학교 재직시 동료 교사였던 서울 하희주 시인 자택 별채에서 독거하다 별세한 외로운 시인이었다. 전북문인협회는 1992년 그의 유고시 82편을 '『신즉물시초』 新卽物時抄'란 시집으로 묶어 그를 기렸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평생남의 땅을 부쳐 먹고 산 소작인의 무덤에서는 풀이 나지만남에게 땅을 내주고 호령하고 도조만 받아먹고 산지주의 무덤에서는 풀이 나지 않습니다. 남의 땅을 부쳐 먹고 산 소작인은 풀만 먹고 살았으므로 그 몸 모두가 풀이지만도조만 받아먹고 산 지주는 고기만 먹고 살았으므로 그 몸 모두가 고기 덩어리입니다. -「口傳」전문'소작인'이 곧 '들녘'이고, '노동'이며, '진실'인 반면, '지주'는 '고기덩어리', '착취'와 '위선'의 상징으로 비유되고 있다. '풀'은 '진실'이며, '땅'은 그것을 길러내는 '바탕'이요 자연회귀를 지향하는 그의 정신적 거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풀(진실)들은 지주와 권력으로부터 짓밟히고 수탈당한 민초들의 모습이요, 그런 속에서도 모진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끈질긴 저항과 생명력의 상징으로 드러나 있다.'풀' 그리고 '푸르름' 그것은 생명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에 생명이 있는 곳엔 으레 땅이 공평하게 뒤따라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마치 하늘이 지상에 햇빛과 이슬을 공평하게 내리듯 무릇 생명이 점지된 것들에겐 그 생명체가 딛고 살아가야할 땅 또한 고르게 나누어져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곧 천부토지설(天賦土地說)인 셈이다. 하늘이 곧 땅이고, 물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의 시에는 종종 '물이 내려와서 농사를 짓'는가 하면, '땅이 하늘에 닿아 있'기도 하면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융합소통되어 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고, 그것이 하늘의 섭리라는 생각이다. 이병훈 시인(1925-2009)은 군산시 옥구면 당북리에서 태어나 서당과 소학교를 다녔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일본인의 농장에서 수확량의 70%를 지주에게 바치며 살아간 소작인들이 대부분이었다. 6.25 직후 서울신문군산지국과 기자 생활을 겸하면서 1959년 신석정 선생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지로 등단, 1970년 제 1시집 『단층』을 비롯 18권에 달하는 시집을 간행하고, 군산(문협, 예총) 지부장과 군산 문화원장, 1984년에는 『석정 문학회』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이후 한국현대시인상과 대한민국문화훈장을 받았다. '들녘'에서 시작하여 '들녘'에서 끝날 정도로 '들녘'이 이병훈 시의 주요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일제침략기 군산 옥구라고 하는 들녘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일제로부터 부당하게 농토를 수탈당하고, 소작인의 아들로 억울하게 살아가야만 했던, 어린 날의 뼈아픈 상처에 대한 치유와 회복의 길이 아니었을까 한다. 농부는농약을 물고 논두렁에 쓰러진황새를 묻고 있었다. /.../ 다음 날황새는 그림자가 되어그 들녘을 건너가고 있었다. -「下浦길 5」에서그로부터 한 사십년쯤 지난 지금 어머니들은 탈탈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콩밭 열무를 팔러 다닌다. - 비단 어머니들 뿐 아니라 신작로도 들도 들 건너 산들도 쇠붙이 냄새가 지독한 멀미에 지쳐 풀이 죽어 있었다. -「멀미」-쇠붙이 냄새, 에서'황새'와 '소나무', '어머니', '들', '산' 이들 모두 생명적 존재자이다. 이러한 생명적인 것들이 인간의 지나친 욕망과 문명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그것들 앞에 짓밟힌 자연과 생명을 안타까와 한다.이러한 그의 문명 비판적 시각은 자연과 인간, 주체와 타자간의 평등과 화해를 꿈꾸면서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에코-페미니즘의 새 장을 연 선두 주자로 기억되리라고 본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봉선화 고 빨강 꽃 속에 8月이 들어 있다. 콩콩 찧어 물들이면 빨강 8月이 손톱에 옮아온다. 눈동자 푸른 바닷가에서 빨강 모자를 쓰고 웃는 少女- -손톱이 자라면 차츰 8月이 밀려가겠지만 나직한 歲月을 등에 지고 기대어 생각노라면 해가 갈수록 짙어지는 기억 속으로 손톱을 물들이며 빨강 8月이 온다. -「8월」, 전문 8월만 되면, 봉선화 꽃잎으로 빨갛게 손톱을 물들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애틋하게 떠올리게 한다. '8월'이라고 하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가 '빨강 봉선화'라고 하는 화려한 감각적 은유를 통해 우리의 무딘 감성을 시적으로 살아나게 한다. '푸른 바닷가'와 '빨간 모자를 쓴 少女'와의 색감 대비도 선명할 뿐 아니라, '해가 갈수록 짙어지는 기억'이 '손톱을 물들이며 빨강 8월로 온다'고 한 화려하고도 생동한 감각이, 가히 정지용의 산뜻한 감각에 애틋한 그리움까지 가미(加味)되어 생의 깊이와 간절함을 더하게 한다.호운(壺雲) 박항식 시인(1917-1989)은 남원 수지에서 출생하여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향인 남원 수지에 수지중학교를 건립, 이후 원광대 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1949년 한성일보 신춘문예에 「눈」이 당선된 이래,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에 시조「노고단」과 「문장대」가 각각 재당선되어 기존의 이미지즘(知)에다 동양적 사유의 정신세계를 투입한 지정합일(知精合一)의 서정미학을 구축한 시인이다. 자신의 시를, 한국모더니스트의 대가라 일컫는 정지용 시와 비교해 가면서, '지용의 것은 내려오다가 반짝하고 떨어져 버리는데, 나의 것은 내려오다가 아리잠직하게 승화' 되어 있다고 자칭(自稱)하면서, 지용의 이미지스트적 '지(知)'에다 자신의 '정(精)', 곧 동양적 정신세계를 가미하여 한국 서정시의 차원을 달리하였다. 靑山을 사랑에 눈뜨게 한 도라지꽃 피었네 靑山을 半만 취하게 한 한들한들 도라지꽃 피었네 淸明한 가을날 풀 푸른 내 고향 뒷산에 이쁜 固執으로 도라지꽃 피었네-박항식,「도라지꽃」전문, 『방호산 구룸』,1981 꿈이 地表를 뚫고 싹으로 올라오면 山이 재채기를 한다. -박항식,「淸明」에서한시(漢詩)처럼 간결하고 정치하게, 때로는 노장풍의 산수도처럼 유장하고 정밀하다. 특히 '靑山'과 '도라지꽃', '地表'와 '싹'과의 대칭적 호응 관계는 주객대립의 분리가 아니라, 둘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연기적 불이(不二)의 세계요, 초월과 통합, 음양의 화해(和諧)에서 오는 신비의 세계가 있다. 이러한 호운의 초월과 통합의 정신세계는 이 외에도 '항상 끄트머리로부터 처음이 온다.', '모든 빛깔들은 한 빛깔의 외연으로 하여 내포된다.' (「아침」), '휘파람 소리 듣고 잠자던 봉우리'(「눈III」) 등 그의 시간은 물리적 자연의 시간을 넘어 주객이 하나가 되는 심미적 직관의 황홀경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동양적 정관(靜觀)과 사유의 세계로서 지정합일(知精合一)의 통합이 이룩해낸 한국이미지즘 시의 또 다른 성과가 아니었던가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눈길에서 널 그린다.꽃가루 흩뿌리듯 희게 날리는네 안 같이 깨끗한 눈송일 이고아스라이 꿈처럼 다함없는 길이리도 다사로움 내 안을 에워쌈은네 고운 숨결 희게 무늬져목마른 내 영(靈)을 적셔줌인가.그렇듯 사랑으로 우러르던 큰 뜻버린 채 외롭게 이방에 떠돌아도네 다냥한 얼굴 빈 가슴에 포근히 퍼지는이 길은 어느 순한 고향길인가. 눈길에서 맺히도록 널 그린다고독한 시인의 퇴색한 외투에고이 얹히는 하얀 손길이여.눈은 내려 내려 황홀한 사연-「눈길에서」 전문전북 부안에서 출생한 백양촌(白楊村:1916-2003)의 본명은 신근(辛槿)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하여 중학교와 대학을 수료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년 전주사범학교 교사로 첫 부임하였다. 이후 전라신보사 편집 부국장('47), 삼례중학교 교사('49) 전북일보 상임 편집고문 겸 논설위원('50), 전주고등학교('53), 김제농고('59), 전주성심여고 교사('59-'80)로 근무하면서 평생을 언론과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1946년 5월 『월간 예술』지에 시 「동방의 새아침」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하는 가운데, 도내의 각 신문에 시, 동요, 평론 등을 발표하면서 전북문단의 초석을 닦는데 앞장섰다. 1962년 문협 전북지부장, 예총 전북지부장('66-'67년)을 지내며 전북문화상 문학부문('66년)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목마른 내 영혼'을 곱고 영롱하게 적시고 있는 '깨끗한 눈송이', 이는 순백의 대자연과 하나가 되는 절대지향의 순결의 세계다. 이러한 그의 '순결주의'는 다른 시, '내 마음 아실 이 어데던 한 분 쯤 계실 법 하건만'(「求心」)과, '내 마음 언제나 하늘 가에 떠도네'(「봄」) 등으로 이어지면서, 이처럼 초기부터 그의 시에서는 분명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는 다른 그 어떤 정신적 이데아에 대한 추구가 아니었든가 한다. 이러한 이데아 지향의 순결성은 또한 그만큼 현실과의 갭(gap)을 좁히지 못한데서 오는 외로움과 고독을 유발하는 그의 시적 정조(情操)가 되기도 한다. 여기 서면 태고의 숨결이 강심에 흐려 어머니, 당신의 젖줄인양 정겹습니다. 푸른 설화가 물무늬로 천년을 누벼 오는데 기슭마다 아롱지는 옛 님의 가락 달빛 안고 하얀 눈물로 가슴 벅차옵니다 목숨이야 어디 놓인들 끊이랴마는 긴 세월 부여안고 넋으로 밝혀 온 말간 강심 어머니, 당신의 주름인양 거룩하외다 길어 올리면 신화도 고여 올 것 같은 잔물결마다 비늘지는 옛 님의 고운 가락 구슬로 고여옵니다. -「강」 전문 퍽 곱고 여린 여성적 화법의 이 시는 2003년 11월 전주 덕진 공원에 새겨져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세상을 순화하여 가는 지순하고도 아름다운 작업'이라는 평소 그의 지론처럼, 이 시와 더불어 선생의 곱고 말간 시의 강심(江心)은 오래토록 우리 곁에 여울져 흐르리라고 본다./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자화상」에서, 1937'애비는 정말 종이었을까?', 가난한 농촌의 아들이었다면 미당이 어떻게 서울 중앙고보에 다닐 수 있었을까? 왜 두 번이나 학교를 퇴학하고 또 불교전문강원마저 뛰쳐나오고 말았을까? 등등…늘 궁금한 게 많았다. 몇 년 전 고창에 있는 미당 문학관에도 들렀다. 그곳은 여전히 허술하고 썰렁했다. 전시된 내용도 빈약하고 그저 여기저기에 있는 작품들을 그대로 모아 나열해 놓은 듯 중복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어떤 시는 오자(誤字)를 그대로 복사하여 게시해 놓기도 하였다. 다른 지역의 문학관에 비하여 그 관리가 너무 소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서 미당의 아우 서정태 옹을 조우하게 되어 미당가(家)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당의 아버지(서광한)는 구한말 무장현에서 치른 과거(초시)에 응시하여 장원한 수재였다고 한다. 그러나 갑오경장 때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복시(覆試)의 기회를 잃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당시 무장 현감이 미당의 부친을 오늘 날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한성학원에 보내 신식교육을 받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미당의 부친은 이후 측량기사가 되어 고창군에서 근무하다 총독부가 토지개혁을 실시하게 되자 당시 호남의 대지주였던 인촌 김성수 집안에서 농토관리 일을 맡게 된다. 이런 연고로 미당이 인촌이 설립한 중앙고보에 입학하게 되자 부친은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 미당이 중앙고보를 퇴학당하고 또 어렵게 편입한 고창고보에서까지 퇴학을 당하자 집에서 쫓겨나 서울로 갔다. 이후 마포구 도화동 빈민굴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박한영 선사가 그를 중앙불교전문학교로 불러 아버지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를 자애롭게 보살펴 주었다. 그를 시인의 길로 그리고 평생토록 부처님 세계와의 인연을 심어준 유일하고 절대적인 스승이 박한영 선사였다. 1936년 『동아일보』에 신춘시「벽」이 당선되고, 이듬해에「자화상」이 발표된다. 그의 초기 시에는 이처럼 식민지 노예로 살아가야만 했던 청년 미당의 울분과 자조, 아버지에 대한 불효의 고통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이런 미당이 일부 친일 시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의 시는 일제의 암울한 질곡 속에서도 한민족의 정한을 격조 있게 승화시켜 아름답게 엮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럼에도 일부 친일시를 문제 삼아 그의 시 전체를 배척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친 배타(排他)는 결국 배자(排自)로 돌아오는 법, 오히려 이를 반면교사로 교훈 삼아 보다 성숙한 미래를 열어가는 게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一千九百三十三年 지각이 얼기 시작하든 첫날, 내집에 오는 길 전차에서 나는 매우 침착한 소녀를 만낫서라 초생달 갓흔 그의 두 눈썹은 가장 아름다워 그린듯 하고 포도주 빗갓흔 그의 입술은 달콤하게도 붉었섯다. 그러나 도람직하고 귀여운 그 얼골에는 맛지 않는 근심빗이 떠도라 잇고, 웬 셈인지 힘을 일코 떠보는 두 눈가에는 桃紅色의 어린빗이 떠도라라. -「少女의 죽음」에서, 『금성』제2호, 1924.1 유엽은 전주 출생(1902-1975)으로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문과를 중퇴한 후, 1923년 11월 일본 와세다 대학생이었던 손진태, 양주동, 백기만 등과 함께 한국현대시문학의 초석이 되었던 시전문지『금성』을 주도한 인물이다. 여기에, 당시『학생계』에서 습작활동을 하던 김동환과 김창술을 신인으로 추천하면서 후배 양성과 현대문학 이론에도 밝은 전북의 선구적 시인이었다. 「少女의 죽음」은 우리 근대시에서 최초의 서사시에 해당된 작품이다. 고대 서사시는 민족적 영웅의 행위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한 장중하고 웅대한 구성의 산문시를 뜻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시민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자아에 눈을 뜨게 되자 서사시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영웅에서 소시민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시 또한 전차 안에서 만난 소녀와, 신문에 실린 임신한 여인의 자살 기사를 결부시켜 쓴 3연 142행에 이르는 장시(長詩)로서, 한국현대시사상 서사시의 효시에 해당된 작품으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서사시라고 일컫는 김동환의「국경의 밤」(1925)보다 1년 앞선 셈이다. 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던 남녀 간의 정사(情死) 문제, 곧 사랑을 이루지 못한 한 소녀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사회적 병리 현상을 서사적 형식에 담은 시다. 연약한 소녀와 절대 권력의 가부장적 사회제도와의 대립은 표면적 기호일 뿐, 일제라고 하는 무소불위 폭력과 그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민의 처지와도 무관치 않으리라고 본다. 가을 밤 구르는/ 낙엽 소리는/ 완연한 옛날/ 그 발소리라.//아, 다시는 못들은 / 익은 발소리/ 물끄러미 나는 / 눈물 삼키다.-「낙엽 노래」부분 , 『금성』제1호, 1923.11어떤 흐린 그믐밤 빛 없는 골방에서/.../ 낡은 이불에 눌려 죽은 듯이 누워 있으니....../ 세월은 어둠과 악수하고서/ 코웃음을 히히 웃으며/ 문틈으로 새여 흐른다.-「겨울 밤의 哄笑」부분 ,『금성』제3호, 1924.5'떨어져 구르는 낙엽 소리' 에 상심한 시인은 이후 '골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골방은 거리의 유혹과 빛이 차단된 폐쇄 공간이다. 그만큼 시대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1920년대 화자의 어두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고장에 이미지즘 운동의 기본 태도와 예술지상주의론을 도입한 최초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인이란 '리듬을 중시하고, 정확한 언어 사용과 불필요한 수식어 삭제, 그러면서도 자연의 심오한 묘리(妙理)와 우주의 진리를 천진난만하게 노래하는 철인이요 도인(道人)이어야 함'을 강조하였음이 그것이다.(「유물사관적 문예론의 근본적 모순」(조선일보 ,1927, 6.23)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창 앞에로 한 마리 비둘기가 날렀다. 마음으로 당신의 생각이 지나갔다. 비둘이 날개가 공기에 구멍을 뚫었다. 생각의 주둥이가 심장(心臟)의 피를 흘리었다. 창 앞에로 한 마리 비둘기가 날렀다. 마음으로 당신의 생각이 지나갔다. -「구鳩」전문(조선일보, 1925)'비둘기'처럼 자유를 향해 '공기에 구멍을 뚫거나' 솟구치지 못한 화자는 '심장의 피'를 흘리며 내출혈을 앓고 있다. 그 앞에 '창(窓)'이 가려 '주둥이'가 매번 '피를 흘릴'뿐이라는 좌절과 절망, 이렇게 당신과 하나가 되지 못해 분리되어 있는 화자의 심정을 '비둘기:창',' 나:당신'이라는 객관적 대칭구도를 보임으로써 김창술 시인은 1920년대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이미지스트로서의 선구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 1920년대가 주관적 감정의 토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절임을 감안하여 볼 때, 김창술의 이러한 표현 기법은 실로 참신한 발상과 생동감 있는 이미지의 형상화가 아니었던가한다. 절대로 평등인 큰 길 위에 네 활개를 벌리고 활보한다.차별이란 한 푼어치도 없고 큰 길 위에는 乞人-貴族- 賣淫女- 貴婦人- 勞動者- 資本家- 모두가 자유로 걸어를 간다이세상어느곳에이나오즉이길만은평등주의자다염치빠진 이세상에는 길만이 거룩한 성자이다. -「大道行」에서(『개벽』 1925, 2)1902년 전주시 중앙동에서 출생하여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봄」이 당선 되고, 동년 「大道行, 「촛불」 등을 『개벽』지에 발표하면서, 김창술은 이후 일제의 침략이 심화되어 가자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맹원으로 가담하여 계급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 근로 대중의 불안과 고통에 대한 반항 정신을 반영한 수많은 프로레타리아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처럼 민족의 현실을 직시한 비판적 리얼리즘 성향으로 민족해방을 위한 문학 운동 전선에서 앞장서 활약했던 1920년대 진보적 시인이었다. 봄이 온다고 조와서 발버둥친다 멋도 모르고 사내와 개집들....../.../ 나물 소코리 옆에 끼고 논두렁 밭두렁 사뿐히 다니며 나물을 캐는 언년이와 언놈이/.../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고생이 보인다. 봄이 온다고 떠들지 마라 봄 쓰라림이 또한 있나니 -「푸른 하늘」부분(조선일보,1925. 4)일제침략기 한국의 문학이 병약한 식민지 종속 문학으로 굴절되어 가고 있을 때, 이처럼 민족적 각성을 촉구한 항일 민족시가 이 무렵에 발표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순치되어 가는 젊은이들에게 일제는 더 이상 우리의 동지가 아님을 경고하면서 망국민으로서의 슬픔과 자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초기 시는 개인적 서정의 감상에서 출발하였으나, 점차 민족의 현실을 직시, 계급타파와 민족 해방을 꿈꾸었던 일제침략기 이 고장의 진보적 저항 시인이었다고 본다. /백제예술대 명예교수
난이(蘭)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즈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작은 짐승」 전문, 1936 처녀 시집 『촛불』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이 시에서의 화자는 이미 인간이 아닌 짐승 그 자체가 되어 있다. '하늘'과 '바다'를 원경으로 작은 짐승들처럼 언덕에 앉아 있는 풍경은 평화와 순수 그리고 원시적 자연의 모습 그대로이다. 타고르의 시에 나오는 어린아이처럼 그것은 천진난만의 세계요, 거칠고 각박한 현실로부터의 탈출, 아니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낙원에 대한 회복과 동경이기도 하다. 3연 후반부 '떨리는 심장같이 자즈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의 황홀한 풍경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원시적 생명감에 대한 원초적 갈망이 아닌가 한다. 비 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少年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처럼 부셔졌다.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내 지친 목소리는 海風 속에 묻혀 갔다.층층나무 이파리에서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왔었다.-「어머니 記憶ㅡ 어느 少年의ㅡ」 에서, 1967어머니의 부재에서 오는, 어린 시절 화자의 외로움과 청맥죽을 마시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청개구리처럼 외롭고 애틋하다. /백제예술대 명예교수
1물이 얼다국경을 흐르는 물이 얼다낮이면구름도 떠돌지 않는하늘이 멱을 감고밤이면푸른 별들이 내려와꿈을 파묻고 가는국경(國境)二千里를 흐르는얄루江 물이 얼다.2한결휘파람만 치는삭북(朔北)의 하늘!아아 한 자락 하늘도 만져 볼 수 없는내 마음이여얼음을 깨뜨리고떨어지는 하늘을 마시고 싶다. 한 울음두 울음싫도록 퍼 마시고 싶다.-「국경에서」 에서(동아일보,1940년)해강 김대준 시인은 1939년 『시건설』의 발행인이며 문학적 동지인 김남인을 만나러 평북 중강진으로 간다. 영하 40℃를 오르내리는 압록강 한ㆍ만 국경지대 중강진, 거기에도 움직이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모두가 꽁꽁 얼어 갑갑하기 짝이 없는, 그것은 '한 자락 하늘도 만져 볼 수 없는 조국의 어두운 현실과 다름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얼음을 깨뜨려' '떨어지는 하늘을 마시고 싶'어 하면서, 망국민으로서의 좌절과 슬픔, 아니 그만큼 새날에 대한 동경과 염원이 남달리 뜨거웠던 시인이었다. 나는 능금을 땄노라. 그러나 진정 너를 사랑하길래 능금을 푸른 바다에 던지노라. -「슬픔」 전문(1952년)소유와 집착을 넘어 보다 크고 아름다운 순수를 원하고 있다. 이런 삶의 자세로 광복과 6.25라는 역사의 질곡속에서도 끝내 자신을 올곧게 지켰던 시인이었다. 김해성 시인은 은사인 해강에 대해 '산같이 고고하게 선학(仙鶴)처럼 곱게만 살아온 시인이다. 인자스런 그 표정에 언제 보아도 모란꽃처럼 안으로 미소를 짓고, 정구선수답게 정정한 모습은 마치 학(鶴) 한 마리가 서 있는 듯싶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03년 전주시 전동에서 태어나 전주고등학교 교사와 예총전북지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세속과 명리를 멀리하며 전주시 평화동에서 학처럼 살다 1987년에 돌아가신 호남의 맑은 선비 시인이었다. 철따라 / 그럭저럭 / 벗들은 다 가버리고 // 그토록 찬란하던 하늘에는 / 별도 하나 둘씩 꺼져가고// 실성한 여인의 한 숨처럼/ 바람만 뒤설레는 / 이슥한 밤// - 이 밤이 다 새도록/ 목 놓아 불러보고만 싶은// 아아 불러도 오지 않을 / 그대의 이름// 나의 사랑이여 ( 「노후」에서, 1977년) /백제예술대 명예교수(hanmail.net)
한국 문학의 오늘이 있기까지 전북 출신 문인들이 기여한 공은 참으로 컸다. 특히 한국 현대시의 탯자리에 전북의 시인들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문단에 큰 발자취를 남긴 전북 시인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들춰보는 연재물을 마련했다. 김동수 백제대예술대 명예교수(66)가 매주 한 차례씩 시인 한 분의 시와 시시계를 조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김 교수는 남원 출신으로, (사)한국미래문학연구원장전국대학 문예창작학회장 등을 지냈으며, 온글문학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야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 「난초 4」 전문, 『문장』, 1939. 가람(1891-1968)은 성품이 호탕하여 술과 더불어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가운데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위력의 시인이었다고 한다. '굳은 듯 보드라운' 난초의 외양에서 부드러우면서도 꺾기 어려운 선비의 기품을, '우로 받아 사느니라'에서는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난초의 고고한 성품을 그리고 있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 하였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방렬(芳烈)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별유 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였다'고 할 정도로 난초와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면서 세속과 가사와 명리를 잊고 오로지 시조와 학문 연구에만 열중하였던 가람이었다.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 쓰린 괴로움을 말도 차마 못하시고 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까만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동기 어리던 팔구 남매 따뜻한 품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 「젖」 전문, 『가람시조집』, 1939 고시조의 상투적인 영탄조에서 벗어나 시적 발상도 자유롭고 감동적인 현대 시조이다. 임종을 앞둔 어머니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자식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자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말할 기력이 없자 궁리 끝에 앙상한 가슴을 헤쳐 까만 젖꼭지를 꺼내 보이신다, 마치 석가가 영취산에서 제자들에게 들어 올린 연꽃처럼 이승에 남아 있는 자식들에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주고 싶었던 무언의 깨우침, 이는 서경(敍景)으로써 서정을 대신한 입상진의(立象盡意)의 가르침이 아니었던가 한다.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 「별」 전문, 1947, 9 가을 밤. 밤하늘의 달과 별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생각을 한 줄로 결합 시키는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가로운 한국적 야경도 좋으련만 밤늦도록 호젓이 뜰에 나와 우주의 신비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골똘한 응시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람 시조의 특징은, 경물을 통해 넌지시 선심(禪心)을 드러내는, 말을 다했으되 그 뜻(興)은 다함이 없는 '무기교의 기교'에 있다.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서 출생하여 육당과 더불어 시조 부흥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서울대 문리대 교수와 전북대 문리대학장,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면서 국문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요 국문학자였다. /백제예술대 명예교수김동수 시인 약력△남원 출신 △백제예술대 방송시나리오극장과 교수 △1982년 월간 '시문학'추천 완료 △한국미래문학연구원장 △국제펜클럽 전부지부장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전북문화상백양촌문학상한국비평문학상시문학상 수상 △수필집 '전라도 사람들', 시평론집'한국현대시의 생성미학', 시창작작이론서 '시적 발상과 창작', 시집 '흘러' 등 7권 저술
군산 출신 배우 김수미 씨 별세⋯전북 애도 물결
부안여성작가 13명, 30일까지 제9회 단미회展 ‘Art Memory’
전북시인협회장 후보에 이두현·이광원 최종 등록
"다 같이 다 함께"… 원불교 전북교구 교단 기틀 정비, 새로운 도약 준비
전북 청년작가들의 비빌언덕, 유휴열미술관
마음의 평화, 행복한 세상⋯금산사서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전북작가회의, ‘불꽃문학상’ 황보윤·‘작가의 눈 작품상’ 박복영
제4회 민족민주전주영화제 14일 개막
국내 첫 ‘남성완판춤전’, 전주에서 열린다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아동문학가, 이경옥 ‘진짜 가족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