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자화상」에서, 1937
'애비는 정말 종이었을까?', 가난한 농촌의 아들이었다면 미당이 어떻게 서울 중앙고보에 다닐 수 있었을까? 왜 두 번이나 학교를 퇴학하고 또 불교전문강원마저 뛰쳐나오고 말았을까? 등등…늘 궁금한 게 많았다.
몇 년 전 고창에 있는 미당 문학관에도 들렀다. 그곳은 여전히 허술하고 썰렁했다. 전시된 내용도 빈약하고 그저 여기저기에 있는 작품들을 그대로 모아 나열해 놓은 듯 중복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어떤 시는 오자(誤字)를 그대로 복사하여 게시해 놓기도 하였다. 다른 지역의 문학관에 비하여 그 관리가 너무 소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서 미당의 아우 서정태 옹을 조우하게 되어 미당가(家)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당의 아버지(서광한)는 구한말 무장현에서 치른 과거(초시)에 응시하여 장원한 수재였다고 한다. 그러나 갑오경장 때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복시(覆試)의 기회를 잃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당시 무장 현감이 미당의 부친을 오늘 날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한성학원에 보내 신식교육을 받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미당의 부친은 이후 측량기사가 되어 고창군에서 근무하다 총독부가 토지개혁을 실시하게 되자 당시 호남의 대지주였던 인촌 김성수 집안에서 농토관리 일을 맡게 된다. 이런 연고로 미당이 인촌이 설립한 중앙고보에 입학하게 되자 부친은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 미당이 중앙고보를 퇴학당하고 또 어렵게 편입한 고창고보에서까지 퇴학을 당하자 집에서 쫓겨나 서울로 갔다.
이후 마포구 도화동 빈민굴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박한영 선사가 그를 중앙불교전문학교로 불러 아버지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를 자애롭게 보살펴 주었다. 그를 시인의 길로 그리고 평생토록 부처님 세계와의 인연을 심어준 유일하고 절대적인 스승이 박한영 선사였다. 1936년 『동아일보』에 신춘시「벽」이 당선되고, 이듬해에「자화상」이 발표된다. 그의 초기 시에는 이처럼 식민지 노예로 살아가야만 했던 청년 미당의 울분과 자조, 아버지에 대한 불효의 고통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이런 미당이 일부 친일 시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의 시는 일제의 암울한 질곡 속에서도 한민족의 정한을 격조 있게 승화시켜 아름답게 엮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럼에도 일부 친일시를 문제 삼아 그의 시 전체를 배척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친 배타(排他)는 결국 배자(排自)로 돌아오는 법, 오히려 이를 반면교사로 교훈 삼아 보다 성숙한 미래를 열어가는 게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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