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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람 이병기 - 현대시조·국문학 연구의 태두

한국 문학의 오늘이 있기까지 전북 출신 문인들이 기여한 공은 참으로 컸다. 특히 한국 현대시의 탯자리에 전북의 시인들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문단에 큰 발자취를 남긴 전북 시인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들춰보는 연재물을 마련했다. 김동수 백제대예술대 명예교수(66)가 매주 한 차례씩 시인 한 분의 시와 시시계를 조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김 교수는 남원 출신으로, (사)한국미래문학연구원장·전국대학 문예창작학회장 등을 지냈으며, 온글문학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야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 「난초 4」 전문, 『문장』, 1939.

 

가람(1891-1968)은 성품이 호탕하여 술과 더불어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가운데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위력의 시인이었다고 한다. '굳은 듯 보드라운' 난초의 외양에서 부드러우면서도 꺾기 어려운 선비의 기품을, '우로 받아 사느니라'에서는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난초의 고고한 성품을 그리고 있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 하였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방렬(芳烈)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별유 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였다'고 할 정도로 난초와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면서 세속과 가사와 명리를 잊고 오로지 시조와 학문 연구에만 열중하였던 가람이었다.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

 

쓰린 괴로움을 말도 차마 못하시고

 

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까만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동기 어리던 팔구 남매

 

따뜻한 품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 「젖」 전문, 『가람시조집』, 1939

 

고시조의 상투적인 영탄조에서 벗어나 시적 발상도 자유롭고 감동적인 현대 시조이다. 임종을 앞둔 어머니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자식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자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말할 기력이 없자 궁리 끝에 앙상한 가슴을 헤쳐 까만 젖꼭지를 꺼내 보이신다, 마치 석가가 영취산에서 제자들에게 들어 올린 연꽃처럼 이승에 남아 있는 자식들에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주고 싶었던 무언의 깨우침, 이는 서경(敍景)으로써 서정을 대신한 입상진의(立象盡意)의 가르침이 아니었던가 한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 「별」 전문, 1947, 9

 

가을 밤. 밤하늘의 달과 별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생각을 한 줄로 결합 시키는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가로운 한국적 야경도 좋으련만 밤늦도록 호젓이 뜰에 나와 우주의 신비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골똘한 응시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람 시조의 특징은, 경물을 통해 넌지시 선심(禪心)을 드러내는, 말을 다했으되 그 뜻(興)은 다함이 없는 '무기교의 기교'에 있다.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서 출생하여 육당과 더불어 시조 부흥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서울대 문리대 교수와 전북대 문리대학장,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면서 국문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요 국문학자였다. /백제예술대 명예교수

 

김동수 시인 약력

 

 

△남원 출신 △백제예술대 방송시나리오극장과 교수 △1982년 월간 '시문학'추천 완료 △한국미래문학연구원장 △국제펜클럽 전부지부장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전북문화상·백양촌문학상·한국비평문학상·시문학상 수상 △수필집 '전라도 사람들', 시평론집'한국현대시의 생성미학', 시창작작이론서 '시적 발상과 창작', 시집 '흘러' 등 7권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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