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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왔습니다. 가을은 없습니다. 두 계절을 잇는 게 없어 눈 내린 사막에 서 있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닷속에 탄소를 잘 흡수하는 해초를 심는 잠수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산소 방울이 코끝에 매달리는 것 같습니다.

안희연 시인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을 펼칩니다. 가을 속을 헤엄치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여름과 겨울은 잘 보이는데 가을은 그렇지 않습니다. 온몸에 눈을 매달아야 겨우 볼 수 있습니다. 휘황한 모호성 속에 가을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의 공(工) 자엔 하늘과 땅을 이으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꼿발을 들고 하늘 우물을 파려는 정성을 다해야 가을이 몇 방울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불은 꺼진 지 오래이건만/ 끝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불은 조금도 꺼지지 않고”(‘불이 있었다’ 중). 불이 꺼졌습니다. 그런데 꺼지지 않았습니다. “끝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라네요. 생각해 보니, 내 생명도 아직 끝나지 않았군요. 당신을 향한 사랑도 아직 끝나지 않았네요. 돈벌이도 아직 더 해야 하고요. 걷기도 더 해야 합니다. 술도 좀 더 마셨으면 합니다. 부스터 샷도 맞아야 할지 모릅니다. 끝나지 않는 것들을 열거하자면, 이 맑고 맑아 지구 끝이 보일 듯한 날을 다 써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래요. 불이 꺼져도 끝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게요. 그러면 따스한 불을 쬐며 불멍이라도 때릴 수 있을 겁니다.

첨단(尖端)은 ‘뾰족할 첨’에 ‘끝 단’입니다. 영어로는 ‘cutting edge’이고요. 나는 우리말을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영어가 좋아요. 첨단이란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자르는 거라고 말하니 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희연 시인은 독자가 손 베이지 않도록 시어를 부드럽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첨단을 달리는 것이라니요. 훅 끌립니다. “털실은 강물 같았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보기에 좋아야 한단다 아가야, 허물 수 없다면 세계가 아니란다. 털실의 길이는 제각기 달랐지만 어떤 뭉치든 빛과 어둠의 총량은 같았다”(‘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중). 옛 고구려 영토인 백암산성에 갔어요. 그 앞을 아름다운 털실같이 흘러가던 태자하도 나도 빛과 어둠의 총량은 같았지요. 허물어져야 다시 세울 수 있겠지요. 나는 무엇을 없애 세상의 예리한 모퉁이를 만질 만하게 할 수 있을까요.

손대지 않아도 저절로 숲이 되는 숲을 바라봅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서도 스스로 변하는 것들은 많지요. 어쩌면 그 변화가 진짜 변화입니다. “한밤중에도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이 숲을 완성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미동’ 중). 자꾸 무엇을 완성하려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반성합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완성하려 하지 않아도 완성되는 경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손대지 않아도 저 갈 길을 가는 코끼리처럼. 마음속에 있는 거울에 인과 너머의 것을 쓰고 자주 바라봅니다. 언젠가는 초인과를 따서 인과의 박스에 담는 소리 낭자하겠지요.

 

이영종 시인은...

2012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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