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전주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떠나는 임안자 부집행위원장
"전주국제영화제는 사람으로 따지면 어렵고 가난하게 성장했지만 스스로 이만큼의 위치까지 올라온 자수성가한 사람입니다. 고생 많이 하면서 큰 영화제라 의미가 더 깊습니다. 앞으로도 전주가 '자유 독립 소통'이란 명제를 잘 지켜나가길 바랍니다."지난 8일 '2009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공로패를 받는 임안자 부집행위원장(67)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그가 떠난다. 2002년 3회 영화제 심사위원을 시작으로, 4회 옵서버로 다시 초청받았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전 전주영화제와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고, 2004년 5회부터는 8년 동안 일해 온 부산영화제를 떠나 부집행위원장으로 전주영화제에 합류했다.20여 년간 영화평론가, 영화제 심사위원, 프로젝트 기획자로 활동해 온 그는 스위스에 거주하며 필요한 영화인과 영화의 정보를 제공하고 교류를 하는 등 국제적인 차원에서 일해 왔다. 그가 애정을 쏟아부은 특별전은 전주영화제를 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그러나 지난해 스트레스로 인한 뇌혈증으로 쓰러지면서 전주영화제를 찾지 못했다. 그는 "그 시기에는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였다"며 "그럼에도 중앙아시아 특별전이 매진됐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이가 많다고 해서 항상 필요한 건 아니죠. 나는 젊은이들의 표정으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읽습니다. 경험이 없다면 시행착오를 하면서 젊음으로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임 부위원장은 "10회 때는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늙은 사람들은 다 떠나자고 했었다"며 "전주에서 진심으로 행복했다"며 웃었다. 그는 "행복하게 간다"는 말을 남겼다.◆ 부산영화제에서 일하다가 전주에 왔을 때 첫 인상은.△ 전주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가서 현실을 보고 싶었다. 의외로 문제들이 많았는데, 무엇보다 영화제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정의에 있어 전문가나 시민, 자치단체 등 저마다 인식의 차이가 컸다. 그러면서도 막상 영화 전문가들은 별로 없었다.그러나 영화제 조직체나 예산은 허술해도 프로그램만큼은 벌써 국제적인 수준이었다. 그 때 희망을 읽었다. 전주에 올 때 "왜 잘나가는 부산을 떠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곧 있으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인 것 같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쿠바, 마그렙, 소비에트, 터키, 중앙아시아의 우수작품들을 찾아냈다. 부위원장님이 직접 꾸린 특별전은 영화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 호응이 대단했는데.△ 세계의 보물을 가져다가 전주에서 터뜨리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쿠바였다. 70년대 중반 페사로영화제에서 처음 쿠바영화를 봤는데, 그 때의 충격과 감동을 한국 관객에게 전해주고 싶었다.쿠바는 우리나라와 비수교국이었는데, 양국의 긍정적인 반응에 용기를 얻어 일을 추진했다. 그런데 영화 프린트를 가지고 전주에 오던 감독들이 비수교국 입국문제로 캐나다 경찰에 붙들려 영화제 방문이 한동안 불투명했었다. 다행히 김완주 전 전주시장의 중재로 풀려났다.쿠바영화에는 사회주의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언어와 미학, 철학, 비전이 녹아들어가 있다. 그런 점에서 아름다웠다.2005년 마그렙 특별전은 분노였다. 아랍문화가 인류에게 얼마나 찬란했는가. 그런데 미국이 테러를 당하면서 아랍문화가 한꺼번에 테러리즘이 됐다. 개인적인 항의였던 셈이다.해외 영화제를 오래 다니다 보면 자연히 우정을 바탕으로 한 '영화제 가족'이 생겨난다. 특별전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시간을 통해 맺어진 인적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특별전을 준비하며 내가 인덕이 많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꼈다.◆ 특별전을 하지 못해 아쉬운 나라는 없는가.△ 올해 스리랑카 특별전이 열렸지만, 사실 그루지아를 하기로 돼있었다. 그루지아는 내전이 심하지만, 기막힌 영화들이 많다. 지난해 11월 초청을 받고서도 건강상 이유로 그루지아를 방문하지 못했다. 대신 내가 몸이 아파서 자신이 없지만, 앞으로 전주에서 그루지아 특별전을 꼭 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아마 내년쯤에는 그루지아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물같은 영화를 발견할 때의 기분은 어떤가.△ 좋은 영화를 발견할 때 일종의 환희를 느낀다. 충격적이면서도 떨린다.예술가들에게는 특별한 안테나가 있다. 10년 후, 100년 후를 읽는다. 그러나 어떤 강력한 힘은 안테나를 안으로 꺾도록 강요하지만, 예술가는 자기 예술을 믿을 때에만 예술가다.◆ 요즘에도 평론을 자주 하는가. 평론가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기준이 있을 것 같다.영화는 총체적인 예술이다. 엄청난 기술과 자본까지 투입돼야 한다. 시나리오부터 극장에 걸리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가가 작가처럼 혼자서는 빛을 낼 수가 없다.특별히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은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다시 봐도 감격적인 영화가 좋아진다. 그래서 고전이 있는 게 아닌가. 거기에 잔잔하면서도 한 나라, 한 민족의 정서를 담아낸다면 그것만큼 좋은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영화제를 하면서 아무래도 평론할 일은 줄어들었지만, 글 쓰는 순간에 얻는 행복함은 나에게 제일 큰 기쁨이다. 아무리 못 쓴 글일지라도 잠도 못 자가면서 쓴 글은 다르다. 영화 한 편을 평하려면 문학, 연극, 정치, 사회, 역사 등을 다 알아야 한다. 얇은 지식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다. 무엇보다 평론가들은 솔직해야 한다. 장 뤽 고다르라고 하면 다 죽지만, 평론가들은 욕 먹을 각오로 자기 생각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올해는 영화제는 10주년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이란 점에서 더 특별했을 것 같다.△ 올해 영화제는 예전보다 여유있으면서도 안정적이었던 것 같다. 이제 더 조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영화제가 잘 되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틀을 키운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줄여서 정말 튼튼한 영화제가 됐으면 한다.실력은 있지만 주목받지 못한 감독들을 발굴해 낸다면 그들에게 전주는 얼마나 큰 선물이겠는가. 전주영화제가 대안영화제로 출발한 이상 그 모습 그대로 진정성있는 영화제로 남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전주에 남기고 싶은 말은.△ 전주가 영화제를 시작하며 전통적인 사고와 새로운 미디어가 부딪친다는 점에서 겁도 먹었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전주가 가진 문화가 깊었기 때문에 결국은 영화제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문화의 역사가 있는 나라는 포용은 느리지만 깊이가 있다. 초기의 시행착오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영화제가 전주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좋은 발걸음이 될 것이다. 전주는 전주대로 고유한 문화를 키우면서 새로운 자극으로 영화제를 수용한다면 이상적일 것 같다. 아름다운 조화가 될 것이다.나는 전주를 영화에 대한 내 사랑과 정열을 마음껏 태울 수 있었던 곳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전주가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