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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백의 一日一史]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 벽상의 괘종을 들어 보아라 /

 

한소래 두소래 가고 못오니 / 인생의 백년가기 주마같도다.

 

이 면학가가 크게 유행한 것은 3·1만세 직후의 일로 당시 우리 젊은이들은 배우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깨닫고 향학열에 불탔다.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 각 지방마다 신학문을 공부하겠다는 젊은이들이 무작정 상경, 사립중학에 많이 입학했다. 그런가하면 돈이 떨어져 악의 소굴로 빠진 예도 많았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새 교육을 가능한 한 억제했다. 그래서 해마다 입시지옥의 현상은 심각했다.

 

1921년 3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비참! 6대1의 이 비참”이란 제목으로 “중등학교가 태부족, 교육의 통한! 모집하는 정원은 1천3백 명인데 입학희망자는 7천명에 가깝다. 아! 나머지 소년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고 보도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서울시내 각 중학교별의 모집인원과 지원자 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 (괄호 안은 지원자 수), 중앙 200(1250), 보성 200(1215), 경기 136(788), 휘문 130(750), 양정 100(600), 경복 160(480), 선린 56(445), 경신 100(150)

 

중학진학이 이같이 어렵 자 어떤 어머니는 학교에 찾아가 입학시켜 달라고 울며불며 이른바 낙루전술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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