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의 딸'
내가 사랑했던 세 번째 여인 얘기를 하기 전에 아내 얘길 마저 더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또 하나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지 않고 얘기를 마무리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리’가 아니다 싶기 때문이다.
1999년 내가 한창 시민운동에 열중하고 있었을 무렵, 아내는 광주에서 6개월 동안 취업 겸 유학을 위한 준비를 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2000년 8월, 미국에 간 그녀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노인 간호’를 배웠다.
그러다가, 내가 2004년 총선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하자마자 그녀는 공부를 모두 중단하고 급거 귀국해서 나의 당선을 도왔다. 이 시기가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 시기였는지, 그녀에게 얼마나 귀한 공부였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다른 수많은 동지들의 노력도 컸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내가 과연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 이 순간, (독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지만)그녀가 더 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나의 세 번째 여인. 이산하. 사랑하는 나의 딸이다.
산하는 어릴 적부터 ‘아빠 집’이 수없이 많다고 생각했다. 수배를 당하면서 매일매일 집을 옮겨 다녔고, 그 넓디넓은 대궐 같은 감옥들이 모두 아빠 집이었으니 어린 산하에게는 그렇게 여겨질 법도 했다.
혹여나 산하 엄마가 수배 중이었던 나와 연락이 닿아 만나거나, 감옥에 면회를 갈 때마다 “아빠 집에 가자” 는 얘길 하면, 옆에서 지켜보는 엄마 아빠는 마음이 찢어지는데, 영문 모르는 사람들은 나와 아내에게 이혼한 부부 보듯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곤 했다.
나는 수배 중에도, 투옥 중에도, 산하에게 많은 편지를 썼다. 그 수많은 편지들은 사무치는 그리움과 보고픔을 솔직히 표현한 것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아빠 노릇 제대로 한 번 하지 못한 ‘미안함’을 속죄하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산하가 태어날 때, 그리고 산하가 너무 많이 아파서 힘들어 할 때조차도 나는 수배 중이라는 핑계(?)로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산하는 어렸을 적 지나치게 대문단속을 하곤 했다. 공안당국의 감시가 심해져서 안기부 기관원들이나 형사들이 집 근처를 배회할 때마다 어린 마음에 두려웠던 산하가 할 수 있는 일이 대문을 잘 잠그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어린 산하는 가끔씩 쓸 데 없이 뒤를 돌아보는 버릇이 있었다. 수배 중이었던 내가 산하를 만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기관원들이나 형사들이 자주 산하를 따라다녔던 통에 생긴 버릇이었다. 산하가 대여섯 살이었을 때, 그러니까 유치원을 다닐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전주시민회’ 대표를 맡아 시민운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산하는 유치원이 끝나면 집에 사람이 없어 아빠 사무실에 와서 하루 종일 놀아야 했다. 그러다가 밤 11시 쯤 엄마가 병원 일을 끝내고 집에 데리고 갈 때까지를 기다리지 못해 어느덧 허름한 소파에서 쪼그려 잠들어 있곤 했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내 가슴은 언제나 찢어질 듯 아팠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내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렸을 때의 일이다. 공안당국의 조작에 의해 졸지에 ‘구국전위간첩단’ 전북조직책으로 둔갑한 나 때문에 산하는 ‘간첩의 딸’이 되었고, 초등학교 입학식도 내 후배의 손을 잡고 가야만 했다. 무엇보다 산하에게 내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 아빠가 간첩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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