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현(명지대학교 바둑학과 교수, 프로기사 9단)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선생이 타계하셨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선생이 남기신 업적과 얼을 생각해 본다.
조남철 선생은 부안군 즐포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기타니 미노루 9단 문하에서 바둑수업을 한 후 프로초단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고, 그 이후 우리 바둑계의 체제를 정비하고 바둑을 보급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선생은 바둑용어와 이론에 관한 저술을 통해 현대식 바둑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사랑방 수준의 바둑에서 대중적인 여가활동으로 승격시켰다. 오늘날 한국바둑은 세계 최강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조남철 선생의 헌신적인 바둑보급의 정열 덕분이다.
선생의 바둑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일화는 무수히 많지만 6·25사변 때 리어카로 바둑판을 실어나른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포탄소리가 진동하며 인민군이 서울을 침공하던 때 조남철 선생은 바둑계의 살림살이인 바둑용구들이 불태워질 것을 피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청계천 부근의 기원으로 몰래 들어가 리어카로 바둑판을 날랐다.
당시는 바둑판과 바둑돌이 귀하던 시절이라 이것이 전쟁통에 없어져 버리면 바둑보급에 큰 타격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인민군에게 붙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바둑용구를 보호하려 한 것이다. 우리 바둑의 눈부신 성장은 이러한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조남철 선생은 일본에서 바둑수학을 하긴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우리가 일본바둑을 꺾는 것을 고대해 마지 않았다. 일본의 기사들이 우리 바둑 수준을 얕보고 상대를 잘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한국바둑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프로기사 제도를 도입하였고, 이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마침내 1989년에 조훈현 9단이 세계를 제패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뒤이어 천재소년 이창호의 출현과 함께 한국이 연속적으로 일본을 누르며 최강으로 발돋움했다.
그 때 선생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생전에 일본을 꺾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보았는데 한국이 압도적인 성적으로 일본과 중국을 제압하며 바둑최강국이 되었으니 선생의 감회는 남달랐으리라. 선생의 공적을 기려 정부는 은관문화훈장을 내렸다.
요즘은 한국바둑을 배우고자 명지대학교 바둑학과에 유학을 오는 외국인도 많아졌다. 근래 선생이 수년간 병마와 씨름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시지 못한 게 좀 아쉽다.
선생은 가셨지만 선생이 뿌린 씨앗은 우리나라 바둑팬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선생의 얼을 살려 우리 바둑을 세계에 널리 보급하고 건전한 바둑문화를 창달함으로써 한국바둑을 길이 빛냈으면 한다.
/정수현(명지대학교 바둑학과 교수, 프로기사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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