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을 느끼니 어김없는 가을이다.
패티김이 부른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이란 노래가 생각나기도 한다. 코스모스로 시작해서 국화로 영글어 가는 가을이다.
귀뚜라미가 긴 밤을 지져대며 누군가 보고 싶고 기다려지는 가을이다. 골몰히 생각하고 고민하는 계절이다. 긴긴 밤 밤잠을 설치고 미래를 설계하고 그 풍요로운 가을의 결실을 위해 정진하자고 다짐하기도 한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내 마음의 자유와 평화, 풍요와 보람이라고 했다. 곧 결실의 계절 가을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럴 때 내 고향 고창의 가을 풍경을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가져 본다.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개구쟁이였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노라면 지금도 입가에 웃음이 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남의 보리밭에서 생보리 서리해 먹던 일, 봄이면 뒷산에 올라가 진달래꽃을 따먹던 일, 여름이면 개울가에서 놀던 일, 집안에 있는 시간보다 나가 놀던 시간이 많았기에 손과 볼이 항상 터서 까칠까칠했다. 말썽 많이 피운 것만큼 야단도 많이 맞았던 어린 시절이지만 60이 넘은 지금까지 마음속에 흐뭇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바로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우리 모두의 생명의 시작이자 생활의 밑바탕을 이루는 곳이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라도 항상 위로 받을 수 있는 푸근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다. 깊은 사연과 정이 어려있는 고향. 그렇기 때문에 '고향'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언저리가 따가워짐을 느끼게 되는가 보다.
내 고향 고창은 이렇듯 나에겐 정감 어린 곳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고장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한반도의 산맥 줄기가 서남쪽으로 줄기차게 뻗어 내려오다 우뚝 멈춰선 방장산 아래 맷방석처럼 평평한 야산지대에 안겨 있는 고창은 산이 있고 강이 흐르는데다 바다를 안고 있는 지역조건으로 일찍부터 문물이 발달했으며 옛 성곽인 모양성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고창읍성은 총 길이 1680m로,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모양산성(牟陽山城)이라고 불리는 이 읍성은 방장산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상(山上)의 완만한 곡간(谷間)을 두른 원형으로 동, 서, 북쪽에 각각 문이 설치돼 있다.
고수면 수동리에 위치한 분청사기요지(粉靑沙器窯址)도 큰 자랑거리중의 하나이다. 이 요지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고려청자부터 조선분청사기로 옮아가는 과도기의 분청사기 가마로 전남 광주 무등산 가마와 함께 규모가 크고 다양한 대표적 요지이다.
내 고향 고창은 또한 임진왜란, 동학혁명 때에는 의병이 크게 일어나고 일제 때도 대일항쟁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등 의로움을 중히 여기는 곳이기도 하다. 판소리의 개척자 동리(洞里) 신재효(申在孝), 일제시대 최대 민족자본가였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동경 유학 때 2.8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낭독한 근촌(芹村) 백관수(白寬洙), 세계적인 경제학자 백남운(白南雲), 민간항공기의 개척자 신용욱(愼鏞頊)과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김상협, 진의종 국무총리 등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숱한 인재들을 배출시킨 곳이다.
그러나 내 고향 고창에도 어느덧 도시화의 물결이 밀려들어 요즘엔 어린 시절의 그 풋풋한 정과 낭만이 점점 퇴색되어 가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요즈음 고향을 생각하며 느끼는 그리움은 안타까움과 겹쳐 한층 더 나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고 한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땅의 순리를 믿고 살아가던 순박한 고향사람들. 그들은 이제 하나둘 고향을 등지고 낯선 타향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시험하며 살아가고, 고향은 버림받은 늙은 아내처럼 묵묵히 그 마른 가슴을 안고 옛 추억을 기릴 뿐이다.
기껏해야 자연적 재해만이 큰 위협으로 다가왔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던 농민들이 농수산물 개방, 한미FTA협정이니 뭐니 해서 또 다른 인위적 재해 앞에 당황하고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시원한 가을바람 속에 사랑하는 고향의 향기, 어머니의 향내음이 묻어나는 듯하다. 풍요로운 이 계절 '산천은 의구한테 인걸은 간데없고...'문득 떠오르는 옛 시인의 시귀(時句)에 비쳐진 허무함과 사랑이라는 이름의 꽃을 피우리라.
/김양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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