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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교룡산성 '덕밀암'의 자취를 찾아서 -안기수

안기수(남서울대 교수)

남원 시내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우뚝 솟아 있는 교룡산에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암울했던 역사적 흔적을 간직한 산성(山城)이 위치해 있다. 또한 그 주변에는 만인의총(萬人義塚)이 있어 남원의 정신적 뿌리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교룡산성은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적 흔적과 숨소리를 고이 간직한 유적지로 남아있다. 산성 안에는 덕밀암(德密庵)의 옛 터가 있는데, 마치 이곳이 옛 절터의 흔적임을 암시하듯 지금은 적막하게 잡풀만이 무성하게 자라 이끼 낀 돌덩어리만 세월을 잊은 채 나뒹굴고 있다.

 

그러나 한 때 이곳 교룡산성에 위치한 덕밀암(德密庵)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정신적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애석하게도 덕밀암이 남원의 역사적인 유적지로 알고 있는 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은 암자의 흔적만이 있을 뿐 구체적으로 절터가 정비되지 않았고, 그 암자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우리는 덕밀암이 불교의 교리를 전파한 절로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덕밀암은 3?1독립만세운동 때에 불교계의 대표로 앞장선 33인 중의 한 분이자, 민족 독립운동에 앞장선 남원 출신 백용성(白龍城) 스님이 속세를 떠나 불도에 처음 출가한 암자이다. 뿐만 아니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이 주창한 동학의 발상지이다. 구한말까지는 불교를 설법하는 절이었지만, 현재는 그 암자의 흔적만이 쓸쓸하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백용성 스님의 행적과 동학 운동사를 통해 암자의 존재여부만이 파악될 뿐 그 가치와 의미는 새롭게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백용성 스님과 최제우 선생이 남원의 교룡산에 위치한 덕밀암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를 통해서 유적지를 새롭게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용성 스님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스님은 1864년에 출생하여 1940년까지 세수 77세로 격변의 구한말을 온전히 몸으로 겪으며 살다간 분이다. 용성(龍城)은 남원지방의 옛 명칭인데 용성 스님이 자신의 법호(法號)로 사용한 것이다. 백용성 스님은 당시의 행정구역으로 남원부 번암에서 출생하였다. 스님은 이미 7세에 한학(漢學)을 익혀서 9세 때에는 <합죽선(合竹扇)> 이란 시를 지어 문학적 소양까지 두루 갖춘 신동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그 후 14세 때는 교룡산 덕밀암에서 불가의 법을 인가받은 꿈을 꾸었다고 전하고 있다.

 

백용성 스님이 교룡산 덕밀암으로 출가한 과정을 보면 스님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용성 스님은 자신의 출가시(出家詩)를 통해서 불도에 입적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불망전세사(不忘前世事): 전생의 세상일을 잊지 아니하고

 

몽중불수기(夢中佛授記): 꿈 가운데 부처님이 수기(授記)하셨도다

 

출가덕밀암(出家德密庵): 교룡산성 덕밀암에 출가하니

 

기불친몽불(其佛親夢佛): 그 부처님이 꿈에 친히 뵌 부처님이로다.

 

이같이 용성 스님은 깨달음이 있어 곧바로 출가를 결심하게 되는데, 남원 교룡산성에 있는 덕밀암(德密庵)은 스님이 처음으로 출가하여 수행한 암자였다. 특히 덕밀암과 그곳의 부처님은 용성 스님이 바로 꿈속에서 만난 똑 같은 절과 부처님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덕밀암은 단지 용성 스님에만 관련된 암자는 아니다. 동학(東學)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최초로 동학이라는 용어를 이끌어내고 설파한 곳이며, 수운 선생이 득도한 후에 6개월 이상 머물렀던 곳이자, 전주?진산?금산까지 왕래하며 동학을 포교한 역사적인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덕밀암 은적당(隱寂堂)에 은거하면서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論學文)> 을 집필하고,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典)> 의 내용을 정리하여 동학을 포교함으로써, 뒷날 전라도 지역 동학포교의 거점이 되어 동학농민운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한 역사적인 진원지이다. 따라서 덕밀암은 남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자취가 고이 서려있는 암자라고 하겠다.

 

무엇보다 교룡산성의 덕밀암은 남원 출신의 용성 스님이 외세 침략으로 인한 민족의 시련기 속에서 주체성을 잃어가는 국민들에게 민족 주체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호국의 법을 쉼 없이 설파한 곳이자,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라는 정신적인 큰 의미를 가진 암자라고 하겠다.

 

지리산 교룡산성에 위치한 덕밀암(德密庵)은 암울했던 시기에 우리 지역의 위대한 스님이 최초로 출가하여 불법을 깨우쳐준 곳이자, 우리 민족의 혼을 지킨 곳이며, 나아가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배어있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하겠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은 물론 민족사관을 올바로 깨우쳐 주기 위해서도 이곳 덕밀암을 민족의 선각지이자 역사적 유적지로 복원하여 길이 후대에 남길 필요가 있다.

 

/안기수(남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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