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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곰같이 좋은 사람...떠나간 소설가 오찬식을 그리며 - 윤영근

윤영근(소설가·남원예총회장)

오찬식을 좋아하는 몇몇 우리 친구들은 그를 곰이라고 불렀다. 쓸개가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그저 목젖이 짜릿한 소주 한잔이면 세상도 사람도 웃음으로 용서하는 폭넓은 사람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 항상 눈물이 고여 있으면서도 노상 만면에 웃음을 지울 줄 모르는 바보스런 사람이었다.

 

오찬식과 나는 같은 남원사람이었지만 전에는 서로 몰랐고 1958년 7월 장마로 후덥지근하던 어느 날 명동에 있는 「돌채」라는 다방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돌채」다방은 그 유명한 시인 공초 오상순 선생님의 문하생들의 둥지였으며, 글쟁이들이 성시를 이루는 곳이었다. 그날 그 다방에서 유난히 전라북도 사투리로 다방 안을 시끄럽게 왜장을 치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한 사람은 스틱을 집고 한 다리를 절고 있었고, 한 사람은 어미 곰처럼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두 사람에게서 진동하는 술 냄새는 속을 미식거리게 했지만 그들의 행동거지가 얄밉지 않아 모두들 웃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스틱의 주인공은 세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요절한 당시대 문단에 이름을 날리던 전북출신 작가 신석상 선생이었고, 곰같은 덩치는 오찬식이었다. 그날 서로 연배가 비슷한 우리는 충무로3가 후진 부뚜막 선술집에서 탁배기를 거나하게 마시고 외국어 대학 뒷산너머 석관동 오찬식 자취방으로 몰려갔다. 그의 자취방에는 준비된 예비문인답게 원고지며 문예지로 발 뻗을 틈이 없을 정도였다. 세 사람이 겨우 연탄 구들장에 등을 대고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에 일어나 열린 문으로 밖을 보니 오찬식은 주인집 부엌 앞에서 주인아줌마에게 뭐시라고 뭐시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었다. 아침밥을 지을 쌀이 없었던 것이다. 눈치를 챈 신석상형과 나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오찬식을 데리고 석관동 버스종점 국수집으로 갔다. 이것을 인연으로 나와 오찬식은 나의 하숙비로 둘이 3년 동안 자취생활을 하였다. 1959년 그는 자유문학지에 등단이 되었다. 등단 이후에도 글 쓰고 술 마시고 친구 좋아하는 그의 낭만적인 삶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찬식이 돌연이 어디로 사라져버려서 그 행적을 알 수가 없었다. 나도 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군부대 구내식당에서 오찬식을 만나게 되었다. 서로 손을 잡고 사나이들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묘한 서로의 인연에 감사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또 서울에서 만났다. 역시 오찬식은 동가식서가숙의 유랑객이었다. 그냥 내가 근무하는 병원 숙직실에서 밥을 끓여 먹어가며 또 동거를 하게 되었다. 오찬식과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는 영원히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그가 평생에 눈물을 속으로 삭였듯이 나도 그의 영전에 눈물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승에서 또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뜨거운 눈물을 흘릴 것이다. 명복을 빈다.

 

/윤영근(소설가·남원예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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