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은 모두가 지켜야할 자산"
'쓰레기통 할아버지'로 불리는 권호석씨(72·장수군 천천면 연평리)는 장수지역은 물론 전국을 누비며 쓰레기를 줍는 거리의 천사다. 올해로 벌써 40년이 넘게 거리청결에 여념이 없이 그는 인파가 몰리는 전국의 축제장과 행사장에 어김없이 나타나 환경보호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최근 성황리에 마친 '2008 장수 한우랑사과랑' 축제장에서도 권씨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지킨 기초질서 아들딸이 본 받는다. 모든 질서는 내가 먼저'라는 문구가 적힌 조끼와 비닐봉지, 집게를 들고 거리를 누볐다. 무심코 쓰레기를 버린 사람들이 권씨의 쓰레기줍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쓰레기를 다시 집어드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권씨는 이미 행사장·축제장의 마스코트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권씨의 쓰레기줍기는 40년전인 지난 1969년부터 시작됐다. 지금은 권씨의 작업에 대해 모두가 격려하고 박수를 보내지만, 초기에는 권씨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 쓰레기줍기를 시작했던 70년대에는 먹고 살기에도 힘겨운 시기였던 만큼 '환경보호'라는 단어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자기 일을 뒷전으로 미룬 채 축제장만 쫓아다닌다며 '미친X' 라는 험한 소리도 들었다. '자기가 무슨 환경운동가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온갖 비난의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거리 청소를 실천해 온 권씨의 한결같은 모습에 차츰 많은 사람들이 감화하고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 이제는 어른들 뿐 아니라 꼬마들도 그를 반갑게 알아본다는 게 권씨의 귀띔이다.
권씨가 40년동안 '쓰레기줍기' 외길인생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 가족들의 든든한 후원에서 비롯됐다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
31살이었던 권옹은 11살 연하의 부인 김정숙씨와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청소봉사'라는 사명감을 앞세워 쓰레기줍기에 나섰다. 당시 부인 김씨는 말없이 그를 지켜봐주며 소리없는 응원에 나섰다는 것.
권씨는 "무엇보다 5남매가 아버지의 행동에 한마디 불평 없이 사춘기를 보내고 모두가 장학생으로 대학까지 마치는 등 올곧게 성장해줘 고맙다"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말보다는 실천을 통해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14살에 6·25전쟁이 터졌어요. 군대에 들어가 조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우고 싶었는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3번이나 입대를 퇴짜 맞았죠. '가진 것은 없지만 이 한 몸 바쳐 조국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라고 다짐했던 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생계보다는 쓰레기줍기에 몰두한 탓에 경제사정이 어려워 끼니를 굶고 길에서 노숙하는 등 힘든 때도 많았지만 격려의 문구가 가득한 학생들의 편지를 받으며 힘을 얻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권씨의 선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일제시대 일본식 이름이 불려지는 게 싫어 선생님께 반항을 하다 비록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던 권씨는 각종 행사장에서 주는 사례비와 자녀들이 준 용돈을 모아 매년 장수지역 중고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 '제3회 초아의 봉사대상' 사회봉사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상금으로 받은 1000만원을 전액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권씨는 "오라는 곳은 없어도 못 다한 아쉬움이 많아 또 다시 길을 나선다"면서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아쉽다"고 말했다. "기력이 남아 있는 한 쓰레기 줍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권씨는 지금도 쓰레기를 찾아 거리청소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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