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7 13:41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지역 chevron_right 지역일반

[오목대] 보릿고개

요즘은 생경한 말이지만 보릿고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배고픔의 대명사였다. 봄이 되면 지난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이 나고 기대할 것은 보리가 빨리 익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미쳐 여물지 않아 5-6월, 한 두달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이를 춘궁기(春窮期) 또는 맥령기(麥嶺期)라 했다. 어찌나 힘들든지 '보릿고개가 태산보다도 높다'고 할 정도였다.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산에 들어가 나무껍질을 벗기거나 칡뿌리를 캐어 왔다. 논에 나는 자운영을 삶아서 된장에 무쳐 먹기도 하고 쑥에 밀가루를 묻힌 쑥범벅 개떡은 최고의 별미였다. 들에 나가 찔레 순을 벗겨 먹고 삐리를 뽑아 악구댕이 볼을 채워야 했다. 그것도 못먹어 누렇게 부황든 아이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미당 서정주는 그의 시 '보릿고개'에서 곤궁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사월 초파일 뻐꾹새 새로 울어/ 물든 청보리/ 깎인 수정(水晶)같이 마른 네 몸에/ 오슬한 비취의 그리메를 드리우더니// 어느 만큼 갔느냐, 굶주리어 간 아이.// 오월 단오(端午)는/ 네 발바닥 빛깔로 보리는 익어/ 우리 가슴마다 그 까슬한 가시라기를 비비는데…// 뻐국새 소리도 고추장 다 되어/ 창자에 배는데…/ 문드러진 손톱 발톱 끝까지/ 얼얼이 배는데…”다른 시인의 '보릿고개'도 비슷한 정서다. "한 입 덜자고 여물지 않은 딸년 시집보내 울고/ 늙은 할미는 내가 빨리 죽어/ 한 입이라도 줄여야 한다며 늘 넋두리였다/ 하루 해는 왜 이리 길었던가/ 포동포동 살이 찐 허연 달을 바라보며/우물물로 배를 채워도 보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이처럼 배고픔의 상징이었던 보릿고개는 이제 옛말이다. 쌀이 남아 돌고 보리밥은 웰빙과 다이어트 식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에는 보리가 관광상품으로 등장했다. 고창 공음면 학원농장 일대 보리밭 30만평에서 펼쳐지는 청보리밭 축제는 장관이다.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사이로 수십만 인파가 찾아와 북적거린다. '경관농업'으로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이 여물기 전에 가축사료로 사용하기 위해 베어내는 총체(總體)보리는 농가의 효도 작물이다. 김제 벽골제광장에선 9일 '친환경 총체보리 한우축제'가, 군산에선 11일 '꽁당보리밥 축제'가 열렸으니 금석지감이 아닐 수 없다 .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5.12 23:02

[이치백의 一日五話] "종사가 장차 무너질 것임으로…."

◆一日五話(5월 12일) ①영원한 간호사 나이팅게일박애주의자인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업의 획기적인 개혁자이다. 1820년 오늘, 영국에서 태어난 그녀는 크리미아 전쟁 때 야전병원의 개선에 진력한바 있고, 귀국 후에는 간호사 양성시설을 갖추고 간호법의 개량에 진력하는 한편 나이팅게일 장을 1907년에 설치, 5월 12일에 발표했다. ②쓸쓸했던 스메타나의 만년오페라 '팔려버린 신부'를 비롯하여 교향시 '모르다우' 등으로 유명한 스메타나, 체코의 국민음악의 대부로 불리는 그는 프라하에 음악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본인은 장년기에 들어서부터 귀먹어리가 된 대다가 만년에는 시각장애자가 되었다. 결국 정신병으로 1884년 오늘 사망했다.③비스마르크 수상취임독일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피(군대)와 철(군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비스마르크. 그는 이웃나라 오지리와 프랑스를 쳐부수고 마침내 통일성업을 완수하고 1871년의 오늘, 수상에 취임, 독일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빌헬름 2세와는 의견이 맞지 않아 수상자리에서 물러났다. ④이한응 선생 음독 순국"슬프다. 종사가 장차 무너질 것이요, 온 겨레가 모두 남의 종이 되리로다 … " 라는 유서를 남기고 1905년의 오늘, 런던에서 음독 순국한 이한응 선생, 본관이 전의이며 경기도 여주출신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주영공사 서리였다. 국운이 위축되어 감을 슬퍼한 것이다.⑤국내 첫 TV전파 발사우리나라에서 TV 전파를 첫 발사한 것은 1956년 5월 12일 오후 7시 30분이었다. 이는 세계에서는 15번째이며, 아시아 지역에서는 필립핀·일본·태국에 이어 네 번째였다. 국영으로 설립된 것은 아니고, 미국 RCA사의 대리점을 맡고 있던 황태영씨였다. 호출부호는 'HLKZ' 이었다.◆ 一日五話(5월 13일)①사도세자 굶어 죽어조선 영조의 둘째 왕자 장헌이 세자가 되어 1749년부터 왕을 대신 정치를 하던 중 질병에 걸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광행으로 보고하니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1769년 오늘, 굶겨 죽였다. 왕은 뒤에 이를 후회하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②민족단체 흥사단 발족일제 때, 민족운동의 기본이론을 실천한 단체로 유명한 흥사단이 창립된 것은 1913년의 오늘, 미국 센프란시스코에서 도산 안창호의 주도하에 조직된 흥사단은 8도에서 대표자가 참가했으며, 또한 각지에 지부도 조직했다. 흥사단은 지금도 계속하여 활동을 하고 있다. ③'아라비안의 로렌스'시골길을 질주하는 오토바이,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자전거를 피하려다가 전도하여 6일 후인 1935년 오늘 사망했다. 정보장교출신인 그는 터키와 아랍의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불리게 되었던 것.④배우 케리 쿠퍼 사망'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모르코' 등으로 영화펜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케리 쿠퍼. 세계 영화계의 최고봉으로 군림했던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61년 오늘, 낮 12시27분으로 60세였다. 암으로 사망한 그는 진정 미국혼을 상징하는 강한 사나이로서의 연기를 보여 주었다.⑤음력 오늘을 해마다 음력 5월 13일을 '죽술일'이라고 한다. 이날에 대나무를 심으면 잘 자란다고 하는데서 나온 말이다. 대나무는 주로 남부지방인 전라도와 경상남도지방에서 많이 생산되는데 특히 담양의 죽세공품은 유명하다. 이 지역에서는 매년 이날에 대를 심는다.◆一日五話(5월 14일)①루이 13세의 쿠테타나이 불과 아홉 살에 왕위를 계승한 루이 13세, 하지만 실권은 왕이 아닌 모후 메디시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결혼 후에도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왕은 궁중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년간을 내전을 계속한 끝에 겨우 왕권을 장악했지만 병약하여 1643년 오늘 세상을 떴다.②아들 통해 천연두 실험15세부터 의학공부를 시작한 영국의 제너는 천연두엔 우두가 효과가 있음을 알았다. 그는 사랑하는 8세의 아들을 통해 실험한 끝에 마침내 성공했다. 이 연구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하여 인정을 받았다. 마침내 그의 연구는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그 후로부터 우두를 접종하여, 많은 인명을 보호하게 된 것이다.③조명하 의사의 의거1928년의 오늘 오전 9시50분 쯤, 대만 대중의 거리에 고급차가 달리자, 한 청년이 차에 뛰어들어 독검을 던지고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차안의 인물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 구니노미야였고, 습격한 청년은 23세의 조명하의사였다. 구니노미야는 이 상처로 1년 후 사망.④중동의 진흙싸움 시작이스라엘의 건국이 결정된 것은 1948년의 오늘, 테레아비브에서 열린 제4회 전국평의원대회에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이날 건국선언이 발표되자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권 각국은 맹공격을 가해 왔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파레스티나의 진흙싸움은 시작된 것이다.⑤"신이 나에게 이 왕관을""신이 나에게 이 왕관을 줄 때, 프랑스 국토 절반은 황폐했었다" ― 이는 프랑스 국왕 안리 4세의 말이다. 처음에는 개신교도였지만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황폐된 국토재건에 전력투구 했다.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그는 1610년의 오늘 세상을 떠났다.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5.12 23:02

[시론] 촌지로 교사들 욕되게 하지 말라 - 이강녕

필자가 현직 초등학교 교장시절, 그러니까 80년대 초반 학부모와 교사간의 촌지 수수를 막기 위해서 학년초에 관례적으로 있던 가정방문마저도 중지시켰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물론 필자는 이런 행정지시를 눈감고 가정방문을 강행했다. 가정방문은 학생이해의 출발이며 이 학생 이해야말로 교육의 시작으로 알고 있었다. 가정 방문 전에 학생을 이해 할 수 있는데 까지 관찰하고, 검사하고, 기록하여 충실한 준비를 가지고 가정방문을 함으로써 가정의 교육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을 살피고 상담함으로써 가정 방문이야말로 진실 된 학생교육을 돕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결과로 가정방문을 마치고 난 교사들은 교무실에 삼삼오오 모여 어제의 가정 방문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 할 것 도 없이 가정 방문시 학부모들이 관례적으로 주는 촌지 등 일체의 향응을 사양하고 왔다는 것이 그 화두였다. 이는 정말 자랑스런 풍경이었다. 이야기 중에는 복장도 단정하고 공부도 잘 하는 어느 학생이 있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부형이 코도 안보여 조금은 섭섭하게 생각했는데 실제 가정 방문을 나가 보니 단 칸 셋방살이였으며 문은 열쇠로 잠겨져 있었고 엄마는 장바구니 들고 노점상으로 나가고 학생 하나만이 동그마니 마루를 지키고 있었다는 일화도 나왔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전 직원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난다.'가정 방문을 가보니 잘 사는 줄 알았던 아이의 집이 단 칸 셋 방에 어머니는 노점상을 나가고 방문은 열쇠로 굳게 잠겨져 있었다. 이 상황을 보고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이것만으로도 가정방문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말이다. 요사이 스승의 날을 앞두고 귀가 아플 정도로 찢고 바수는 이야기가 많다. 그 대표적 이야기가 스승의 날 선생님에게 주는 촌지 문제인 듯 하다. 그렇다! 스승의 날 촌지야말로 학교 풍토를 좀먹는 병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방법을 달리 하면서 교육의 한 방향을 바꿀 수는 없을 까. 필자는 현직 시절 스승의 날이 멀지 않은 자모회 총회에서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자기 자식에게 효도하라 가르치겠습니까, 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너를 위해 수고하신 분이 누구냐?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라!' 일 것입니다. 지금 너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은 선생님이시다. 이번 스승의 날 선생님께 선물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야기 해 보렴! 이렇게 자녀와 상의하면서 선생님께 조그만 선물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부모를 부모답게 알도록 가르치는 것 아닙니까?” 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교사들의 분위기도 좋아졌고 학부모들의 의식도 달라진 것으로 기억된다.더이상 교직자들, 특히 일선 교사들을 욕되게 하지 말자. 학부모들이 자기 자식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진실 된 부모입장에서 조그만 선물을 하는 것, 이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다만 돈을 봉투에 넣어 촌지라는 이름의 손쉬운 선물에는 필자도 반대한다. 그리고 교사들에게도 부탁이 있다. 지금은 교직이야말로 만인이 원하는 직업이 아닌가. 이제 몸을 바로 잡자. 그래서 스승의 날이 어린이와 부모와 스승 등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날이 되고 이런 경험을 통해서 사회가 밝아지는 그런 계기가 되기를 기대 해 본다. /이강녕(전 전북교육연구원장)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5.12 23:02

[시론] 축제의 스승의 날을 기다리며 - 김형중

5월은 계절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봄의 끝자락이다. 길고도 춥던 겨울의 매서운 기세도 3월이 되면서 수은주를 끌어 올리는 봄의 강한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4월을 지나오면서 하루가 멀다 않고 황사가 엄습하는 등 화려한 5월을 위한 봄은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그 4월을 지나 그토록 기다리던 5월의 기운은 얼마나 맑고, 또 향기로운가.5월에 들어서면서 앞산 뒷산은 빨주노초 색동옷을 입은 한 폭의 산수화로 그려지고 있다. 지난 5일 어린이 날이자 부처님 오신날, 8일 어버이날에 이어 15일은 성인의 날과 스승의 날이 겹쳐온다. 올해 5월은 계절의 여왕답게 무려 열 한 개의 각종 기념일이 몰려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해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스승의 날이어서 참으로 유감스럽기 그지 없다.'만남으로 시작해서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살이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인생에서 더 없이 소중한 만남이다. 학생들이 인생살이에 눈뜨고, 가치관을 형성하고, 세상에 마음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가는 과정에서 스승의 가르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교단 안팎에는 불신이 난무하고, 마음이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즐거워야 할 스승의 날을 앞두고 '고민'이 앞서는 교단이 씁쓸하기만 하다. 물론 이런 지경에 까지 불러온 어지러운 교육 현장을 필설로 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교육계에 종사하는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하고, 불신을 믿음의 장으로 이끌어가는 반성과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극소수 교사들의 부주의한 언행은 45만여 교육동지들의 얼굴을 어둡게 만들곤 하지만, 그래도 산골오지나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불평불만 한마디 않으면서 가르침을 천직으로 알고 학생들에게 충실한 선생님들이 더 많고, 이는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일제 하에서는 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횃불이 되었고, 민족해방과 동족상잔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던 시대에는 허물어져가는 민족정신을 바로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경제개발의 기치를 높이 흔들어 대던 60~70년대의 스승들은 인재를 양성하고, 산업 일꾼을 키워냈다. 지금 교단에는 그 선배님들의 교육관을 바로 세워가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후배교사들이 더 많다고 감히 자부하고 싶다. 신뢰받는 학교문화와 믿음직한 교육풍토를 만들기 위해 지극 정성을 다하는 모두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나아가 그들의 허탈한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의 좌표가 참된 교육 봉사의 자세로 꽉 채워질 때까지 서로가 믿고 의지하며, 소신을 펼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겠다. 그리고 감히 당부의 말씀도 드리고 싶다. 이 땅의 교육자들이 울적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강한 소신과 불같은 열정을 오직 학생들 만을 위해 바칠 수 있도록 학부모님들께서도 도와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옛날처럼 스승으로 공경 받던 전래의 미풍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르치는 선생님과 배우는 학생의 인연으로 카네이션 한 송이 정도는 가슴에 채워지는 모습이 그립다. 또 선생님들이 교단에서 흔들림없는 사명의식으로 우리들의 후배들을 훌륭한 인격체로, 또 이 나라의 초석으로 길러낼 수 있는 제반여건이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형중(전북여고 교장)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5.12 23:02

아직까지 복구안된 도로...운전자들 곡예운전 일쑤

지난해 폭우로 유실됐던 금산사 방면 712호 지방도의 뒤늦은 복구공사가 시민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전주시 용복동에서 금산사에 이르는 이 도로는 지난해 7월 폭우로 산비탈에서 쓸려 나온 토사가 아스팔트 도로를 훼손해 도로 곳곳이 쑥대밭을 이루고 있다.길게는 20여m, 짧게는 2∼3m 간격으로 유실된 도로 6∼7곳은 수해가 있은 지 10개월이 다 돼가도록 아직 포장공사도 마치지 않고 있다.또 전주∼금산사 방면 도로는 방호벽마저 사라져 대형사고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상황.실제 지난해 12월에는 전주시 용복동 독배마을 앞 세내길 도로에서 금산사 방면으로 가던 1t 트럭(운전자 박모씨·34·여)이 10여m 아래 계곡으로 추락해 박씨의 작은 아들 백모군(5)이 현장에서 숨지고, 박씨와 큰아들 백모군(7)이 크게 다쳤다.사고가 난 곳은 방호벽이 유실된 지점으로 아직도 이 곳에는 방호시설이 없어 교통사고 사각지대로 전락했다. 이 곳뿐 아니라 경사로에 급커브 지역이 많지만 방호시설, 위험표시 등이 갖춰져 있지 않아 제2의 인명피해마저 우려된다.이 도로를 자주 이용한다는 최모씨(28·전주시 삼천동)는 “도로포장이 안돼 뿌옇게 먼지가 오르는 것은 둘째치고 야간에는 방호시설과 조명 등이 부족해 아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완산구청 관계자는 “예산확보가 안돼 복구공사가 올해로 미뤄졌다”며 “수해방지를 위해 배수로 작업과 도로 밑 흉관 매설 등의 작업으로 인해 도로포장이 늦어지고 있으나 이번주중 포장을 마칠 계획”이라고 말했다.이 도로는 6개 공구 220m 구간에 대한 보수공사가 계획돼 있다.

  • 지역일반
  • 임상훈
  • 2006.05.12 23:02

명창 고향임씨 '3전4기' 치열한 준비...'노력도 장원'

“명창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소리여야 명창이라는 칭호를 듣지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제32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고향임씨. “상에 대한 부담이 크다”는 말로 수상소감을 대신한 그는 스승인 오정숙명창과 자신에게 늘 용기를 주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먼저 전했다. 고씨는 다소 늦게 소리를 시작했다. 연극워크샵에서 만난 오정숙명창이 그를 소릿길로 이끌었다. 그때 나이가 스물넷이다. “선생님 소리에 매료돼 소리를 시작했습니다. 보컬싱어를 한 남편의 적극적인 후원도 힘이 됐습니다. 할수록 어려운게 소리지만 삶의 곰삭은 맛을 표현해 낼 수 있어 좋습니다. 소리를 사랑합니다.”대사습 명창부 도전은 올해가 세번째다. 2004년과 2005년에는 예선탈락을 했단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올해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야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치열하게 준비한 덕에 세번째 도전에서 장원에 등극했다. 본선무대에서는 춘향가중 ‘동헌뜰에서 어사 상봉대목’을 불렀다. ‘어사출두대목’이나 ‘옥중가’가 더 자신있었지만 좋은 날이라 경사스러운 대목을 택했다. “소리가 크고 힘이 있어 남성적이라는 평을 듣습니다. 대신 야무진 맛이 부족합니다.” 스스로 소리공력이 부족해 공부가 멀었다는 그는 끝까지 소리공부를 놓지 않은 故 박동진명창과 오정숙명창을 존경한다고 말했다.대전에서 판소리전수관을 운영하며 후학을 기르고 있다. 충청도를 제2의 전주로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군산출신이며, 전국한밭국악대회 국무총리상, 한국전통예술경연대회 문화관광부장관상 등을 받았다. 대전광역시 판소리 동초제 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고씨는 상금 1500만원과 승용차를 부상으로 받았다.

  • 지역일반
  • 은수정
  • 2006.05.11 23:02
지역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