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백의 一日五話] 1942년 일본시인 기타하라 사망
◆ 11월 2일①소련인 750만 사망이 최고1947년 오늘, 마tif 미 국무장관은 ‘대영백과사전’에 2차 대전의 기사를 기고한 일이 있다. 그에 따르면 대전 중 전사, 실종자는 1,500만 명 이상인데 그 중 소련 750만 명, 독일인 285만 명, 중국인 220만 명, 일본인 105만6천명, 영국인 45만2천명, 미국인 49만5천명이라고. ②일제, 한국 변호사 참석 반대1923년의 오늘, 중국 북경에서 동양변호사 회의가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김병로 허헌이 인 등 20여명이 참가했다. 당시 중국과 필립핀은 한국대표를 환영했는데, 일본인 변호사는 우리의 참석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리하여 우리 대표는 끝내 공식 참석을 못했다.③일본 시인 기타하라 사망일본의 근대문학사상 시성이라고까지 불리는 기타하라(北原白秋)가 1942년 오늘,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30년대 초, 동지사 대학의 정지용(鄭芝溶)의 투고시를 대하고 “조선인에도 이러한 시인이 있느냐”고 감탄. 그의 시지 “근대풍경‘의 머리에 실었다.④버트 랑카스타 사망미국 서부극의 명우 버트 랑카스타가 1913년의 오늘, 출생했다. 그는 ‘OK목장의 결투’를 비롯하여 많은 서부극에 출연했는데 특히 ‘에르마 간드리’에서는 명연기로 아카데미 영화상의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1994년 10월, 급작스런 심장발작으로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⑤일본서 인력거 1백대 수입자동차가 등장하기 전 일본에서는 도시 교통수단의 하나로 인력거를 개발 운영했다. 말하자면 택시 구실을 한 이 인력거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03년의 오늘이었다. 당시 한국정부에서는 일본으로부터 인력거를 1백대를 수입한 것이다. 이때부터 서울을 비롯, 전국 각 도시에 인력거가 나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