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10 19:48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전시·공연
일반기사

[최동현의 명창이야기] (48)명창 김성수(1)-불구의 몸으로 소리판에서 살아남은 소리꾼

명창대회 큰 상은 타보지도 못했지만…

판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할 때였다. 당시 전라북도에도 소리를 들을 만한 남자 소리꾼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제에 사는 김성수(1929~1993)와 정읍에 사는 임준옥(1928~1987)이라고 하였다. 임준옥은 임방울의 제자로 당시 정읍국악원에 있었는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고, 김성수는 김제에 있다고 하였다. 1980년대 초에는 남자 소리꾼이 참으로 드물 때였다. 전라북도를 통틀어도 이 두 사람 외에는 강도근과 홍정택, 이성근(명고수) 밖에 없었다. 이들 중에서 무대에 설 수 있는 사람은 강도근 뿐이었다. 홍정택과 이성근은 이미 무대에 서지 않고 있었다. 설 무대도 없었다.

 

임준옥은 딱 한 번 만났다. 임방울의 <적벽가> '군사설움타령'을 불러주었는데, 지나치게 계면조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성수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김제에 살던 친구의 어머니 회갑잔치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한쪽에서 소리판이 벌어져 어떤 남자 소리꾼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소리를 하는데, 참으로 맛있게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김성수였다. 얼마 후 나는 김성수의 집을 찾았다. 그는 김제경찰서 앞에 살고 있었는데, 북 위에 사설집을 올려놓고 소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설집은 <김연수 심청가> 였다.

 

김성수는 불운한 소리꾼이었다. 어디 가서 크게 박수를 받은 적도 없고, 흔한 명창대회에서 큰 상을 타보지도 못했다. 유명한 소리꾼에게 소리를 배운 적도 없어서 계보가 불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그는 어릴 적에 앓았던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가 성치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오른쪽 발밑에 나무로 깎아 만든 받침대를 받친 뒤 신발을 신고 다녔다. 폐결핵마저 앓고 난 뒤에는 숨이 짧아지고, 상청이 많이 꺾였다고 하였다. 어느 모로 보나 각광을 받을 만한 소리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소리는 참으로 맛이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소리를 엮어나가는 솜씨는 대가의 기품은 없었지만, 최고의 기교가로 내세워도 좋을 만큼 멋이 있었다. 판소리계에서는 잘하는 여창보다 좀 모자란 남창이 낫다고 말한다. 판소리가 본래 남자들만 부르던 것이었기 때문에 남성중심적인 미학을 가지고 있어서도 그러겠지만, 남자 목소리가 아무래도 폭이 넓고 깊이가 있어서 훨씬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성수는 여기저기서 홀대를 받았고 견제의 대상이 되었지만, 판소리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김성수와 이런저런 인연을 쌓았다.

 

김성수는 고창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태어난 곳은 법성포이다. 법성포에서 태어나기는 했어도 바로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검당마을로 이사하여 성장했기 때문에, 고창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김성수가 어린 시절을 보낸 검당마을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소리꾼 진채선이 태어난 곳이다. 검당마을은 소금을 굽던 곳이어서 한 때는 매우 융성했다고 한다. 진채선의 집안에서는 이곳을 중심으로 대대로 무업을 이어왔었다. 그런데 김성수의 아버지가 이곳으로 이사를 하여 이곳에 터를 잡았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당골판(무당의 관리 구역)의 매매와 관련된 듯하다.

 

김성수의 집안 사람들은 대대로 음악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 김기운은 대금의 명인이었고, 아버지 김용달은 판소리를 곧잘 불러 부안 출신의 기교적인 소리꾼인 신영채와 교우를 할 정도였고, 고모 김추월은 시조 명인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러니 김성수는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성장을 했을 것이며, 자연히 소리꾼의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수의 불편한 다리도 소리꾼의 길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차피 육체노동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불편한 다리 때문에 소리판에서는 번번이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명창은 첫째가 인물치레"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소리꾼으로 살아남았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북일보 desk@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