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학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
신라시대 금석문 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 진흥왕순수비를 들 수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년, 재위 : 540-576년)은 7세에 법흥왕의 양위로 왕이 되었는데, 즉위 당시에는 너무 어린 탓에 어머니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안정된 왕권을 수립한 진흥왕은 이후 정복활동을 통하여 신라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는 새로 개척한 땅을 순무하며 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가 전한다. 이 4개의 비가 순수비로 밝혀지는 데에는 조선후기 금석학자이자 대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의 공로가 크다.
김정희는 1786년 충남 예산에서 김노경의 장자로 태어났으나 출계하여 서울에 있는 백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 그의 대를 이었다. 그러나 12세 때 김노영과 조부 김이주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는 불운이 닥쳤다. 그 후 추사는 생부인 김노경의 영향권에 있으면서, 당시 신진학자로 이름이 높던 북학파 초정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학문에 대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박제가는 이미 연경을 세 차례나 방문한 적이 있는 북학자로서 선진의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던 추사가 동지사 부사로 선발된 아버지를 수행하여 연경(북경)에 들어간 것이 24세였다. 추사는 이미 박제가로부터 북학에 대한 수업을 받아 누구보다 의식이 앞서 있었고, 배움의 열기도 뜨거웠다. 이 때 추사는 중국의 대학자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사제의 연을 맺고 그들로부터 학문과 문화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호를 완당(阮堂)이라 바꾸고 옹방강의 호인 담계(覃溪)를 따서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사용하였다.
연경을 다녀온 추사는 금석학에 눈을 돌렸다. 이것은 연경에 갔을 때 두 스승 특히 금석학자였던 옹방강에게 조선의 고비 탁본들을 선물하였는데, 그 탁본들을 살펴본 옹방강이 여러 가지 가르침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귀국한 추사는 이후로 조선의 산하를 누비며 고대 금석문을 발굴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추사의 금석학은 연행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말할 나위가 없다. 그에게 금석학은 당시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던 세도정치의 상황에서 정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정치 밖의 일에 몰두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추사의 금석학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일이다. 특히 북한산 진흥왕비를 고증하여 속설을 변파한 일은 특기할만하다. 북한산비와 후에 재발견한 황초령비를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라는 제목으로 치밀하게 논증한 원고에서 문헌고증의 방법을 총동원하여 비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이 과정에서 역대 전적의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고 종래의 의혹된 설을 변파하는 등 금석학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실로 고증학적 학문자세를 가장 여실하게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추사가 북한산비를 발견한 것은 31세 때, 연경에 다녀온 6년 뒤의 일로서 그 경위가 문집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왔다. 그런데 가경 병자년 가을에 내가 김경연과 함께 승가사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 마침내 이 비를 진흥왕의 고비로 단정하고 보니, 1천 2백년이 지난 고적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되었다. 금석학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 여름에 또 조인영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심정하고 돌아왔고, 그 후에 또 두 자를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추사에 의해 비로소 북한산비가 진흥왕순수비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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